덕분에, 패키지 없는 패키지여행
드물게 찾아온 긴 연휴. 40년 후에나 비슷한 연휴가 있다고 한다. 어떻게 시간을 보낼지 결정하는 건 순전히 개인의 의지다. 숨 가쁘게 빼곡한 일정표를 작성할 것인지, 그야말로 영감이 떠오르는 대로 충동적으로 보낼 것인지. 이번에는 세모다.
계획의 어중이
모처럼 계획을 세웠다. 없는 기력을 쥐어짜서 일찌감치 굵직한 결정도 몇 개 끝냈지만, 뜻하지 않은 이유로 취소했다. 갑자기 시간을 어떻게 써야 할지 잘 모르겠기에 뭉개다 보니, 현실적으로 해야 하는 일들이 하나둘 떠올라 다시 거창한 계획을 세우는 건 좀 어렵다고 생각했다.
스스로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방법이 있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는 것. 완전한 타인이라면 "패키지여행"쯤 된다. 가족이라면 그저 고마운 일이다. 입을 다물 자신이 있다면, 그저 따라다니기만 하면 하루를 꽉 채울 수 있다. 만약 내 취향을 저격한다면 더욱 고마운 일이다. 덕분에 출발이다.
뻔한 건 너야
보내준 일정표는 보지 않았다. 그저 일찍 일어나야 한다는 사실만 기억하고 짐을 쌌다.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는 편이 더 흥미로울 것 같았다. 괜히 까탈스럽게 입을 데다 마음 상하게 할 가능성도 줄이고. 돌발상황 없이 순조롭게 도착한 휴게소. 예상치 못하게 모닝 커피가 훌륭했다. 그러니까 신이 있다면 플래너의 노력을 가상하게 여겨 자비를 베푼 셈이다.
짧은 산책으로 본격적인 일정을 시작했다. 갈대습지까지는 계획이었던 모양이다. 다만 보랏빛은 우연이라고 했다. 이리저리 휘날리는 모습을 상상할 법한데, 갈대밭은 마치 라벤더밭처럼 온통 보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높은 하늘, 따사로운 햇살, 이따금 부는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숲 너머의 하천에는 윤슬까지 반짝거렸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덕분에 컬러풀한 가을을 만났다.
다시 도파민
다시 바다. 원래 도파민이라는 게 한계가 있다. 스무살에는 모래사장에 앉아 깨진 조개껍질만 봐도 기분이 좋아. 크게 글자를 써보거나 파도 소리를 담기도 한다. 이제는 별 기대가 없다. 그런데 전에 없던 그네 발견. 폐장한 해수욕장에서는 자리를 차지 하기 위해 줄을 서거나 얼마나 타도 되는지 눈치 볼 이유가 없었다. 어린 시절과 비교하며, 그땐 왜 그렇게 겁이 없었나 싶어 한참 웃었다. 뻔한 건 바다가 아니라 나였던가 싶다.
오랜만의 전경을 봤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것을 좋아한다. 다만 오르는 건 싫어. 무기력한 걸음을 떼려면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한다. 이따금 한 번씩 용기를 냈었는데 요즘은 엄두가 안 났다. 고맙게도 별다른 노력 없이 목격한 절경. 수고는 다른 사람이 했기 때문이겠지. 어쩐지 고맙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가끔 고요를 깨는 소리가 들렸다. 가까운 바다에서 어망을 치는 어부들이 서로를 향해 무엇인가를 외쳤다. 근처 갯바위에서 하염없이 낚싯대를 바라보던 아저씨는 이런 상황이 익숙한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이어지는 산책로에는 신기한 모양의 바위나 작은 암자까지. 덕분에 지루할 틈 없이 반짝이는 가을을 만났다.
이제는 따라다니는 것도 쉽지 않은 지 해가 지기 전에 기절했다. 노을은 알아서 져버렸겠지. 바다뷰 숙소의 통창에 얼굴을 들이대니, 어둠뿐이다. 그래도 덕분에 공허하지 않네. 스스로 애를 써보고 있지만 쉽지 않은 요즘, 이렇게 누군가의 힘을 빌려 또 하루를 채웠다. 고마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