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긴 글과 긴 영상에 대한 소비가 줄어들고 있다. 길다는 것의 기준이 저마다 차이가 있지만, 출판계에서는 긴 글을 대표하는 대하소설이나 장편소설의 인기가 점점 시들해지고 있다. 스마트 디바이스 환경과 모바일 시대에 맞춰 글보다 동영상을 선호하는 사용자들이 급증하고 있다. 다양한 미디어 채널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MZ세대(1980년부터 2004년생까지를 일컫는 밀레니얼 세대와 1995년부터 2004년 출생자를 뜻하는 Z세대를 합쳐서 부르는 용어)는 짧은 시간에 콘텐츠를 만들고, 소비할 수 있는 플랫폼으로 달려가고 있다.
이러한 콘텐츠 생태계에서 새롭게 주목받는 유형이 바로 숏폼 콘텐츠(Short-form Contents)다. 단어 그대로 짧은 길이의 영상을 의미하는데 보통 10초부터 10분까지 길이에 다양한 유형을 담아낸다. 일반적으로 숏폼 콘텐츠를 영상에 한정해서 논의하기도 하지만, 생산과 소비 관점에서 유의미한 가치를 가진 짧은 글(텍스트)이나 음악(오디오)도 숏폼 콘텐츠의 영역에 포함하는 것이 합리적인 정의라고 본다.
숏폼 콘텐츠와 신(新)문고본의 등장
최근 숏폼 콘텐츠의 인기를 불러온 진원지는 SNS 플랫폼인 ‘틱톡’과 ‘유튜브’로 지목할 수 있다. 틱톡은 서비스 초기에 ‘킬링타임용 15초 짜깁기 영상’이라는 비난을 받았기도 했지만, M Z세대를 타겟으로 ‘펀(fun) 마케팅’을 추진하면서 글로벌 콘텐츠 플랫폼을 성장했다. 개인 이용자들의 일상에 흥미로운 음악을 더한 짧은 영상이 유행처럼 확산되면서 세계적인 셀럽(Celebrity)들도 틱톡을 홍보와 영상 중심의 커뮤니케이션 채널로 적극 활용하고 있다.
2020년 9월 유튜브는 '틱톡'과 유사한 숏폼 콘텐츠 플랫폼인 유튜브 쇼츠(YouTube Shorts)를 인도에서 베타버전으로 공개했고, 2021년 3월 국내에도 적용되었다. 틱톡보다 더 짧은 15초 길이의 영상을 담을 수 있는 숏폼 동영상 앱이다. 크리에이터가 더 창의적인 콘텐츠를 생산하는데 도움이 될수 있도록 다양한 영상편집툴과 속도조절, 타이머, 카운트 다운 등의 기능을 제공한다.
대부분의 성공적인 숏폼 콘텐츠는 연재 형식, 시리얼(serial) 콘텐츠로서의 정체성을 가진다. 나아가 창작과 향유의 유동적인 경계를 통해 사용자는 적극적으로 콘텐츠를 소비하거나, 직접 콘텐츠 창작의 주체가 되기도 한다. 생산과 소비층의 교집합이 많다는 것은 플랫폼의 네트워크 효과(network effect) 증대에 큰 힘이 된다. 즉, 같은 상품(서비스)을 소비하는 사용자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그 상품과 서비스를 소비하면서 얻게되는 효용이 더욱 증가하는 것이다. 다루기 쉽지 않았던 소재와 표현 등 콘텐츠적 실험을 지속 가능하도록 한 것이 숏폼 콘텐츠가 가진 힘이다. 잘 만들어진 콘텐츠를 공개하고 소비만 하는 것이 아니라, 꾸준히 사용자와의 직간접적인 상호작용을 한다는 점도 중요한 사항이다.
디지털 광고 미디어랩인 ‘메조미디어’ 조사에 따르면 연령대가 낮을수록 짧고 간결한 동영상의 시청을 선호하고, 실제로 20대 이하의 세대가 선호하는 동영상 시청 길이는 15분 내외로 조사되었다. 디지털 네이티브로 불리는 최근 20대의 이하 세대의 숏폼 콘텐츠 이용률 증가와 관련 플랫폼의 성장은 당분간 지속될 전망이다.
숏폼 현상은 콘텐츠를 넘어 다양한 산업 내 마케팅으로 확장되고 있다. 대표적인 분야로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를 제공하는 OTT(Over The Top, 온라인동영상서비스) 플랫폼을 들 수 있다. 넷플릭스, 티빙, 웨이브 등 막대한 제작 투자를 해야 하는 ‘오리지널 콘텐츠(original contents)’보다 상대적으로 부담이 적은 미드폼(mid-form)과 숏폼의 확대를 추진하고 있다. 최근 넷플릭스는 회당 러닝타임이 15분 이내인 시트콤을 제작해 방영하며, OTT 숏폼 플랫폼의 선두주자로 부상하고 있다.
이렇게 숏폼 콘텐츠의 선호도가 높아짐에 따라 기업의 마케팅 활동을 위한 광고 동영상 역시 변화하고 있다. 기업의 마케팅용 광고 동영상 평균 길이도 점차 짧아지면서 숏폼 콘텐츠와 유사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캐나다의 동영상 마케팅 플랫폼인 비드야드(Vidyard) 발표에 따르면, 2018년 기업의 광고 동영상 평균 길이는 4.07분으로 조사됐으며, 2016년 대비 9.07분이나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기업의 전체 마케팅용 광고 동영상의 약 73%가 2분 이하로 제작된 숏폼 콘텐츠 형태이며 이러한 추세는 앞으로 더 확대될 전망이다. 숏폼 콘텐츠의 인기로 국내에서는 게임/커머스/영화 등의 업종에서 숏폼 광고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면서 숏폼 동영상 광고 효과가 큰 10~20대를 중심의 광고 기획이 각광받고 있다.
최근 출판계에도 숏폼 컨셉으로 독자들이 편하게 읽을 수 있게 만드는 기획물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기본 구성상으로 페이지 숫자가 적은 문고본 형태의 다양한 기획과 출판물이 이런 현상을 대표한다. 국내 출판계 숏폼 콘텐츠의 역사를 거슬러 보면, 삼중당문고, 을유문고, 범우문고, 살림지식총서, 시공디스커버리, 문지스펙트럼 등으로 당대의 지식문화의 흐름을 관통하는 시리즈로 연결된다. 스마트 미디어 환경에서 기존의 종이책 문고본 시장은 판형의 변화 외 트렌드를 조명하는 주제와 소장 욕구를 자극하는 아이템이 결합된 출판물로 진화하고 있다.
2016년 12월, 신(新)문고본의 부활을 알렸던 민음사는 토마스 만의 단편소설 <키 작은 프리데만 씨>와 로베르트 발저 작품집 <산책>, 버지니아 울프의 에세이 <자기만의 방> 등 '쏜살문고' 7권을 펴냈다. 이후, <세계문학전집 속 단편 시리즈>, <다니자키 준이치로 선집>, <여성 문학 컬렉션> 시리즈 등 80여 권을 출간했다. 새로운 편집과 디자인, 좀 더 가벼운 가격, 한 손에 잡히고 휴대하기 용이한 판형과 완독의 즐거움을 선사해 줄 200쪽 내외의 부담감없는 분량이라는 컨셉으로 독자들의 호평을 얻고 있다.
민음사는 2020년 초 ‘책보다 짧고 논문보다 쉬운’ 인문 잡지 <한편>도 창간했다. 1주일 만에 3천부 초판을 모두 판매할만큼 대중의 인문학적 욕구를 짧은 포맷으로 채워주고 있다. 잡지는 매 호 하나의 주제 아래 사회학, 정치학, 문화인류학, 인구학, 철학, 미학 등 10편의 글을 싣는 방식으로 구성된다. 숏폼 잡지의 전형으로 부각된 <한편>은 만드는 방식과 팀 구성이 특이하다. 인문교양팀, 논픽션팀, 해외문학팀, 한국문학팀 등의 편집자들이다. 주제별로 젊은 편집자들이 헤쳐 모이는 방식이다. 편집자의 전문성을 빠르게 연결하고 콘텐츠의 완결성을 확보하는데 최적화된 조직 구성을 보여주었다.
민음사에 이어 2017년부터 마음산책의 '마음산문고', 작가정신의 '소설향' 시리즈, 유유의 ‘땅콩문고’ 등 중견과 신진 출판사의 문고본 시리즈도 등장했다. ‘열린책들’은 외국 문학작품 가운데 프랑스 소설을 중심으로 200쪽 내외의 작품을 모아 ‘블루컬렉션’을 선보였다. 일상적인 사물을 소재로 한 아름답고도 짧은 시리즈'를 기치로 내건 '오브젝트 레슨스'(Object Lessons) 한국어판 시리즈도 출간됐다. ‘해리포터' 시리즈로 유명한 영국 블룸즈버리 출판사가 펴내는 이 시리즈는 하나의 오브젝트를 주제로 분량이나 형식에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글쓰기를 통해 사물의 이면을 독특하게 풀어내는 구성이다.
2017년 1인 출판사가 세 곳(위고, 제철소, 코난북스)이 연합해 만든 ‘아무튼 시리즈’는 경량화된 에세이 시리즈의 포문을 열었다. 1인 출판사로 기획과 출간 속도 등 일정 수준의 제약을 연합을 통해 과감하게 해결하면서 양질의 콘텐츠로 독자들의 흥미를 유발하고 있다. 출판사 세미콜론은 살면서 마주하는 음식을 먹으면 머리와 배 속이 ‘띵’하는 이야기를 담겠다는 의미로 에세이 시리즈 ‘띵’을 새롭게 펴냈고, 출판사 시간의흐름은 ‘끝말잇기’를 테마로 한 에세이 시리즈 ‘말들의 흐름’을 선보였다. 출판사 문학과지성사는 2020년 3월 논쟁적 주장이 담긴 정치·사회·예술 에세이와 작가가 남긴 편지·메모·일기를 소개하는 인문 시리즈 ‘채석장’을 선보였다.
외부에서 출판계로 진입한 출판계의 스타트업의 숏폼 콘텐츠 제작과 유통 행보도 주목된다. 쓰리체어스의 ‘북저널리즘(bookjournalism)’은 숏폼, 미드폼, 롱폼(long-form)의 지적 콘텐츠를 발행하고 있다. 정치/경제/사회/문화/테크/일 방면의 콘텐츠를 주제로 하며, 숏폼은 매일 회원들을 위해 이슈 또는 일의 맥락과 배경까지 전달하는 뉴스를, 단편소설 한 편 분량의 미드폼은 디지털 에디션으로, 롱폼은 프린트 에디션 형태로 출간하고 있다. 문학 분야 스타트업인 스튜디오봄봄이 2017년 1월부터 서비스를 시작한 초단편 소설 및 웹소설 플랫폼 ‘판다플립’(pandaflip)도 출판계의 새로운 시도로 주목된다. 김연수, 성석제, 장강명, 최은영 등 유명 작가들에게 2천자 내외의 짧은 소설을 기고하면서 주목받았고, 숏폼 시대의 ‘3분 독서’를 위해 다양한 문학 콘텐츠를 제공하고 있다.
웹소설과 웹툰 등 원천 IP(Intellectual Property)를 활용한 숏폼 콘텐츠 제작도 본격화되고 있다. KT 자회사인 스토리위즈는 웹소설, 웹툰 원천 지식재산(IP)과 영상화 기획 개발 역량을 기반으로 국내 최고 영상 제작 역량과 글로벌 유통 채널을 보유한 KBS미디어와 OTT에 최적화된 숏폼 콘텐츠를 공동 기획/제작한다. 글로벌 OTT 사업자들이 오리지널 콘텐츠 제작에 사활을 걸고 있는 시기인만큼 매력적인 스토리가 풍부한 웹소설/웹툰 IP 확보 경쟁은 더욱 치열해지고 있다. 코로나19로 무대를 잃은 공연계도 온라인에 최적화된 ‘숏폼’ 제작에 뛰어들기 시작했다. 공연 실황 녹화물 스트리밍, 온라인 생중계, 콘텐츠 유료화에 이어서 한 단계 나아간 시도로 분석하고 있다. 웹뮤지컬, 웹연극이라는 새 용어도 등장하는 등 숏폼은 문화산업의 전방위에 펼쳐지고 있다.
숏폼 출판 콘텐츠에 대한 기대
아날로그와 디지털을 넘나드는 숏폼 출판 콘텐츠는 MZ세대가 주축인 동영상 서비스, OTT 플랫폼과는 사용자 차이가 있다. 주로 스마트폰을 통해서 빠르고 간편하게 생산과 소비 활동을 이어가지만, 출판 콘텐츠는 상대적으로 긴 과정과 시간이 필요하다. 텍스트를 영상이나 오디오 클립 형태로 형태적 변화와 짧은 시간에 제작/소비시킬 수도 있지만, ‘책 다움’에 대한 생산자와 소비자들의 본연적 가치는 유지되어야 한다. 지난 5년여 간 출판계의 숏폼 바람을 불러온 신문고본도 ‘책다움’은 유지하면서 판형, 분량, 디자인 등의 변화에 주력하면서 독자들에게 신선함을 보여주고 있다.
영상 중심의 숏폼 콘텐츠는 기능적으로 휘발성이 강하기 때문에 즉흥적인 측면이 많다. 사용자 관점에서 콘텐츠의 음미 과정은 사라지고 또다른 콘텐츠로 빠르게 이동하는 과정으로 쳇바퀴처럼 돌아간다. 이해와 사색의 시간을 제공하는 독서 활동에 출판계 숏폼은 영상의 논법과는 다른 길을 걸어가야 한다. 그것이 숏폼 출판 콘텐츠가 새로운 영역과 가치를 만들어내는데 핵심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단순히 짧은 형식이라기 보다는 주제와 내용에 밀도를 높이면서 휴대성까지 지원하는 방향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성장 속도를 높이고 있는 숏폼 콘텐츠의 소비는 롱폼 콘텐츠에 대한 새로운 희망을 품게한다. 빠르고 짧은 콘텐츠 소비에 매몰된 독자들에게 롱폼은 속깊은 고민과 숙련된 장인의 솜씨로 느껴질 수 있다. 여유를 가지고 책과 진득한 교감을 원한다면 롱폼을, 여유가 부족하거나 이동간에는 숏폼을 자유자재로 이용한다면 최적의 독서를 즐길 수 있다. 이를 위해 숏폼의 수요를 롱폼으로 연결시키기 위한 기성 출판계의 노력이 더욱 요구된다. 각종 동영상/게임/음원 등에 집중된 대중의 콘텐츠 수요를 출판(책)으로 돌릴 수 있는 신선한 아이템을 지속적으로 발굴해야 한다.
결국, 숏폼의 시대에도 ‘독자들의 변화하는 관심사를 어떤 방식으로 어디까지 따라갈 것인지’ 명확하게 간파하는 기획력이 출판 시장의 핵심 경쟁력이 될 것이다. 독자들의 관심과 선택을 받을 수 있는 매력적인 콘텐츠로 숏폼은 확실히 자리잡고 있다. MZ세대에 국한하지 않고, 책의 물성을 포기하지 않는 독자들의 니즈는 숏폼으로 채워질 수 있다. 아날로그형 신(新)문고본이나 디지털 숏폼 에디션은 동영상을 선호하는 숏폼 사용자들에게 텍스트의 새로운 접근 채널이자 지식문화 생활의 좋은 친구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