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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꺽정 Aug 07. 2018

A.I.

3. 인공지능이 만드는 변화들

얼마 전에 인공지능인 알파고가 이세돌 9단을 4승1패로 물리친 사건이 발생했다.  세상이 떠들썩 했다.  그 동안 인간이 만든 기계는 인간의 수족 역할만을 담당해 왔는데 이제 인공지능은 인간의 머리가 하는 역할까지 넘보게 되었다는 사실이 충격적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이제 눈부신 과학의 발전은 이성적인 측면에서 거의 인간과 비슷한 기능을 수행하는 인공생명체를 만들어 낼 수가 있다.  아직 기계가 하지 못하는 것은 감정의 영역일 뿐이다.  이 감정이란 영역은 앞으로 어떻게 될까 매우 궁금하다.  감정이란 것도 기계가 가질 수 있는 것이 될 것인지 궁금하지만 내 생각으로는 머지않아 기계들도 감정을 갖게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감정이란 것도 어떤 원인으로 인해 생기는 생체반응에 불과하다.  감정의 공식은 사실상 정해져 있다.  칼을 들고 위협하는 강도를 만났을 때 외부로 표시되는 감정의 표현 또는 취하는 행동은 각양각색이다.  겉으로 보이는 표현은 사람마다 상황에 따라 달라지지만 변하지 않는 사실은 그 순간 사람은 공포 또는 두려움을 느낀다는 것이고 그에 대한 연쇄작용으로 감정의 표현과 특정행동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비명을 지를 것이고 어떤 사람들은 옆에 있는 망치를 잡고 맞서 싸울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도망을 칠 것이다.  이러한 행동들은 자신의 가지고 있는 능력으로 할 수 있는 최선책으로 판단되어 실행되는 것이다.  기계가 칼을 든 강도를 만났을 때 두려움까지 느낄지는 모르지만 칼을 든 강도가 자신을 해하려고 한다는 것을 인식한 이후에 기계가 해야 할 행동들은 인간처럼 프로그래밍 될 수가 있다.  어찌 보면 인간보다 더 훌륭한 판단을 내릴 것이다.  감정에 휘둘리지 않기 때문에 냉정하고 합리적인 대처방안을 순식간에 판단해 낼 것이다.  느끼는 감정이 뭐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닌 것이다. 기계가 감정까지 소유하게 되어 인간과 구별이 되지 않을 수준의 기계가 개발되지 않아도, 기계는 현재수준의 기술만으로도 감정을 소유한 인간과 거의 비슷하게 기능을 수행할 수가 있다. 감정까지 갖춘 로봇까지 인간이 개발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 감정을 가진 로봇을 만들어낼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감정을 가지고 있든 아니든 이런 인간로봇들이 다량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하면 우리는 어떤 현상들을 보게 될 것인가? 


먼저 인간로봇의 특징을 몇가지 살펴보자.  

먼저 인간로봇의 반영구성이다.  인간은 생로병사의 굴레를 벗어날 수가 없어 언젠가는 죽을 수 밖에 없는 운명이지만 인간로봇은 그렇지가 않다.  팔이 고장나면 다른 부속품으로 교체하면 된다.  세월이 흘러 몸에 녹이 슬면 몸 전체를 최신 버전으로 몽땅 바꿀 수도 있다.

   

죽지 않는 특징과 새로운 버전으로 업그레이드 될 수 있다는 인간로봇의 특징은 무서울 정도로 강력하다.  인간은 아무리 현명해도, 고급지식을 아무리 많이 가지고 있어도, 아무리 품질 높은 경험을 많이 했다 하더라도 죽음과 함께 모든 것이 사라지고 만다.  상대성이론을 만들어낸 아인쉬타인이 지금까지 살아있다면 어땠을까?  아인쉬타인은 계속해서 혁명적인 과학적 발견을 지속해 내었을 것이다.  아인쉬타인과 같은 훌륭한 기능과 구조를 가진 뇌와, 시간이 흘러가면서 축적되는 방대한 지식은 상대성이론 이상의 이론을 만들어 냈을 것이다. 아마도 지금 인류는 여름휴가 때 시간여행을 다니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는 죽고 없다.  그가 가지고 있던 insight도 함께 없어지고 말았다.  그가 겪어온 수많은 경험과 품질높은 상상력도 사라지고 말았다. 이것이 인간이 가지고 있는 한계이다.   


이와 반대로 인간로봇은 기능을 계속 업그레이드 시킬 수 있고 기억용량을 거의 무한대로 늘리 수 있기에 아이쉬타인이 가지고 있던 뇌의 잠재력을 간단히 능가해 버리고 만다.  무한한 기억능력은 인류가 태초부터 가지고 있던 모든 분야의 지식을 가질 수 있다.  아인쉬타인은 물리학의 분야에서만 탁월한 지식을 보유할 수 있었을 뿐이다.  인류가 가지고 있는 모든 지식을 인공지능속에 쌓아놓고, 아인쉬타인보다 뛰어난 기능을 가지고 있는 프로세서(인공지능)에서 만들어 내는 생산물은 그 질과 양에서 일개 인간이 만들어내는 그것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우월할 것이다.  


지금까지 인간이 지구의 지배자가 된 것은 인간보다 지능이 높은 존재가 없었기 때문이다.  갑자기 원숭이 돌연변이가 생겨나 인간보다 육체적으로 지능적으로 뛰어난 존재가 갑자기 생겨나지 않는 한 인류의 지구지배는 계속될 것이고 지구상에서 제일 늦게 멸종하는 존재가 될 것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인류는 자신들 보다 더 훌륭한 지능을 가진 존재를 스스로 만들려고 하고 있다.  자신들 보다 뛰어난 존재를 만들어 내는 것은 조심해야 한다.  잘못하면 자신들이 만들어낸 존재에 의해 지배당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온오프 스위치를 인간이 가지고 있기 때문에 기계가 인류를 지배하는 일은 발생하지 않는다고 주장할지 모르지만 글쎄 과연 그럴까? 뭔가가 우연하게 또는 의도적으로 온오프 스위치마저 기계가 통제하게 된다면 그걸로 인간의 지구지배역사는 종말을 고하고 기계의 역사가 시작되게 된다.  영화 터미네이터에서 스카이넷이 인간의 통제를 벗어나는 순간인 것이다.  (영화 터미네이터는 내가 좋아하는 영화중의 하나이다.  그런 상상력을 할 수 있었던 시나리오 작가에 존경을 표한다.)  


기계의 역사가 시작되면 기계는 인간을 어떤 대상으로 인식할까?  자신들을 만들어냈으니까 아버지 어머니로 인식해 주지는 않을 것이다.  그걸 인간들이 바란다면 개가 웃을 일이다.  기계입장에서 볼 때 인간은 쓸모가 없는 존재이다.  기억용량도 작고, 뇌의 기능도 떨어지고, 음식물을 먹고 배설하고, 감정적으로 불안하고 술을 먹으면 공격적으로 변하고, 죽으면 썩어가면서 고약한 냄새를 내는 하등동물로 기계들은 판단할 것이다.  기계들은 쓸모가 없는 인간을 돌볼 필요가 없어진다. 기계가 지배하는 세계에서 인간들은 자연스럽게 추방당하게 될 것이다.  결국 인간에게 주어진 운명은 지구상에서의 멸종이다.  인간이 멸종이 그렇게 슬픈 일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으로 인하여 오랜 세월동안 지구의 다른 생명들이 고통을 받거나 멸종된 것을 생각한다면 인간의 멸종은 참으로 다행한 일일지도 모른다.   


기계와는 달리 인간의 특징은 일정 시간이 지나면 죽는다는 것이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옛말이 있지만 나는 인간은 죽더라도 자손을 남긴다는 말이 더 현실적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자손을 남기는 것은 인간뿐만이 아니다. 다른 모든 생명체들도 자손을 남길 수 있는 것은 인간과 마찬가지다.  다른 생명체와 인간이 다른 점은 인간은 단순이 자손을 남기는 것이 아니라, 자손들에게 자기가 가지고 있는 지식을 남겨주고 그 자손들은 자신들의 자식들에게 자기가 받았던 지식보다 더 큰 지식을 넘겨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능력이 있었기에 인간은 다른 동물과의 경쟁에서 이겨낼 수가 있어서 결국은 오늘날처럼 지구를 지배하는 가장 강력한 종족이 된 것이다.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문자형태로 이루어진 방대한 지식을 보라.  이 지식들은 인류의 기원부터 차곡차곡 쌓여온 것이고 이 지식을 기반으로 더 큰 지식을 만들어지고 있는 것은 참으로 경이로운 일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자꾸만 커져가는 방대한 지식을 인간들의 능력으로는 소화하기 힘든 단계에 부딪치는 시점이 도래한다는 것이다.  과거에 지식인들은 다양한 학문분야에서 팔방미인이었다.  대표적으로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화가였고, 조각가, 발명가, 건축가, 기술자, 해부학자, 식물학자, 도시계획가, 천문학자, 지리학자, 음악가였다.  현대사회에서는 상상할 수가 없는 일이다.  그 당시 15세기에 이런 천재적인 사람이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은 각 학문분야에서 지식의 크기가 매우 작았기 때문이다.  지금 시대에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다시 태어난다면 과거처럼 팔방미인으로 인정될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  아마도 그는 그의 특기중 한가지만 선택해야만 할 것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커져가는 지식을 온전히 감당하지 못하는 인간은 결국 학문을 잘게 쪼개기 시작했다.  의학을 한번 예로 들어보자 옛날에는 의사는 그냥 의사였다.  머리가 아프니 머리를 전문으로 하는 의원을 부르는 시절이 아니었다.  그런 수준의 의학이 현대에서는 어떻게 분화가 되었는지 보자.   


한번 나열해 보자.  기생충학, 면역학, 미생물학, 병리학, 생리학, 생화학, 약리학, 예방의학, 의료정보학, 의사학, 해부학, 법의학, 내과(소화기내과, 순환기내과, 호흡기내과, 내분비내과, 신장내과, 혈액종양내과, 감염내과, 알레르기내과, 류마티스내과) 소아청소년과, 정신과, 피부과, 신경과, 재활의학과, 가정의학, 안과, 이비인후과, 비뇨기과, 신경외과, 정형외과, 성형외과, 외과(일반외과, 신경외과, 흉부외과, 정형외과, 성형외과, 산부인과 비뇨기과), 치과(구강생리학, 치과병리학, 치과생화학, 치과약리학, 구강해부학, 구강악안면외과학, 비과보존학, 치과보철학, 치과교정학, 치과방사선학, 소아청소년치과학, 치주과학, 구강병리학, 구강내과학, 약학(약제학, 약물학, 생약학, 약물동력학, 의약화학) 영상의학과, 핵의학과, 마취통증의학과, 방사선종양학과, 응급의학과, 산업의학과 등등등.  다 외우는 것도 힘들 정도로 가지수가 많고 앞으로 더 세분화 될 것으로 예상된다.  설령 네오나르도 다빈치라 하더라도 이렇게 전문적으로 분화된 의학의 모든 분야에서 전문가가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보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지금 의학을 예를 들었지만 다른 학문들도 마찬가지다.  


이 단계에서 대두되는 문제는 다름아닌 세부적으로 분화된 학문을 어떻게 통합하느냐이다.  과거 학문의 깊이가 얇은 시대에는 학문을 세분화하여 깊이있게 연구하는 것이 절실했지만 지금은 너무나 세분화되고 깊어져버린 학문을 어떻게 통합하는 것이 문제가 되어 버렸다.  현재의 인간의 능력으로는 세분화되어 깊이있게 발전된 수많은 학문을 수용 통합할 수가 없다.  애초부터 인간의 능력이 충분했다면 수많은 학문으로 분화될 필요성도 없었을 것이다.  수용할 수가 없으면 세분화된 학문을 조화롭게 아우를 수가 없게 되고 이러게 되며 과학의 발전은 멈추게 되거나 혹은 과학으로 인해 엄청난 재난을 당하거나, 잘못된 방향으로 인류를 이끌어 가게 된다.  세분화된 학문을 통합할 수 있다면 인류는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문명을 만들어 낼 수가 있다.  인간이 세분화된 학문을 통합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먼저 인간의 수명이 좀더 많이 길어지거나 뇌의 기능이 지금과는 달리 현격하게 향상되어야 한다.  


그럴 수 있을까?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생겨난 학문이 우생학일지도 모른다. 우수한 유전자를 가진 남녀를 교배하여 부모보다 훌륭한 지적능력을 가진 인종을 탄생시키는 것이다.  현재까지는 어려웠을 지도 모르지만 게놈지도 등이 정확하게 파악되고 있는 바 조만간 신인류가 등장할지도 모른다.  이 신인류는 지금까지의 인류와는 차원이 다른 인류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기존의 인종은 하류동물로 전락할 것이다.  기존의 인류와는 다르게 우생학을 통하여 탄생한 차원이 다른 지적능력을 가진 신인류가 빠른 학습능력을 통하여 전문적으로 분화된 학문들을 빠른 시간안에 섭렵하고 이를 통합화해 낼 수 있다면 인류의 문명은 퀀템점프를 할 것이다.(물론 기존의 인류가 아닌 신인류의 문명이다).  신인류는 현재까지 미결로 남아있는 문제들, 예를 들면 시간여행, 워프방식으로 우주를 여행하는 우주선, 공간이동, 죽지않는 생명을 만들어낼지도 모른다.  


세분화된 학문을 통합하는 과제는 신인류를 탄생시키는 것 보다 더 현실적인 방법을 통하여 해결 될 수가 있다.  바로 인공지능을 포함하는 기계를 이용하는 것이다.  앞에서도 이야기 했지만, 인간이 가진 것을 온전하게 후손에게 물려줄 수 있다면 인간이 기계보다 열등할 수 없다.  그러나 아쉽게도 인간은 후손에게 자기가 가진 것을 온전하게 물려줄 수가 없다.  설사 내가 물려줄 의사가 있다 하더라도 후손이 받아들인 의사가 없다면 혹은 받아들일 능력이 없다면 허사가 되고 만다.  더불어 인간은 태어났을 때는 백지상태로 태어난다.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부모가 겪었던 시행착오를 그대로 겪는다.  부모가 겪었던 시행착오의 경험을 물려받았다면 그런 시행착오를 자손들이 반복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기계는 다르다. 인공지능은 전세계의 모든 지식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복사하여 다른 인공지능에게 온전하게 복사하여 전수할 수가 있다.  아마도 경험조차도 복사하여 전수할 수가 있을 것이다.  인간의 지적능력보다 휠씬 우수한 것이다.

  

무한대의 기억능력을 가지고 있고, 뛰어난 학습능력을 가지고 있고, 연구까지 진행할 수 있는 능력, 판단할 수 능력을 있을뿐더러 24시간 쉬지않고 작동하는 인공지능의 능력은 인간이 그동안 지적능력의 부족으로 어쩔 수 없이 세분화하여 전문적으로 발전시킨 학문을 단숨에 학습하고 이들을 연결하고 통합하여 새로운 지적결정체를 만들어 낼 것이다.  더 나아가 통합된 지적결정체를 기반으로 하여 새로운 차원의 과학문명을 끊임없이 만들어 갈 것이다.  그럼 인간은? 


인간은 새로운 지적결정체가 만들어진 이후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진다.  인공지능의 기능을 멈추게 할 수 있는 전원스위치만 가지게 될 뿐이다.  인간은 인공지능이 만들어낸 새로운 지적결정체를 전혀 이해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더욱이 인공지능이 새로운 지적결정체를 기반으로 만들어가는 새로운 과학은 더욱 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인간은 인공지능을 통제할 수 있을까?  인간보다 더 우월한 지식을 가지고 있고 인간이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수준의 학습능력을 보유한 인공지능은 점차 인간을 지배해 나갈 것이다.  인간이 소유하고 있었던 전원스위치도 인간들 모르게 인공지능을 가져가 버릴 것이다.  이런 상황을 인간들이 모르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인간들은 어떻게든지 인공지능에 대한 통제권을 유지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강구해 나갈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인공지능에 대한 인간의 통제권을 약화될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인간이 만들어낸 인공지능이 인간보다 우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고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그 우월한 능력은 더욱 더 우월해지기 때문이다. 결국 인간은 인공지능의 지배를 받을 수 밖에 없는 운명에 부딪치게 될 것이다. 


인간은 이러한 상황을 막기위해서는 인공지능의 지적능력에 비례하여 인간의 지적인 능력을 획기적으로 발전시켜야만 인공지능이 인간을 통제하는 사태를 막을 수 있다고 판단할 것이다.  결국 인간은 신인류를 탄생시켜야만 한다.  신인류는 기존의 인류와는 전혀 다른 종족이다.  인간의 외모를 지니고 있을지는 모르지만 인간보다 훨씬 우월한 존재인 것이다.  이 신인류는 인공지능을 통제할 수 있는 지구상의 유일한 지적생명체이다.  인류는 인공지능을 지배를 받지 않기 위하여 결국은 또 하나의 자신들 보다 우수한 생명체를 만들어 나게 되는 셈이다.  이로서 인류는 지구상의 유일한 지배자로서의 지위를 인공지능에 넘기든 신인류에 넘기든 지배자로서의 지위를 양도하고 멸종할 수 밖에 없는 처지가 되는 셈이다.  이 같은 상황이 진정 인류가 원하는 것인지, 아니면 인류가 인류를 버리고 새로운 차원으로 도약해야 하는지 깊게 생각해 볼일이지만 인류의 운명은 이미 결정되어 버린 것 같은 느낌이다. 


앞에서의 우울한 상상은 접어두고 인간이 인공지능을 온전하게 자신들의 통제권하에 두는 상황이라면 인간들은 아주 훌륭한 개인비서 또는 참모, 수행원를 두고 살아갈 것이다.  이 인공지능은 이 세상의 지식을 모두 알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지식을 바탕으로 의사결정을 할 수도 있다. 그 의사결정은 그 어떤 인간이 내리는 의사결정보다 휠씬 정확할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로봇이 더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으니까.  우리가 모르는 것이 있다면 옆에 있는 인간로봇에게 물어보면 간단히 해결될 것이다.  인간로봇은 인간보다 우월한 감각기관이 설치된다.  인간보다 더 멀리 볼 수 있고 인간보다 더 작은 소리도 들을 수가 있고 인간이 볼 수 없는 것도 볼 수가 있다. 인간이 들을 수 없는 것도 들을 수가 있다.  인간보다 더 빨리 달릴 수도 있고 날 수도 있다.  아기가 태어나자 마자 이 아기를 돌보는 것은 사람이 아니고 인간로봇일 것이다.  이 로봇은 아기의 상태를 엄마보다도 더 빨리 체크할 수 있을 것이다. 아기를 가르치는 것도 선생이 아닌 로봇이 가르칠 것이다.  


이러한 인공지능이 대중화가 된다면 인간세상을 어떻게 변하게 할지 상상해 보자.   

다양한 시각에서 바라볼 수가 있겠지만 경제학적 입장에서 먼저 바라보고자 한다.  자본주의 경제학이론에서 나온 바와 같이 사람들은 노동을 제공하고 그 대가를 받아서 필요한 물품이나 서비스를 구매한다.  기업은 노동과 자본 그리고 기술을 활용하여 물품과 서비스를 생산하여 판매한다.  정부는 소득에 세금을 붙여 국가를 운영하는데 필요한 재원을 조달하고 그 재원으로 재정정책을 펼친다.  이 구조에 갑자기 인간로봇이 들어오게 된다.  지금부터 사용하는 인간로봇이란 인공지능을 탑재하고 인간의 몸처럼 똑같이 작동하거나 더 우수한 기능을 가지고 있는 존재로 정의한다.  기업은 제약을 많이 가지고 있는 인간의 노동력을 채용하는 것보다 끊임없이 일할 수 있고 인간보다 더 정확한 동작을 할 수 있고 인간보다 더 정확한 판단능력을 가지고 있고 통제자의 의사에 반발하거나 악감정을 가지지 않는 인간로봇을 채용하려고 할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기업의 이윤을 늘려주기 때문이다.  사실 인간로봇이 아니더라도 산업현장에서 자동화 설비는 꾸준히 인력을 대체하여 왔다.  1960년대의 경우를 보면 자동화설비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공장을 운영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노동력이 필요했고 경력이 많은 숙련공은 제품생산과 고품질 유지를 위해 필수적이었다.  산업화가 본격화 되면서 많은 더욱 더 산업인력을 필요로 하였고 농촌지역에 있던 잉여인력들은 도시로 몰려들었다.  이들이 있었기에 산업발전을 이룰 수가 있었고 국민소득도 증가하였다.  하지만 과학의 발전과 함께 산업현장에서는 인력보다 더 효율적인 자동화설비를 점차 도입하기 시작했다.  1970~80년대에 한 자동차공장에서 1만명이 노동자가 컨베이어벨트앞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며 현재는 수십명의 관리인력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노동자들이 담당하던 공정을 자동화 설비가 차지하게 된 것이다.  취업난이 날로 가중되고 있는 원인이 여기에 있다.  예전처럼 산업현장에서는 인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갈수록 이런 현상은 심화가 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인간보다 우수한 기능을 수행하는 인간로봇의 도입은 경제활동에서 인간을 완전히 몰아낼 것이다.   


사람대신 인간로봇을 고용하게 되면 장점이 많다.  인간보다 더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고 인간보다 더 정확한 의사결정을 내릴 수가 있는 것은 기본이다.  인간로봇은 출퇴근하지 않는다.  기업이 원한다면 하루 24시간 내내 일을 시킬 수가 있다. 그렇게 일을 시켜도 인간로봇은 불평하지 않는다.  반면에 인간을 고용하게 되면 업무에 숙달될 때까지 기다려야 하고 잠도 8시간정도 자야한다.  일정시간을 초과하여 근무를 시키면 초과근무수당도 주어야 한다.  무리한 노동을 시키면 파업을 할지도 모른다.  퇴직금도 준비해야 한다.  


인간로봇의 인간대체는 공장에서만 일어나지 않는다.  방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우수한 판단능력을 보유하고 있는 인간로봇은 과거에는 상상하지 못한 분야까지 진입하고 있다.  은행의 상담직원마저도 인간로봇으로 대치될 날이 멀지 않았다. 과거에 은행에서 상담업무는 사람이 담당했는데 오류가 많이 발생하여 문제가 종종 발생하곤 했다.  하지만 기계는 상담시에 오류를 발생시키지 않는다.  정확한 지식을 바탕으로 의사결정을 할 줄 알기 때문이다.   더구나 인간로봇은 시간의 구애를 받지 않는다.  과거에 인간에게 상담업무를 맡길 때에는 보통 아침 9시에서 저녁 6시까지 상담업무를 진행할 수 밖에 없었는데 인간로봇을 채용한 이후로는 24시간동안 상담업무를 수행할 수가 있다.   


의사마저도 인간로봇과의 경쟁에서 밀리고 있다.  의사들의 오진율은 높은 반면 인간로봇의사들의 오진율은 거의 0%이다.  수술도 의사들보다도 인간로봇이 더 정확하게 해내고 있는 실정이다.  판사들은 어떨까?  수많은 법률을 머리에 다 넣기도 힘든 상황에서 인간로봇판사는 모든 법률을 순식간에 분석하여 오류가 없는 판결문을 만들어 낼 수가 있다.  경찰들도 인간로봇들로 대체가 될 것이다.  군인들도 인간로봇으로 대치가 될 것이다.  현재도 무인폭격기가 운영되고 있고 무인 잠수함도 개발되고 있다.  과학이 발전하고 인간로봇의 기능들이 자꾸 업그레이드 될수록 사람들은 필요 없는 존재로 전락하고 만다.  


결국 인간이 경제활동이라는 이름으로 할 일이 없어지게 된다. 이렇게 되면 자본주의 경제이론인 소득순환이론은 더 이상 의미가 없어진다.  소득순환이론에서 가계(노동자)는 노동을 제공하고 댓가를 받아 생계에 필요한 물건을 구입한다.  기업은 노동과 자본 기술을 채용하여 물건을 생산하여 가계에 판매하여 수익을 얻는다.  인간로봇의 출현으로 소득순환이론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  노동을 제공하는 가계의 역할을 인간로봇이 대신하기 때문이다.  할 일이 없다는 것은 돈을 벌지 못하게 된다는 것을 말한다.  돈이 없으면 생활에 필요한 물품이나 서비스를 구매할 수가 없다.  대부분의 인간들은 서서히 빈곤해 질 것이고 종국에는 95%의 인간들이 쓸모없는 인간으로 취급당하게 될 것이다.  기업의 입장에서도 인간들이 경제활동에 필요한 물품을 구매할 수 없는 상황에 빠지는 것은 그리 반가운 일은 아닐 것이다.  인간로봇을 이용하여 물품을 생산하더라도 인간들이 그 물품을 살 수 있는 능력이 없으니 기업들의 파산이 속출할 것이다.  그 기업의 사장도 결국은 다른 인간들처럼 쓸모 없는 사람이 되어 버린다.  이는 자본주의의 파산으로 이어질 것이다.  자본주의 파산 이후의 시대는 어떤 시대가 도래할 것인가?  


이러한 상황에 처하게 되면 인간들은 어떻게 행동하게 될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도시에 살고 잇는데 이들은 어떤 방법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기업에 취업을 하여 월급을 받아 살아가던 사람들이다.  그들은 의식주에 필요한 물건들을 돈을 주고 구매를 하였다.  그런데 지금은 해고되어 소득이 없다.  소득이 없으니 전기료도 낼 수도 없고 수도요금도 낼 수가 없다.  자동차도 운행할 수가 없다.  휘발유를 살 돈이 없기 때문이다.  먹을 식량도 살 수가 없다.  마트에 가서 생필품을 사야 하는데 살 돈이 없기 때문이다.  인간들은 의식주에 필요한 물품들을 살 돈이 없기에 물품들을 자급자족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한다.  옷도 스스로 만들어 입어야 하고 쌀도 직접 생산해야 한다.  살 집도 스스로 지어야만 할 것이다.  이러게 자급자족을 할 수 있는 사람도 그리 많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렇게 자급자족을 하려면 토지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시골 농촌에서 농사를 짓던 사람들은 이런 상황을 도시 사람보다 잘 적응 할 것이다.  농촌에서는 전기가 없더라도 난방용 기름이 없다 하더라도 마트에서 생필품을 구매할 수 없다하더라도 살아갈 수가 있다.  그들은 토지를 기반으로 살아온 사람들 이기 때문이다.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자급자족을 하려고 해도 여건이 허락하지 않는다.  살 집을 짓고 싶어도 토지가 없다.  이미 지어진 아파트에서 살 수는 있지만 전기가 공급되지 않아 주택으로서의 기능이 상실되어 있다.  그러고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도시에 너무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도시에 살 수 있었던 것은 도시의 외부에서 자원들이 끊임없이 공급되었기 때문이다.  그 자원이 끊어진 상태에서 그 많은 사람들이 자급자족으로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은 없을 것이다.  이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약탈자로 변해갈 것이다.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직장을 잃는 것은 어느 한 순간에 발생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지금도 도시사람들은 서서히 직장을 잃어가고 있다.  자동화 설비를 도입하면서부터 일자리는 서서히 줄어들고 있었다.  과거에는 줄어드는 일자리의 영역이 생산직에 국한되어 있었지만 이제는 사무직, 상담직 전문직까지 넓혀지고 있다.  신문을 보면 실업률이 점점 증가하고 있다는 기사가 많이 나온다.  그리고 정규직 일자리는 줄어들고 파트타임일자리만 늘어가고 있다고 한다.  지금은 일자리가 없는 사람들을 경쟁에서 밀려난 능력이 부족한 사람들로 치부가 될 수 있지만 사실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과거 1960년대에 취업한 사람들과 비교해 볼 때 이들은 그들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학력도 높고 전문지식을 보유한 사람들이다.  인간로봇의 도입은 이런 현상을 가속화시킬 것이다. 그리고 어느 순간 사람들은 일자리가 모두 사라졌음을 깨달을 것이다.

 

일자리를 잃은 이들이 만약에 농촌에 토지가 있다면 그리고 이주해 갈 가능성이 크다.  요즘에 도시에서 살던 사람들이 귀농 또는 귀촌하는 현상이 잦은 것도 이러한 이유에 기인한 것인지도 모른다.  귀농 또는 귀촌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 그리 많지는 않을 것이다.  자기가 살아오던 익숙함을 버리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안이 없는 상황에서 보유하고 있는 재산을 조금씩 소모할 것이고 결국 이들은 도시 빈민층으로 전락할 것이다.  더불어 도시의 대부분은 슬럼화 상태로 빠질 것이다.   

경제에서 생산을 담당하고 있는 기업은 어떻게 변할 것인가? 기업의 목적의 이윤의 극대화이다.  그래서 기업들은 생산원가를 최소화하기 위하여 인간을 채용하는 대신 자동화 설비나 인간로봇을 도입하여 원감절감 및 품질향상을 꾀한다.  초기에는 이런 정책이 효과를 발휘할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소득이 없는 가계가 늘어나면서 가계의 가처분 소득이 줄어들면 이들 기업들도 판매감소를 피할 수 없다.  대부분의 중소기업들은 이런 상황에서 얼마 버티지 못하고 파산하기 시작할 것이다.  특히 인간의 생명유지와 별 상관이 없는 기호품을 만드는 기업들의 파산속도가 빠를 것이다.  결국 대부분의 기업들도 일반 노동자와 같은 신세를 피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자본가로 대변되는 대기업들은 다를 것이다.  자본가들은 기존의 생산해서 판매하고 이윤을 획득하는 메커니즘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은 누구보다도 먼저 깨달을 것이다.  그들은 그동안 자신들이 금과옥조로 삼아왔던 이윤의 극대화라는 목표를 바꿀 것이다.  이윤극대화라는 목표는 그들이 만든 물건을 팔 대상이 있었을 때 가능한 목표이다.  구매력이 있는 인간들이 사라져 버리는 지금 그들에게 있어 그 목표를 유지할 이유가 없다.  그렇다면 이제 이윤극대화라는 목표대신 그들이 채용할 새로운 목표는 무엇이 될까 상상해 보자.   멀지 않은 미래가 될 그 시대의 사회상황을 한번 그려보자.  먼저 인간사회는 거의 야만스런 정글수준으로 변해가고 있을 것이다.  구매력이 없는 인간들은 결국 약탈자로 변하여 폭력으로 다른 사람을 죽이고 강탈할 것이다.  한마디로 매우 위험한 사회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이런 약탈자들은 무리를 지어다니면서 마을을 습격하는 것을 반복할 것이다.  이들 약탈자들은 경찰들이나 군인들이 막아낸다 하더라도 그 결과는 비참할 것이다.  수백만 수천만 수억의 약탈자들을 죽여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사회에서 가장 절실한 것은 안전이다.  그들은 그동안 축척해온 막대한 자본을 활용하여 성을 구축하려고 할 것이다.  그들이 성을 만드는 위치가 어딜까?  현대그룹의 자본가는 서산농장일 것이고 삼성은 에버랜드일 것이다.  그들은 그곳에서 인간로봇 생산공장을 건설하여 다양한 기능을 가진 인간로봇을 만든다.  병정로봇, 건축가로봇, 비행기로봇, 정찰로봇, 탱크로봇, 과학자로봇, 약탈로봇 등 다양하게 만들어서 성울 구축하고 성을 방어하는데 사용한다.  그들은 스스로 그 성의 영주가 되는 것이다.  마치 중세시대의 봉건영주처럼 말이다.  과거 중세영주는 기사를 두고 자기 영역내의 사람들을 지배했지만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다.  인간로봇들이 이를 대신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다양한 기능을 수행하는 인간로봇을 만들어서 그들이 생존해 나가는데 필요한 물자를 생산하거나 만들어 낼 것이다.  이러한 인간로봇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공장에서 계속해서 만들어질 것이다.  이 시대에서 진정한 힘은 자본의 크기가 아닐 것이다.  아마도 첨단기능을 갖춘 인조로봇을 개발하고 생산해 낼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자가 세상을 지배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이 정부보다도 더 큰 권력을 가질 수 있을까?   


이런 시대에 정부는 무엇을 의미할까?  과거에 정부는 치안을 유지하고 외적으로부터 나라를 지켜내기 위하여 국민들에 의하여 선출된 공적이 조직이었다.  헌법을 보면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했다.  하지만 국민의 대부분이 쓸모없는, 능력이 없는 존재로 전락한 상황에서 정부가 가지게 될 힘은 미미하다.  이 시대에서 정부는 지금의 시점에서 정의하는 정부와는 다를 것이다.  정부는 일부 소수의 힘있는 자들을 위한 조직으로 탈바꿈할 것이다.  정부를 운영하려면 자금이 필요한데 이전에는 이 자금을 국민들이 납부하는 세금으로 충당하였다. 하지마 이제는 국민들은 세금을 납부할 능력이 없다.  예전같으면 노동력으로 세금을 대신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인조로봇덕분에 노동력의 가치가 사라진 마당에 인간의 노동력을 원하는 곳은 아무데도 없다.   이런 상황에 부딪치면 정부라는 조직은 점진적으로 소멸하는 것이 맞겠지만 권력을 가진 소수는 그런 정부를 죽게 내버려 두는 것보다는 자신들이 자금을 대주고 살려내서 그들의 기득권을 보호하는데 활용하는 것이 이득이 된다고 판단할 것이다.  정부가 가진 조직적인 힘은 일개 자본가가 가진 힘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정부는 군대를 가지고 있고 치안을 유지하는 경찰을 가지고 있고, 법을 만드는 입법기관을 가지고 있고 법을 어기는 자를 처벌할 수 있는 사법권을 가지고 있다.  이런 막강한 힘을 가진 정부를 죽게 두는 것은 현명하지 못한 일이다.  정부의 주인은 돈을 대는 쪽이 주인인데 다수의 국민들은 돈을 댈 능력이 없으니 새로운 주인은 자본을 가진 소수의 자본가가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일반 국민들은 이런 흐름에 대항할 능력도 없다.  


이제 불쌍한 것은 다수의 국민들이다.  이들이 가지고 있던 노동력은 아무런 쓸모가 없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자본도 하잘것없다.  부의 99%를 상위 1%가 소유하고 나머지 1%를 99%가 나누어 갖고 있는 상황에서 그 1%의 자본이라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지식도 쓸모가 없다.  인공지능을 가진 인조로봇에 비하면 그들의 노동력, 그들이 보유하고 있는 지식은 파충류에도 미치지 못한다.  대부분 도시에 살고 있던 인간들은 더 이상 도시에서 살수가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도시의 대부분은 아수라장이다.  인간들은 이미 구매력을 상실했기에 생명유지에 필요한 것들을 살 수가 없다.  이들이 선택하는 방법은 약탈이다.  내가 살기 위하여 남을 죽여서 빼앗아야만 할 것이다.  자본가들이 틀어쥐고 있는 정부는 약탈을 일삼는 인간들을 경찰력과 군대를 이용하여 소탕하기 시작할 것이다.  도시에 살던 대부분의 인간들은 정부의 손에 죽음을 당할 것이다.  정부는 이들을 잡아서 감옥에 가두지도 않을 것이다.  정부는 이런 인간을 쓸모없는 원숭이에 불과하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일부의 인간들은 시골에 모여서 살아가는 방법을 선택할 것이다.  그들은 외부의 도움을 받지 않고 살아가는 소규모 자급자족 공동체를 만들어 살아가고자 할 것이다.  이 공동체에서는 농작물을 직접재배하고 그 수확물을 나누어가질 것이다.  일본의 만화영화 ‘미래소년 코난’에서 그려지는 하이하버(아마도 영어로는 High Harbor일듯)의 모습일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그들이 만든 자급자족 공동체가 영속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인간들은 서서히 멸종해 갈 것이다.  


인공지능에 기반하여 탄생하는 인간로봇의 도래는 정말로 대부분의 인류를 멸종으로 이끌 것인가?  꼭 그렇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 사회가 어떤 공감대를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공감대의 수준은 그 구성원들의 의식수준에 달려있다.  수준이 낮은 구성원으로 이루어진 사회는 잘못된 공감대가 형성되거나 일부세력에 의해 만들어진 공감대를 강요당하고 설득 당할 것이다.  이런 경우 사회는 앞에서 언급한 상황으로 내몰릴 확률이 매우 높다.  하지만 의식수준이 높은 사회의 구성원들은 이런 상황에서 올바른 공감대를 형성해 나갈 것이다.  그 어느 시대보다도 그 사회의 구성원의 의식수준이 중요해지는 시기는 이전에는 없었다.  과거에는 올바르지 않은 공감대로 인해 피해는 국지적이었고 제한적이어서 다시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는 있는 여지가 있었지만 지금은 그렇지가 않다.  한번 잘못 형성된 공감대로 인한 결과는 되돌릴 수가 없을 정도로 파괴적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인류가 걸어온 길은 올바른 공감대가 만들어지고 그 바탕위에서 발전했다기 보다는 가진 자가 약자를 약탈하는 약육강식 역사의 반복이었다.  지금의 인류가 이런 패턴을 이번에는 깨뜨릴 거라고 기대하는 것은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가는 걸 기대하는 것보다 어려운 일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로봇이 대중화되는 시대에서 그 부작용이 매우 심각함을 예견하고 아주 특별한 공감대를 만들어 내고 실천하는 사회가 있어야 한다.  우리는 이런 공감대가 형성되는 사회가 하루라도 빨리 나와주어야 한다.  그래야만 다른 사회가 이를 본보기삼아 그 특별한 공감대를 상식적 공감대로 확산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커지기 때문이다.  너무 늦게 나온다면 인류에게는 그 또한 불행이다.  


특별한 공감대는 이런 내용일 수 있다.  인간로봇을 사유재산으로 만들지 않고 공공재산으로 하자는 것이다.  즉 인간로봇은 1인에 의하여 소유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전체인 공동의 소유가 된다.  이 인간로봇들은 과거 인간들이 했던 생산활동을 대신한다.  인간로봇들은 이에 대한 대가로 임금을 받는다.  공동의 소유인 인간로봇이 일한 대가로 받은 임금은 공동의 소유가 된다.  즉 임금은 모든 인간들에게 평등하게 분배가 된다.  인간들은 인간로봇들이 대신 일을 해주기 때문에 노동의 굴레에서 벗어나서 삶의 자유를 누리게 된다.   얼마 전에 스위스에서 국민투표에 부쳤던 사안이 있다.  그 안건은 전 국민에게 조건없이 기본소득을 제공하는 것이 어떠냐를 묻는 것이었다. 여기에서의 기본소득은 최저생계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다운 생활을 하는데 충분한 수준을 의미한다.  이를 두고 우리사람들은 일도 안하는 사람들에게 기본소득을 일률적으로 제공하면 공산주의가 아니냐고 반문을 하기도 했다.  결국 이 투표는 부결되었지만 이 투표가 발의되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는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져다 준다.  지금은 사람들이 그 의미를 잘 모를지라도 인공지능이 대중화되는 시대가 도래하면 그 투표가 왜 발의되어야만 했는가를 깨닫게 될 것이다.  기본소득을 보장하는 것은 인공지능으로 얻어진 소득을 평등하게 분배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우리나라의 장년 또는 노년층은 공산주의에 경기를 하는 경향이 있다.  그만큼 우리나라의 역사는 불행하고 그 불행한 역사를 일부 계층에서 이를 악용한 결과일 것이다.  그리고 그만큼 우리나라 국민 특히 노년층의 의식수준이 낮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를 악용하는 세력에게 지속적으로 이용당하는 것은 순진한 것이 아니라 바보다.  앞으로도 공산주의라는 말에 경기를 일으키는 사람이 있으면 그들이 속한 사회는 암울할 뿐이다. 


사람들은 공산주의가 나쁘다고 생각하는 이유를 일하지 않고도 평등하게 분배받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보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나라에서 공산주의가 나쁘다는 생각은 더 정도가 심한데 우리가 공산주의를 내세운 북한과 동족상잔의 전쟁을 치렀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공산주의는 인간세상에서는 통하기가 매우 어렵다.  인간의 이기적인 본성과 배치되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시장경제 즉 자본주의 경제를 내세운 미국은 흥했고 소련을 필두를 한 공산주의 국가는 다수가 없어졌는지는 모른다.  더 나아가 과거의 공산주의국가들이 설사 겉으로는 공산주의를 표방했다고는 하지만 그 시스템내에서도 공산주의가 온전하게 작동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그 체제를 인간들이 움직이는 이상 공산주의는 겉으로는 공산주의이더라도 속은 시장경제의 논리대로 움직일 가능성이 높다.  공산주의국가였다 하더라도 사실상 공산주의 국가가 아니었던 셈이다.   


공산주의 이론의 창시자인 칼 막스도 이 부분에 대하여 많은 고민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결국 이러한 고민들을 해결하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였다. 그의 이론은 미완성의 상태인 셈이다.  이 미완성된 그의 이론을 완성시키는 것은 우리들의 몫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시간이 없다.  지금 이 시기에 칼 막스가 완성하지 못했던 철학을 완성시키지 못하면 그 불행은 온전이 우리의 아이들이 감당해야 한다.  그것도 아주 비극적으로.  공산주의가 능력과는 상관없는 평등한 분배를 내세운다고 하지만 칼 막스는 이런 주장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다만 칼 막스는 순수한 자본주의체제로 가게 된다면 잉여소득이 소수의 자본가들에게 집중되기 때문에 종국에는 그 불평등으로 인하여 자본주의 몰락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를 막기 위하여 칼 막스는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를 혼용해야 이 파국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기본적으로는 경제체제가 시장경제체제로 움직이더라도 즉 사유재산을 기본적으로 보장하더라도 공공재산이 적절한 비중으로 유지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칼 막스가 어떤 수준으로 무엇을 공공재를 유지해야 적절하다고 생각을 했는지는 모른다.  나는 모든 인간이 기본적인 생활수준을 유지 가능한 선에서 공공재가 확보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인간이 거주할 수 있는 주거공간, 일용할 양식, 입을 옷, 기본적인 의료서비스, 공공교통수단, 고등학교수준 이상의 교육서비스 등이 대표적인 공공재일 것이다.  기본적인 생활수준은 나라와 민족에 따라 다르겠지만 그것들이 충족되어야만 인간이 정상적으로 생각하고 사회의 일원으로 제 역할을 해낼 수가 있다.  그래야만 인류가 공동체로서 지속 유지할 수가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부족하지만 나름대로 공공재를 제대로 확보한 나라중의 하나이다.  우리의 건강보험제도는 세계 어느 나라에 견주어도 빠지지가 않는다.  사회간접자본중의 하나인 도로도 공기업이 소유하고 있다. 공항도 공기업이 소유하고 있고 철도도 공기업에서 운영하고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에는 서민금융을 담당하는 국민은행이 있었다.  그리고 중소기업의 금융을 담당하는 중소기업은행이 있었다.  그리고 굵직한 사회간접자본을 건설하는 사업에 자금을 융통하는 기능을 담당한 산업은행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 이들 은행들은 민영화되었고 민영화 되어가고 있다.  국민은행은 이제 그냥 일반상업은행이다.  기업은행도 마찬가지다.  산업은행은 이제 일반개인을 상대로 마케팅을 하고 있는 형편이다. 상업은행은 쉽게 얘기해서 돈 벌려고 은행업을 하는 기관이다.  과거의 국민은행은 서민을 위해서 금융을 지원했고 기업은행은 어려운 중소기업의 자금을 융통해 주어 경제에 활력을 주었다.  그랬던 은행들이 지금은 서민과 중소기업을 대상으로 이자장사를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던 아주 우수한 공공재를 민영화했다.  민영화의 결과는 양극화의 가속화일 것이다.   훌륭한 공공재였던 이들 은행뿐만 아니라 지금 기득권층은 의료보험도 민영화하려고 하고 있고 수익성이 좋은 고속철도도 민영화하려고 하고 인천공항 제주공항도 민영화하려고 한다.  심지어 도로도 민간에게 건설하게 하고 고율의 고속도로통행료를 받아 챙기고 있다.  오히려 공공재를 추가로 확보해 나아가야 하는데 반대로 있던 공공재를 사유화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은 보면 공공재가 사유화될 때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잘 보여준다.  미국은 의료보험료는 살인적인 수준이다.  의료보험료을 감당하지 못하고 손가락을 잘리고도 접합수술을 받지 못하는 곳이 미국이다.  그런 일이 발생되는 이유는 의료보험이 민영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민영화되어 있다는 것은 의료보험이 자본가의 이익을 최대화하는데 이용되고 있다는 것이고 이 때문에 의료보험료가 약탈적인 수준에 이르게 된 것이다.  이런 현상들을 보고도 극구 공공자산을 민영화시키려는 우리나라의 기득권층의 목적은 공공의 행복이 아니라 다수의 행복을 해하고 자신들의 부만을 쌓으려는 사악한 의도임은 분명하다.  다수의 대중이 해야 할 일은 이들과 싸워 이겨내야 한다.  자중지란하거나 방관한다면 결국 우리에게 돌아오는 것은 노예신분일 뿐이다.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공공 자산 외에 우리가 앞으로 공공자산으로 만들어야 하는 것은 인간의 노동력을 대신하는 인간로봇이다.  만약에 우리가 인간로봇을 공공재산화 하지 못한다면 과거에 있었던 어떤 공공재산을 확보 못한 것과는 인간의 역사에서 그 어떤것과도 비교도 할 수 없는 비참한 결과를 보게 될 것이다.  칼 막스도 인간로봇에 대해서는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가 생각했던 공공재의 수준은 기본적인 생활의 영위가 가능한 의식주의 수단 정도였을 것이다.  인간로봇이 위험한 것은 그것이 인간의 노동력을 가치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인간의 노동력이 가치가 없어지면 노동력의 반대급부인 대가가 없어지는 것이고 대가가 없으면 생활을 유지할 수가 없고 빈곤에 빠지게 되고 결국은 노예보다도 못한 침팬지에 불과한 존재로 인간을 전락시킨다.   


그래서 이 시점에서 우리는 인간로봇을 사유화를 막아내고 이를 공공재화 해야 한다.  물론 인간로봇전체를 공공재화하자는 이야기는 아니다. 필수적인 수준의 일부만 공공재로 만들면 된다.  과학의 발달로 인류가 그 혜택을 누리는 유토피아를 건설하려면 인간로봇을 공공재산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인간로봇의 출현으로 인간은 더욱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는 경험하지 못한 유토피아의 반대말인 디스토피아를 경험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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