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를 통틀어서 지구처럼 생태계를 가진 행성을 찾는 것은 쉽지않은 일이다. 우주는 광대하고 하나의 은하에 인간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많은 행성이 있기에 확률적으로 지구와 같은 생태계를 가진 행성들이 하나라도 있을 가능성은 100%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아직까지 인간이 관측하는 범위내에서 생명체가 존재할 것으로 예측되는 행성은 발견되지 않고 있고, 설사 후보 행성이 있다하더라도 너무나 먼 곳이기에 추측만 할 뿐이지 확인할 방법은 없다.
우주는 생명체가 살기에 좋은 곳이 아니다. 우주의 대부분은 생명체가 존재할 수 없는 극한의 환경을 가진 항성, 행성들로 채워져 있고 이 상태가 정상적이고 일반적이다. 어떤 행성에 생명체가 존재하는 것은 매우 특이한 현상이고 매우 이례적이다. 우리가 존재하는 지구 같은 행성은 일종의 우주의 돌연변이인 셈이다.
생명이 없는 상태가 정상적이고 안정된 상태인데 왜 지구와 같은 행성이 생겨났고 생명체가 태어나게 되었을까?
이 우주는 생명체를 굳이 필요하지 않는다. 우주의 입장에서 볼 때, 생명체가 있다고 해서 도움이 될 것도 해가 될 것도 없다. 설사 생명체가 존재하더라도 우주적인 관점에서 볼 때 그 존속기간은 찰나적인 현상이고, 그 존재가 전 우주에 영향을 미치는 수준도 그 존재만큼이나 미미하다. 인간들이 원자폭탄 수백 개 터트려서 지구를 반조각내더라도, 인간이 화성에 이주에 성공하더라도 우주적 관점에서 보면 먼지 하나가 바람에 날리는 수준에도 못미친다.
생명은 무생물이 그 근원이다. 생명이 없는 물질들이 서로 상호작용 또는 화학물리적인 작용을주고 받으면서 생겨나는 것이 생명이다. 그리고 생명이 명을 다하면 생명이었던 것은 다시 무생물 상태로 돌아간다. 지구위에서는 이러한 생명의 명멸과정, 탄생과 죽음의 끊임없는 반복, 무생물에서 생명으로 다시 무생물로의 순환과정이 지속적으로 반복되고 있다. 이러한 과정을 보면 무생물과 생물을 전혀 다른 것으로 구분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들은 서로 유기적인 관계로 움직인다. 무생물과 생물은 때마다 성질이나 모양은 달리하고 있지만 근본은 같은 것인 셈이다. 생명이 무생명의 부분집합이라고 표현해도 될 것 같다.
무생물상태에서 생명이 왜 어떻게 태어났냐는 질문에 명확한 답변을 할 수 있는 과학자는 없을 것이다. 생명이 태어난 이후의 종의 분화, 진화의 진행을 설명하는 것은 현재의 과학으로 어느 정도 설명 가능한 수준이다. 이에 큰 공헌을 한 사람들이 찰스 다윈, 리처드 도킨스 등이다. 하지만 무생물에서 어떻게 생명현상이 발생하여 단세포일지라도 살아 움직이게 되었는지 설명은 못하고 있다.
아무리 생명탄생의 최적의 환경을 갖추었다고 하더라도 그냥 무생물상태를 유지하고 있어도 아무 상관이 없을 텐데 굳이 생명현상을 일으키는 것은 매우 신기한 일이다. 더 나아가 태어난 생명은 세포분열을 하고 번식을 하기도 한다. 그렇게 태어난 생명체는 생명을 유지하기 위하여, 종족을 유지하기 위하여 생명체간에 서로 경쟁하고 잡아먹고 잡아먹힌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
생명이 생겨난 그 생명체는 그 순간부터 생명유지를 위하여 고군분투를 해야 한다. 무생명의 입장에서 보면 무생물상태에서 영원히 편하게 잠들어 있는 것을 더 선호할 것 같다. 무생명에서 생명으로 태어나면 움직일 수 있는 능력을 얻을지는 몰라도 생명을 유지하는 기간은 매우 짧을 뿐더러, 생명을 다한 다음에는 다시 무생물로 돌아와야 한다. 어짜피 다시 무생물로 회귀할 텐데 굳이 생명을 얻고 싶어할 무생물이 있을까?
생명으로 태어나면 또 하나의 숙명을 짊어져야 한다. 종속번식의 숙명이다. 내가 생명으로 태어나서 살다가 명을 다하여 죽어 사라지면 끝나는 것이 아니다. 생명은 종족번식의 본능이 있다. 자신의 후손을 만들고 그 후손이 무탈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는 모른다. 그냥 본능적으로 행하는 행위이다. 이로 인해 부모인 생물은 후손을 남기고 기르기 위하여 온갖 희생을 감수한다. 왜 그러는지 알 수가 없다. 우리의 본능에 그렇게 하라고 새겨져 있는, 생명이 가지고 있는 본성이다. 그렇게 종족번성을 해서 그 종족이 얻는 것은 무엇일까? 번성하고 그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그 종족의 최종 목표일지 모르지만 그 목표를 달성하면 그 종족에게 무엇이 좋은 것인지, 그것이 어떤 가치가 있는지는 모를 일이다.
종족 번성 및 유지에 나름 성공한 유일한 종족이 바로 인간이다. 어떤 생명체도 인간앞에서 종족번성에 성공했다고 나서지 못한다. 인간은 지구의 사실상 지배자이고 모든 생명체는 인간으로부터 자유롭지가 않다. 인간이 마음먹는다면 지구상에 있는 그 어떤 생명체도 안위를 장담할 수 없다. 그런 인간의 지배적 종족번성 이후의 다음 목표는 무엇인가? 인간은 그 다음의 위대한 목표를 가지고 있지 않다. 인간의 목표는 단지 현재 내가 가진 것을 빼앗기지 않는 것, 더 많은 것을 획득하여 더 큰 편안함을 누리는 것, 그러면서 자손을 남겨 번성하는 것뿐이다. 여전히 인간의 목표는 예나 지금이나 다름없이 주어진 환경내에서의 생존과 종족번성일 뿐이다. 생명체가 추구하고 나아갈 수 있는 최대가 여기까지 이다. 인간을 포함 모든 생명체의 능력은 종족번성까지로 제한된다. 인간이 누리고 있는 종족번성도 사실 환경이나 조건이 변화되면 순식간에 사라진다, 공룡이 그랬던 것처럼. 모든 생명체의 숙명이며 최대의 가치인 종족번성도 덧없기는 마찬가지다.
아무 생명체도 살수 없을 것 같은 뜨거운 사막에도 물이 흘러들어오면 풀들이 싹뜨는 것을 본다. 툰드라 같은 동토도 얼음이 녹으면 어디에서 생겨났는지 씨앗이 발아한다. 이런것을 보면서 우리가 무생물이라고 생각하는 것에는 생명의 씨앗이 항상 잉태되어 있고 조건이 충족되면 언제든지 움을 트는 것이 우주의 섭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왜 우주의 섭리는 조건이 충족되면 생명이 잉태되도록 설계되어 있을까? 무생물이 상태가 더 안정적이고 편안하다. 생명이 태어나면 혼란이 발생하고 균형과 불균형이 왔다 갔다 한다. 물론 그 혼란속에서 조화를 이루고 균형을 잡아가는 것이 우주의 섭리이기는 하다. 하지만 굳이 가만히 무생물의 상태로 있으면 영원한 균형이 지속되는데 생명이라는 것들이 생겨나서 고생을 자초하는지를 모르겠다. 그렇게 생명이 태어난다 해도 만약 조건이 어그러지면 무생물로 돌아가는 하는 운명인데 생명탄생이 우주에게 무슨 이익을 가져다 주는지 모르겠다.
사실 무생물도 편안한 균형을 영구적으로 이루고 있는 안정적인 상태라 할 수도 없다. 생명이 없는 물질에도 원자단위에서 전자 등의 움직임 발생하고 있다. 인간의 눈으로 볼 때는 딱딱하게 고정되어 있는 것 같지만 그 속에 움직임이 있다. 이 움직임을 생명현상의 근원이라고 인정한다면 우주는 무생물 덩어리가 아니라 하나의 한계가 없는 영원불멸의 생명체로 보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