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igh Pressure Low Stress May 26. 2020

친절에 대하여 (1)

연초에 쓴 일기

1. 노력의 환상

에드먼튼의 제일 유명한 쇼핑몰에 갔다. 북미 최대 규모인 동시에 세계에서는 다섯 번째로 큰 쇼핑몰이다. 근래 몇 년간 계속되었다던 불황에도 내부는 손님으로 붐볐다. 물론 절반 이상이 관광객일 터였지만 그래서 그들은 모두 환영을 받았다.


그곳에서 아디다스 가방을 샀다. 도복을 개어 집어넣기 딱 좋은 사이즈였고, 때마침 20% 할인을 해 5 달러를 아꼈다. 역시 나는 운이 좋아, 다시 한번 행운을 실감하며 점내를 나섰다. 그러고는 출구 바로 앞에서 노숙자와 마주쳤다.


노숙자는 그렇게 나이가 들어 보이지 않았다. 많아도 40대 중반 즈음일 그는 대뜸 내게 커피를 줄 수 없냐고 물었다. 나는 팀 홀튼을 들고 있었다. 그마저도 몇 모금을 남기지 않은 채였다. 아메리카노의 잔여분을 돈으로 환산하면 50 센트도 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선뜻 커피잔을 건넸고, 그는 고맙다는 말도 없이 사라졌다. 그에게 일행이 있었음을 깨달은 것은 멀리서 작아지는 그의 뒷모습을 보고 나서였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침울한 기분이 되었다. 일행이 보는 앞에서 1 달러도 채 되지 않는 커피를 구걸하는 삶에 대해 생각해 봤다. 한때는 인간이 현재 처한 경제적, 사회적 위치가 그의 과거를 반영한다고 굳게 믿었던 시절이 있었다. 누구나 노력한 만큼의 대가를 받는다. 그러므로 가지지 못한 자는 어떤 노력도 지불하지 않은 것이다.


한동안 나의 신앙은 유효했다. 신앙은 극단적인 믿음이 그러하듯 가치관에 반하는 이를 향한 적대로 변질됐다. 군복 차림으로 서울역에서 수없이 마주쳤던 노숙자들이 내게 술값을 구걸하는 목소리가 경멸에 불을 지폈고, 한 회사에 몸담으며 두 자식 모두 대학까지 보내신 아버지의 노고는 경전이 되었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본 세상은 인생이 처음인 스물두 살이 멋대로 재단하기엔 지나치게 복잡한 실처럼 꼬여 있었다. 절친한 친구의 가세는 한순간에 기울었고, 나보다 똑똑한 친구들은 몇 년째 연달아 낙방하고 있으며, 중학교 시절 좋아했던 은사는 갑자기 돌아가셨다. 전조 없이 닥친 그들의 불행은 누구의 책임도 아니다. 단지 불행은 어딘가에 존재했고 누군가는 그것을 집어야 했을 뿐이다.


미국의 셰일 가스 개발 이후 정유 산업은 큰 타격을 입었다. 모래에서 기름을 추출하는 알버타 주로서는 악재였다. 주도 에드먼튼의 공실률은 20%가 넘으며 정유사는 줄줄이 철수했다고 한다. 셰일 가스를 개발하려는 노력이 오일 샌드 제조자들에게 피해를 입혔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셰일 가스를 비난하거나 오일 샌드를 손가락질할 수는 없다. 모두 똑같은 노력이었다. 셰일 가스 덕분에 연비를 신경쓰지 않고 중형차를 몰 수 있게 된 사람들이 스스로를 운이 좋다고 여기고 있을 때, 누군가는 가족조차 부양하지 못하는 신세로 전락했다.


운이 좋다는 것은, 전쟁터에서 바로 옆 사람이 폭발에 휘말리는 것이었다. 행운은 그것을 가지지 못한 누군가에게는 불운이었다.


졸업 이후 바라본 세상은 그랬다. 모두 예외 없이 노력했기에 바로 앞의 한 사람조차 제치는 것이 불가능했다. 괜찮은 직장에 들어간 선배들은 본인도 설명 못하는 성공 비결을 늘어놨고, 불운한 나머지는 열심히 애쓰는 후배들의 반면교사가 되었다. 그러나 결국은 같은 게임 안의 경쟁자였다. 선배를 비웃던 후배는 머지않아 후배의 비웃음을 받는 선배로 늙었다. 그건 일 년도 걸리지 않았다.


단언하건대 나는 뭐든 스스로 해내려는 사람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경험을 찾아다니며 스스로를 알아가기 시작했고, 더듬어 낸 나의 실체가 기대보다 혐오스럽다는 것을 자각한 이후엔 실수를 거듭하며 찢어진 부분을 부지런히 기웠다. 덕분에 나는 어디서든 아주 약간은 앞서갔다. 앞지르지 못한다면 우회하는 잔꾀에도 조금은 익숙했다. 그동안 자주 듣곤 했던, 굶어 죽을 일은 없겠다던 주변의 칭찬은 나를 뿌듯하게 했다.


하지만 돌이켜보니 나는 무엇도 스스로 얻은 적이 없었다. 학자금 걱정 없이 학교를 다녔고 지인의 소개로 연애를 했으며 친구의 권유로 워홀을 와 낯선 이들의 호의 덕에 캐나다에 머무르기로 결심했다. 요긴하게 써먹은 영어조차도 어린 시절 주재원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국제학교에서 익힌 재주였다. 한편 내 성취가 아닌 몫의 비용은 누군가가 대신 치렀을 터다. 나는 빚이 한 푼도 없지만 부모님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 나는 관계를 통해 매번 유용한 것을 챙겼지만 약탈당한 누군가도 그렇게 생각할까. 내게 가능성을 알려준 사람들과는 지금 연락을 주고받지 않는다.


세상은 그런 면에선 공평하다. 거래가 무산되는 법이 없다. 누군가는 영수증을 받게 마련이다. 그 위에 적힌 항목은 서명인의 주문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러니 영수증 끝단에 서명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함부로 판단되어선 안 된다. 그날 내게 커피를 구걸한 사람은 한때 나의 평생을 아득히 넘는 업적을 이뤘을지 모른다. 내가 껍질만 맛본 슬픔보다 더 진한 눈물을 흘렸을 것이고, 내가 핸드폰을 보며 낄낄댄 횟수보다 더 많은 사람들을 미소짓게 해 줬을지도 모른다.


"Be kind, for everyone you meet is fighting a hard battle."
"모두에게 친절하라. 당신이 만나는 모든 이는 힘겨운 전투를 치르고 있다."


19세기 작가 이안 맥라렌의 첫 문장은 이후 세기에 걸쳐 플라토나 필론의 문장으로 잘못 인용되어 오곤 했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 그의 생각에 동의하며 문장을 나눴기 때문이리라.


나는 본인보다 스무 살은 어린 동양인에게 몇 모금 남지 않은 커피를 받아간 백인 남자를 알지 못한다. 그래서 친절하려 애썼다. 특별히 이타적으로 굴지는 않았다. 상대방을 알지 못했기에 그에게 친절했을 뿐이다. 그리고 친절의 이유로는 그것으로 충분하다.



2. 친절의 연습

캐나다로 떠나기 전 2년은 워홀에서 돌아온 학우들의 말에 경청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그들은 아무런 경계 없이 본인의 몫을 나눠줬고, 나는 그들이 사 주는 커피와 호의를 얻어먹으면서도 그 안에 깃든 위험을 가늠했다.


워홀러들은 대개 여정의 마지막을 여행에 할애했다. 물론 낭만적인 구석이 있었으나, 타지에서 번 돈을 모두 여행으로 탕진하고 귀국한 이야기는 퍽 두렵게 들렸다. 낯선 곳으로 떠나는 데 필요한 자금은 이미 충분했기 때문이다. 지금도 언제든 여행을 할 수 있는 마당에 워홀을 떠나 무일푼으로 돌아온다면 결국 더 비싼 값을 치른 것이리라. 일이 년의 공백은 다시 환불받을 수 없으니.


그땐 우리의 20대가 뭔가를 성취하거나 뭔가에 실패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었음을 몰랐다. 그래서 "비루하게 나이가 들어 버린" 선배들의 충고에 코웃음쳤고, 추종할 생각도 없는 업적을 들먹이며 한 번밖에 살지 못한 인생에 대해 설교하려 드는 교수들에게 무관심했다. 마찬가지로 외국에서까지 한인 사회에 귀의해 한국에서처럼 살아갔던 학우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 알량한 소속감이며 그것을 갈구하는 마음이 더없이 쩨쩨하다고 느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나의 캐나다 정착을 도와준 분들은 태반이 한인이었다. 현지인 앞에선 표현하지 못한 대화와 사상의 깊이를 한국인과는 공유할 수 있었고, 혼자서는 익힐 수 없었던 삶의 지혜 몇 가지를 그들을 모방하며 얻었다. 그들은 단지 한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아무런 조건 없이 나를 환대했다. 아마 별다른 성취를 얻어내지 못하고 그친 나의 노력이 그들의 비슷한 경험을 떠올리게 했으리라. 그들을 따라하며 나 역시 친절을 체화했다. 결국 이방인이 의지할 수 있는 존재는 타지에서도 꿋꿋이 살아가는 한 무리의 고향 사람들이었다.


나는 억지로 따듯한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다. 따스하다는 건 주변의 체온을 끌어다 쓴다는 의미다. 질투해 본 적이 기억나지 않으니 이제 와서 남의 소유물에 손을 댈 이유가 없다. 그러나 지친 누군가에게 안식처가 되어 줄 수 있는 마음가짐 정도는 하나쯤 갖고 싶다. 쉼터가 방문자를 가리지 않듯 조건 없이 환대하는 아량을 키우고 싶다.


뿌리에서 떨어져 나온 타지에 와서야 그런 생각이 든다.


너무 오래 걸렸다. 깨달음을 위해 터무니없이 비싼 값을 치렀다. 영수증을 차마 들여다보기 부끄러워 내다 버렸지만, 매번 계산대 앞에서 타인 명의의 카드를 내밀던 내 모습을 사람들은 기억할 것이다. 이기적이었던 대학생 시절은 추악한 사회 실험의 연습장이었고, 그 안에서 맺고 끊어진 관계는 진심을 부르짖던 첫 순간부터 내 글감에 지나지 않았다.


꾸준히 환대를 연습하다 보면 언젠가는, 그들에게도 환대받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