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Kaysuny May 24. 2019

독일 글쓰기 vs 한국 글쓰기

글쓰기 스타일은 어떻게 우리의 삶을 반영하는가


 언어는 생각의 도구다. 언어는 우리가 무의식에서 의식으로 넘어올 때 사용하는 프레임이다. 계란이라는 동일한 재료를 갖고 있더라도, 프라이팬을 갖고 있으면 계란 프라이를 하게 되기 마련이고, 냄비를 갖고 있으면 삶은 계란을 만들게 되기 마련이다. 이처럼, 같은 내용을 갖고도 가공하는 과정에서 어떤 도구가 사용되느냐에 따라서 결과물이 달라진다.


 한국어에는 존댓말과 반말 개념이 있다. 그래서 초면에 만난 상대와 대화할 때 무의식적으로 상하관계를 의식하고 규명하게 된다. 독일어에도 비슷한 개념이 있지만 기준은 다르다. 비즈니스 관계처럼 상대와 거리가 있는 관계나 격식이 있는 관계에서 높임말을 쓰지만, 가깝고 편한 관계에서는 나이에 관계없이 반말을 사용한다. 그래서 독일어를 사용하는 사람은 상대와의 상하관계보다는 상대와의 심리적인 거리를 의식하게 되어있다. 즉, 사용하는 언어에 따라서 상황을 인지하는 방식도 달라진다. 이렇게 언어는 사고방식의 밑바닥에 자리 잡고 있으며, 우리 일상에 스며들어있다.


 그중에서도 글쓰기는 생각을 지면에 흩트려놓고 도식화하는 행위이다. 그래서 글쓰기는 더욱 사고방식과 연관되어 있다. 하나의 글은 글쓴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보여줄 뿐 아니라, 어떤 방식으로 생각하는지도 보여준다. 특히, 자기 의견을 피력하는 논설문의 스타일이나 전개 방식을 보면, 글쓴이가 가진 관점과 생각의 구조를 알 수 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자기만의 글쓰기 스타일을 스스로 다듬어나가기 전까지는, 그 사람의 글쓰기 스타일은 교육과정을 거치면서 학습되기 마련이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글쓰기 교육에서 중점을 두는 부분도 나라마다 다르다. 이런 차이 때문에 나도 독일에서 독일어를 처음 배울 때 몇 달 동안 어려움이 많았다. 같은 논설문을 쓰더라도, 독일 글쓰기는 흐름과 전개 방식이 다른데, 꽤 자유로운 한국식 글쓰기에 비해 독일식 글쓰기는 정형화된 구조를 유지하면서 나름의 규칙을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그때는 글쓰기 스타일을 바꾸고 있는지도 모르는 채, 쓰기 영역에서 좋은 점수를 받기 위해 독일식 글쓰기 스타일에 맞추어 나갔지만, 지금 돌아보면 한국식 글쓰기와 독일식 글쓰기의 차이가 참 인상적이다. 먼저, 한국 글쓰기 스타일을 살펴보고, 독일 글쓰기 스타일과 비교해보자.




 우선, 한국 글쓰기는 자유로운 편이다. 분명히 학교에서 글쓰기 시간마다 글 한편을 쓰기가 참 어려웠던 것 같은데, 한국식 글쓰기가 자유로운 편이라고 표현하면 공감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독일식 글쓰기까지 읽고 나면 다시 생각이 바뀔 것이다. 어쩌면 너무 자유로워서 뭐라고 써야 할지 몰라 어려웠던 것 일 수도 있다. 한국 국어수업에서는 찬반 논설문을 쓸 때 서론 - 본론 - 결론을 유지하는 한, 전개 방식은 비교적 자유롭게 사용하도록 허용하고 있다.


한국 논설문의 기본적 구조

 두 번째 한국 글쓰기의 특징은 주관성이다. 무슨 말이냐 하면, ‘ (내가 보기에는) 이러이러하니까 내 주장이 옳다.’라는 식의 전개이다. 잠깐 위의 사진을 보자. 논설문의 기본적인 전개는, 서론에서 문제를 제기하고 주장을 던지는 것으로 시작한다. 본론에서는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근거를 쌓는다. 주장에 대한 논리를 펼치거나 사례를 들어 설명할 수도 있고, 권위자의 말을 인용하거나 기타 자료들을 사용하여 주장을 단단히 한다. 그리고 결론에서는 요약을 하거나 중심 생각을 한번 더 강조함으로써 글을 마무리 짓는다. 종종 본문에 반박하는 의견을 다시 반박함으로써 주장을 확고히 하는 등의 방식을 사용하는 경우도 있지만, 큰 틀에서 보면 대부분 비슷한 방식으로 전개한다.


 이런 전개 방식은 스토리텔링형 전개 방식이다. 마치 ‘내 이야기 좀 들어봐, 난 이러이러하게 생각해. 그 이유로 이러이러한 인과관계와 저런 사례를 들 수 있어. 그래서 내 주장이 옳아.’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독일 논설문의 기본적인 구조



 독일에서 가르치는 글쓰기 스타일은 정형적이다. 서론 - 본론 - 결론 구조가 있는 것 까지는 같지만, 나름의 전개 방식이 존재해서, 이 전개를 잘 따랐는지가 채점기준이 된다. 물론 모든 독일식 글쓰기가 이 기본적 전개를 따르지는 않겠지만, 정규과정을 통해 모두가 특정 구조와 전개 방식에 익숙해지도록 배워본다는 것에 의의가 있다.


 독일식 전개방식 밑바닥에는 객관성이 깔려있다. 즉, ‘양쪽의 의견은 이러이러한데, 내 판단기준으로는 (찬성 혹은 반대)이 옳다.’라는 것이다. 잠깐 위 그림을 보자. 오른편에 A, B, C 등으로 표시된 것이 큰 구조 구분인데, A가 서론, B부터 B2가 본론, C가 결론이라고 이해하면 된다. 서론(A)에서는 운동하기 전에 워밍업을 하는 느낌으로 주제에 대한 운만 띄운다. 그리고 본론 도입부(B)로 넘어가면서 주제가 되는 핵심 명제에 대해 이야기할 것 임을 밝힌다. (서론 마지막에서 밝히는 경우도 있다.)


이때 흥미로운 점은 서론과 본론에서 절대 자기의 주장을 직접적으로 밝히지 않는다. 그리고는 본론 전반부(두 개의 화살표가 점점 가까워지는 부분)에서는 자기가 실제로 주장할 내용의 반대 내용을 최대한 중립적 입장에서 전개한다. 이때 논거를 2, 3개 정도 서술하며 각각 논거에 해당하는 논리와 예시를 들어 뒷받침하는데, 반대 논거를 서술할 때는 항상 가장 설득력 있는 논거부터 먼저 서술한다. 반대 내용을 서술하고 나면, 자기가 주장할 내용을 또다시 중립적 입장에서 전개한다. 이 때는 논거 3, 4개와 이를 뒷받침하는 예시 등을 서술하는데, 이 때는 가장 약한 임팩트를 주는 논거부터 서술해서, 마지막엔 가장 강력한 논거로 마무리 짓는다. 결론(C)에 들어가면서 비로소 자신의 견해와 주장을 밝힌다. 이어서는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에 대한 가치관을 밝히거나, 가장 강력한 ”논거” 를 다시 강조하면서 자신의 주장이 반대보다 타당함을 보인다. 구성을 간략하게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서론: 주제 제시
본론1: 자기 견해에 반대되는 관점
본론2: 자기 견해에 해당하는 관점
결론: 자기의 견해 제시 및 논거의 타당성(or 우위) 강조


 이런 전개방식은 객관성을 강조한다. 말하자면, ‘A를 주장하는 의견은 이러이러하고, B를 주장하는 의견은 이러이러한데, 내 생각엔 B가 옳아. (예를 들어) B가 주장하는 가치는 인간으로서 포기할 수 없어.’같은 느낌이다. 양쪽 모두의 관점을 조명하는 동안에도 자기 견해를 꽁꽁 감추다가, 결론에 와서야 자기 견해를 밝히는 방식을 사용하는 이유도 객관성을 지키기 위해서다. 글쓴이는 독자가 글을 읽는 동안 자기 스스로 생각할 시간과 여유를 주고, 자기만의 견해를 세우길 바라는 것이다. 마지막에 자신의 견해 중 가장 임팩트 있는 논거를 배치함으로써, 자기의 견해가 좀 더 생생하게 머릿속에 남게 하는 것이 전략이라면 전략이다.



아무리 언어가 다르다고 해도 글쓰기가 다 비슷하겠지라는 선입견을 가졌던 것은 큰 실수였다. 독일식 글쓰기는 아예 다른 차원이었다. 처음에는 독일식 스타일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따라가지도 못해서 첨삭을 참 많이도 받았다.  아직 한국식 글쓰기 스타일밖에 모르던 시절, 독일어 선생님이 주신 가이드라인을 아래 괄호 안 내용처럼 잘못 이해했다.


‘서론에서 주제를 제시하고 (서론에서 내 할 말을 던지고)
 본론에서 상대 논거와 자기 논거를 열거한 다음 (상대의 논거를 하나하나 반박한 다음)
 결론에서 자기 의견을 펴세요. (결론에서 내 주장을 명확히 하라)’



 형식적으로는 독일식 글쓰기처럼 썼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여전히 한국식 글쓰기 스타일이었다. 이후 선생님들의 피드백을 통해 가이드라인을 제대로 이해하고 나서도, 독일식 글쓰기 스타일로 실제로 글을 써 내려가는 것은 또 다른 일이었다. 독일식 글쓰기 스타일로 넘어가면서 크게 두 가지가 어려웠다.


 첫째로, 내가 지지하지도 않는 반대편 논거를 쓰는데 지면의 30%가량 할애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이게 생각보다 어려운 이유는, 반대편의 논거에 대해 생각하는데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보통은 반대 논거에 대해 고민하지 않기 때문에, 자기 논리만을 따라가는 데에 익숙하다. 자기의 본능이 향하는 곳의 반대 방향으로 글을 써 내려가는 것은 갑자기 핸들의 좌우 방향이 바뀐 자전거를 타는 것만큼 어렵다. (쉬울 것 같다고?​​) 그래서 반대의 관점에서 상황을 서술하려고 하면 처음에는 선뜻 손이 떨어지지 않는다. 처음에는 분량이 서너 줄을 넘기기 어렵고, 그나마도 피상적인 내용이기 쉽다. 또한, 반대 논거를 너무 탄탄하게 논리를 세웠다가, 자기 논거가 상대적으로 약해 보이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도 한몫한다.


 둘째로, 서론과 본론에 자기주장을 쓰지 못하는 점이었다. 한국인인 내게 좋은 글이란, 서론에서 임팩트 있는 문장들로 (BAAAM 하는 느낌으로) 글쓴이의 이야기에 흥미를 끄는 글이었다. 그런데, 서론에서 절대 자기주장을 티 내지 말라고? 심지어 본론에서도?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서론이 재미없으면 본론이 읽힐 기회조차 없다는 게 개인적 생각이었기 때문에 납득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어쨌든 가이드라인을 따라야 했기 때문에, 독자를 설득하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본론까지는 최대한 중립적인 입장에서 서술하려 했다.


 그런데 의외로 이 기이한 스타일에도 장점이 있다. 우선, 주장의 경계가 명확해진다. 반대 관점과 자기 관점을 차례로 나열하는 구조를 사용하다 보니, 서로의 관점이 어느 부분에서 같고, 어느 부분에서 차이가 있는지 짚게 되는 효과가 있다. 다시 말해, 자기주장의 경계를 확실히 하는 것이다. 토론을 할 때, 알고 보면 서로 같은 주장을 하면서도 어떤 이유에서 - 예를 들어 각자의 단어 정의가 달라서 생긴 오해 때문에 - 자기가 옳다고 논쟁을 벌이는 경우가 있다. 주장의 경계가 뭉그러진 글도 비슷한 인상을 준다. 어떤 특정한 면에서 놓고 보았을 때, 두 가지 주장이 같은데 다른 줄 알거나, 다른데 같은 줄 아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주장뿐 아니라 반대 주장도 뒷받침할 수 있는 논거를 자기주장을 뒷받침하는 데 사용하는 실수를 저지를 수 있다. 독일식 글쓰기 스타일은 이런 실수를 어느 정도 예방하는데, 왜냐하면 글쓴이가 글을 쓰면서 양쪽의 관점을 적극적으로 비교하게 되기 때문이다. 만약 예방하는데 실패하더라도, 글쓴이가 반대 관점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혹은 어떻게 오해하고 있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주기 때문에 실수를 발견하기 쉽다.


 독일식 글쓰기 스타일의 두 번째 장점은 특유의 전개 방식이 주는 합리성이다. 이 부분에서는 19세기 영국의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의 저서 『자유론』을 인용하고 싶다. 존 스튜어트 밀은 『자유론』에서 생각과 토론의 자유에 대해 서술했는데, 그는 다양한 의견이 오고 가는 토론을 통해 이성적 합리성을 확보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비록 그가 지적한 것은 논박의 기회를 봉쇄하며 어떤 주장을 일방적으로 진리로 가정하는 그 당시의 분위기지만, 그 과정에서 밝힌 자유로운 토론의 장점도 눈여겨볼 만하다.

    

 … 어떤 사람의 판단이 진실로 믿음직하다고 할 때, 그 믿음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자신의 생각과 행동에 대한 다른 사람의 비판에 늘 귀를 기울이는 데서 비롯한다. 자신에 대한 반대 의견까지 폭넓게 수용함으로써, 그리고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에게도 어떤 의견이 왜 잘못되었는지 자세히 설명해줌으로써, 옳은 의견 못지않게 그릇된 의견을 통해서도 이득을 얻게 되는 것이다. 어떤 문제에 대해 가능한 한 가장 정확한 진리를 얻기 위해서는 의견이 상이한 모든 사람들의 생각을 들어보고, 나아가 다양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의 시각에서 그 문제를 이모저모 따져보는 것이 필수적이다. … 다른 사람의 생각과 자신의 생각을 비교하고 대조하면서 틀린 것은 고치고 부족한 것은 보충하는 일을 의심쩍어하거나 주저하지 말고 오히려 이를 습관화하는 것이 우리의 판단에 대한 믿음을 튼튼하게 해주는 유일한 방법이다. 자기 생각에 명확하게 맞설 수 있는 모든 의견들을 소상하게 잘 파악하고 이런저런 반박에 자신의 견해를 분명히 밝힐 수 있는 사람 - 즉 자신에 대한 반대 의견이나 듣기 싫은 소리를 피하기보다 그것을 자청해 나서고, 다양한 측면에서 제기될 수 있는 수많은 비판을 봉쇄하지 않는 사람 - 은 이런 과정을 거치지 않은 다른 어떤 사람보다도 자신의 판단에 더 자신감을 품을 만하다. …
 *출처: 『자유론』 (서병훈 번역, 책세상 출판사) 57 - 58쪽


 나는 자기 관점과 다른 관점을 비교하고 대조한다는 측면에서, 『자유론』과 독일식 글쓰기 스타일이 평행을 이룬다고 생각한다. 여러 개의 관점으로 상황을 두루두루 관찰함으로써 기본적인 합리성을 확보한다는 점에서 나름 효과적인 전개 방식인 셈이다.


 세 번째 장점은 주장과 취향 고백을 구별하는 연습이 된다는 점이다. 간단하게 말해서, 본론에는 사실과 인과관계 같은 논리를 적고 결론에는 개인의 판단기준 같은 의견을 적는다. 글을 쓰면서 본론과 결론에 각각 들어갈 내용을 구분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사실과 의견을 구별하고, 주장과 취향 고백을 서로 구분하는 연습이 되는 것이다. 간혹 개인적인 의견이나 취향 고백을 주장으로 받아들여서 그것을 반박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럴 때 독일 글쓰기만큼 효과적인 연습이 또 있을까. (뇌피셜: 독일인들은 취향 고백과 주장 구별을 참 잘한다.)



 결국은 문화차이다. 한국에서 독일식으로 지루한 글을 쓰면 끝까지 읽을 사람 몇 없다. 한국의 시간은 다른 어느 나라보다 빠르게 돌아간다. 신문은 종이신문에서 인터넷신문으로, 얼마 전부터는 카드 뉴스라는 이름으로 짧아져왔다. 정보의 양은 점점 많아지는데, 그 정보들을 수용하기 위해 할애하는 여유는 점점 줄어드는 탓이다. 점점 신문기사 제목이 자극적인 방향으로 변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독자들을 글로 끌어들이기 위한 훅(Hook) 역할을 하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확실히 훅이 필요하다. 그래서 나도 글을 쓸 때 서론에 힘을 주곤 했다. 다들 서론만 빠르게 훑으면서 얼마나 재미있는 내용인지 판단하고, 끌리는 글만 골라서 끝까지 읽는 게 습관일 테니까.

   
 반면, 독일인들은 지루함(?)에 대한 내성이 비교적 강하다. 독일은 전반적으로 한국만큼 빠르지 않다. 느린 인터넷 때문에 콘텐츠들을 서핑하느라 아무것도 못 하느니, 차라리 보던 콘텐츠를 마저 끝까지 보는 게 이득일지도 모르겠다. (뇌피셜 + 과장 주의) 어찌 되었든, 독일은 특유의 국민성으로 유명한 나라가 아니던가. 그에 걸맞게, 모든 일을 서류상에 아주 세세히 명시해서 처리하는 나라이기도하다. 어지간한 원칙과 규정은 문서화되어서, 마치 법 조항처럼 구구절절 쓰여있다고 보면 된다. 융통성 없는 독일인의 이미지란 별게 아니라, 이 문서대로 꼼꼼하게 따르는 독일인을 상상하면 된다. 이렇게, 아무래도 말보다는 글로 일이 진행되고 두꺼운 서류가 익숙한 문화이다 보니, 길고 지루한 글에 내성이 강한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또한, 독일의 역사도 글쓰기 스타일과 연관 지어 생각할 수 있다. 독일식 글쓰기는 한국식 글쓰기와 지향점이 다르다. 독일은 한 때, 국민 대다수가 같은 이념에 선동되어 역사적 과오를 범한 과거가 있다.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싶지 않아서인지, 독일인들은 한 사람에 의존하는 경우가 드물다. 한 명의 개인보다는 전체적인 시스템에 의존하는데, 이런 경향이 글쓰기 스타일에서도 드러나는 것이다. 즉, 일차적으로는 ‘내가 보기엔 ~~ 하다’라는 접근을 지양하고 ‘누가 보아도 ~~ 하다’라는 접근을 지향한다. 나아가,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기보다는 독자 스스로 자기만의 생각을 쌓도록 함으로써, 그룹 구성원 개개인 간의 토론을 통해 건강한 의사결정이 이루어지도록 유도하는 장치인 것이다.




여기서 소개한 독일식 글쓰기 스타일이 모든 독일 글쓰기를 대표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는 찬반 논설문에 국한하여 한국과 독일 글쓰기 스타일의 대비를 보인 것뿐이다. 이를 통해, 양 나라의 글쓰기가 풍기는 분위기도 확연히 다르다는 점, 그리고 나름대로 각 문화의 단면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이 잘 공유되었다면 좋겠다.


다시 글의 첫머리로 돌아가고 싶다. 언어는 생각의 도구다. 무의식과 의식의 경계면에서부터 우리의 사고체계를 지배하는 도구다. 반면, 글쓰기는 의식적으로 생각을 도식화하는 행위이다. 언어를 바꾸기는 어렵지만, 글쓰기 스타일을 바꿔보는 시도는 해볼 만하다. 몇 번의 시도만으로도 좋은 자극이 될 것이다. 개인적으로, 독일식 글쓰기가 좋은 글을 보장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어차피 척박한 한국의 토양에서는 몇 번 읽히지도 못한 채, 살아 남지 못 할 테니까. 다만 내가 꿈꾸는 것은 다양성이다. 몇몇 글들이 살아 남고 진가를 인정받아 독자들의 시선 또한 너그러운 토양처럼 바뀐다면, 그때 우리가 누릴 수 있는 글들은 얼마나 다채롭고 풍요로울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