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중에 사치를 부리다

by 보엠

그란비아(Gran Via)를 따라 메트로폴리스 건물 방향으로 가는 길은 항상 복잡하다. 노후된 건물에 대한 공사가 잦고 시티투어버스나 시내버스를 비롯한 차량 통행이 많아 매우 분주하다.


이 거리의 홈리스들은 곳곳에 있는 모퉁이에서 아직 자고 있었다. 도로 위를 걷는 사람들이 담배만 피지 않아도 숨을 좀 쉴 수 있을 것 같은 아침이었다.


그 길을 곧장 걸어서 마드리드에서 가장 크다고 알려진 부엔 레티로 (Buen Retiro)공원에 다다랐을때 마치 피난처라도 찾은 것처럼 서둘러 공원 안으로 들어갔다.

그란비아 스페인 은행역(Banco de España Metro)앞의 모습

나는 공원 산책이 여행 중에 할 수 있는 가장 큰 사치라고 생각한다. 시간부자가 아니면 절대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너무 인위적으로 잘 꾸며진 공원도 재미가 없다. 오랫동안 그곳에서 자란 나무들이 서로 우거져서 자연스러우면서도 여유로운 공원. 현지인들이 아이들과 함께 와서 편안하게 쉴 수 있는 공원. 벤치에 누워서 하늘만 보고있어도 좋은 그런 곳에서 산책하길 좋아한다.


그런면에서 볼 때 부엔 레티로 공원은 최적의 공원이었다. 게다가 무료 입장이고 공원 내에 노천 카페테리아도 잘 되어있어 하루 반나절을 이곳에서 지낸다해도 전혀 심심하지 않을 것이다.

공원안에는 분수대도 많이 있고 뱃놀이를 할 수 있는 호수도 있다.

100일을 목표로 44일째 매일 아침 10km를 뛰어온 우리 남편은 공원에 이르자 오늘도 자신의 목표를 위해 달리기를 시작했다. 공원 둘레만해도 4km라고 하니 그가 원하는 만큼 충분히 달릴 수 있겠다. 50분후 갈라파고스 분수대 앞에서 보기로 하고 우리는 잠시 헤어졌다.

오래된 소나무나 오렌지나무, 낙엽송들이 우거진 부엔 레티로 공원

공원 안에서도 넓은 길엔 산책하는 사람들과 자전거 투어족의 행렬이 끊기지 않기에, 나는 숲을 따라난 오솔길을 찾아 무작정 걸어보았다. 한낮에는 30도를 넘나드는 더운 날씨라지만 나무 그늘 아래는 서늘하면서도 가을 낙엽의 쌉싸름한 향기가 올라왔다. 젊은 연인들은 카드 놀이로, 어린이들은 학교 친구들과 소풍으로, 노인들은 벤치에 나란히 앉아 신문이나 책을 읽으며 소소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손을 잡고 나란히 걸으며 눈을 맞추면서 시종일관 진지하게 대화를 이어가는 중년의 커플도 내 시선 안에 들어왔다. 어디에 있는지보다 누구와 함께 있는지가 내가 있는 이곳을 천국으로 혹은 지옥으로 만든다. 그들을 보고 있으니 더욱 확신이 섰다. 그들 주변은 빛의 느낌도 공기도 달라보였으니 말이다.

여행은 어디론가 떠나는게 아니다. 나에게로 다시 돌아오는 것이다.

산책 중의 묘미는 바로 독서와 사색. 일단 조용한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스페인 여행을 계획하던 중에 사둔 ebook 한권을 열었다. 헤밍웨이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이다. 아주 오래전에 영화로 본 적이 있는데 내용이 잘 생각나지는 않았다. 스페인 내전을 배경으로 한 소설이라 선택했다. 내겐 좀 생소한 전쟁이기에 궁금했다.


유럽의 여러 사상과 이념의 갈등, 계층간의 분노와 증오가 폭발하여 스페인 전쟁이 일어났던 그 시기에 미국인 대학강사 로버트 조던이라는 이방인이 게릴라로 참전하면서 옥신각신 벌어지는 이야기가 내가 현재까지 읽은 1권의 주된 내용이다. (민음사의 한글 번역판은 두권으로 나뉘어 나왔다.)


특히 주인공과 스페인 사람들과의 대화내용이 스페인만의 색채를 잘 담고 있다. 또한 이 책에는 전쟁 중임에도 전시 상황이 느껴지지 않는 마드리드의 모습도 나온다.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게 번화한 도시로 묘사된 것이 신기하다.

호수에서 뱃놀이를 즐기는 사람들

책 속에 잠시 묻혀있다보니 미리 맞춰둔 알람이 벌써 울렸다. 좀전에 신문을 든 노년의 신사가 올라Hola하며 내 옆자리에 앉았었는데 지금은 벤치에 자전거를 기울여 세워둔 어느 청년이 앉아있다. 그를 뒤로하고 서둘러 남편과 만나기로 한 갈라파고스 분수대로 향했다.

그러고보니 공원 안에 난 길이나 광장 이름이 모두 남미의 국가명이다. 향해시대, 그 과거의 영광을 아직까지 그리워하는 제국의 콜렉션이라도 되는건가 싶어 잠시 헛웃음을 참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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