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돈 빌려달라는 친구
지난 주말이었다. 해외살이 중인 친구가 우리 신랑한테 통화가 가능하냐며 카톡으로 연락을 해왔단다. 전화를 통해 어려운 전후 사정을 얘기하고는 수천만 원의 큰돈이 필요하다며. 자기 남편 몰래 빌리는 거라고도 했단다.
형편이 좋지 않다는 말에 우리 신랑은 해달라는 그 금액 다는 못해주고 나와 상의하여 일부만이라도 보내주겠다고 했단다. 이후 그녀는 원래 친구사이에 금전거래 안 하는 건데 미안 타며 본인 계좌번호를 보내왔더랬다.
20년 전. 동네 이웃으로 처음 만났고. 또래인 나와 먼저 친구가 된 그녀. 결혼 연도도 비슷하고 남편들끼리도 얘기가 서로 잘 통하여 우린 두루두루 친구가 되었다. 일정을 맞춰 같이 여행을 다녀온 적도 있었다.
몇 년 전부터 그녀의 남편이 지병으로 아프다고 했다. 해외에서 부부가 고생하며 일군 사업이 잘 돼서 코로나 시국에도 사업을 확장 중이었고, 직원들도 더 고용하는 과정이었다. 옆에서 보기엔 너무 무리하는 것이 아닌지 노파심도 들었지만, 두 사람 모두 강단이 있어서 잘 해낼 거라 생각했다.
그녀 말이 직원들 줄 월급이 밀렸다며. 삼천만 원을 해외송금 해달라고 했다. 자기 부모님에게도 이미 돈을 빌린 상태고. 연금으로 생활하는 부모님께 돈을 더 요구하기 어렵다고 했다.
앞으로 비가 더 온다는데. 오늘 아침 우리 남편은 비가 새는 낡은 우비를 입고 출근했다. 나는 그 우비를 수선하려고 가장 저렴한 방수 테이프를 쿠팡에서 검색하다가. 갑자기 화가 났다. 그들 부부에게는 자가 소유 집이 있고 부부가 각각 차량 한 대씩 보유 중이며 직영하는 사업장이 세 군데가 있다. 우린 집도 차도 없고. 월급 받아 덜 먹고 덜 써서 조금씩 저축하고 가끔 여행하며 살아가는 중이다.
그들도 우리가 어렵다고 하면 그리 했을 거라며, 이자도 담보도 요구하지 않고 친구를 위해 해외 수수료까지 물어가며 송금하겠다는 남편에게도 짜증이 났다. 나의 내면이 이렇게 변색될 때까지 정작 그녀는 내게 이 일에 대해 문자 한 통도 없었다. 예의가 없다는 생각과 뭔가 무시당하는 기분마저 들었다.
그간 친정에 어려운 일 있어도 남편에게 손 부끄러워 차마 입을 떼지 못한 날들이 수두룩했다. 그런데 그녀는 어떻게 그리 당당히 국제전화를 해서. 나에게도 아니고. 친구 남편한테 그 큰돈을 빌릴까. 그동안 살아온 세월이 얼마나 쉬웠길래. 별의별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내 마음을 이대로 찜찜하게 둬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남편을 제지했다.
돈 잃고 친구도 잃을 상황이 뻔한데 두고 볼순 없었다.
내가 먼저 친구에게 문자로 정중히 거절했다. 그리고 이 일을 계기로 앞으로는 우리 남편과 따로 연락하지 말아 달라고도 했다. 변명하는 그녀의 답변이 왔고 자기 때문에 우리 부부가 싸우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나는 친구에게 우리 부부 일까지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리고 삼십 분도 지나지 않아 남편이 그녀에게서 신경쓰지 말라는 문자를 받았다고 말해주었다. 나 또 무시당한 건가. 그렇지만 마음은 홀가분했다. 이렇게 낡은 우정은 한번 더 정리가 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