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직장인의 세미 홀리데이
코로나가 가져다준 몇 안 되는 이점 중 가장 큰 것은 바로 사무실에 나가야만 근무로 쳐 주던 고릿적 시각이 많이 유연해졌다는 것이다. 6대주 방방곡곡에서 갖가지 사연을 가지고 암스테르담으로 이주해 와 일하며 살던 우리 회사 사람들 중에는, 코로나가 장기화되면서 이미 본국으로 돌아가 일하는 케이스가 많았다. 올 초부터 적극적으로 실시된 백신 접종으로 감염 숫자가 많이 줄어들면서 봉쇄되어 있던 오피스도 차차 문을 열고 있는데, 우리 회사도 10월부터는 주 2회 출근을 적극 권장하고 있다. 주 5회 출근은 이제 영원히 없어졌고, 일주일 중 나머지 3일은 재택근무를 해야 한다. 일단 전 세계에 흩어져 일하던 직원들 대부분 9월에 네덜란드로 돌아왔지만, 여태껏 해오던 work-wherever-you-want 분위기 속에서 갑자기 2일 출근을 위해 암스테르담에 계속 있으라고 하면 "왜?"라는 질문이 나오는 건 당연지사다. 모든 미팅과 업무가 온라인으로 이루어지던 지난 1년 반 동안 회사는 멀쩡하게 잘 돌아갔고 (아니 오히려 성장했고), 물리적 컨택이 없어지면 와해될 줄만 알았던 조직 분위기도 끄떡없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세계 어디서든 일할 수 있는 4주의 시간을 매년 받게 되었다.
나는 그중의 일주일을 남부 스페인에서 쓰기로 했다. 한 주는 일을 하면서 발렌시아(Valencia)에서, 다른 한 주는 휴가를 붙여 좀 더 자연이 있는 곳에서. 덕분에 짐이 많아졌다. 업무용 랩탑, 개인 맥북, 아이패드, 키보드와 마우스, 취미를 위한 카메라와 부속품들. 여기에 옷과 화장품까지 더하고 나니 절반 좀 넘게 채운 배낭 하나 메고 한 달 넘게 여행하던 나의 대학교 때 모습이 전생처럼 느껴질 지경이었다. 내 몸 하나 2주 건사하는데 이렇게 많은 물건이 필요했던가?
발렌시아는 올여름이 시작될 때도 다녀왔었다. 적당히 바쁜 도시이면서 중심부에 커다란 공원이 가로질러 있고, 무엇보다도 코워킹 스페이스(co-working space)가 잘 되어 있어서 일주일간 아파트에서 일하는 게 지루해지면 언제든 환경을 바꿔 일할 수 있다는 장점이 크게 작용했다. 머물렀던 아파트는 루사파(Ruzafa)라는 지역에 자리하고 있었는데 워낙 중심가라 사실 지루할 틈이 없었다. 일하다 잠시 창문을 열면 도시의 잔잔한 소음이 거실을 채워 절반은 밖에 나와있는 듯한 기분이었고, 여섯 시에 업무가 끝나도 남은 해를 즐기며 맥주 한 잔 하고 저녁 먹기 전까지 낮잠을 자는 여유도 부릴 수 있었다. 단골 레스토랑이나 바를 몇 개 알아두고 나니 방문객이 아닌 거주자의 느낌으로 머물 수 있었고, 물가까지 저렴하니 안성맞춤.
단 한 가지 아쉬운 점이라면 스페인의 생활 리듬이었다. 나는 보통 11시쯤 자고 7시 전에 일찍 일어나는 스타일이라, 정 반대인 스페인이 조금 부담스러웠다. 상점들은 정오가 다 되어서야 열고 오후 4시쯤 잠시 닫은 후 저녁시간에 다시 열어 아홉 시에 닫는다. 보통 월요일에 일괄적으로 쉬는 암스테르담과는 달리 각 상점마다 휴무일이 들쭉날쭉이라 쇼핑을 가고 싶으면 미리 영업일을 꼭 확인하고 가야 하는 불편함도 있다. (심지어 확인하고 가도 가끔은 구글에 제대로 업데이트가 되어있지 않아 헛발 걸음을 한 적도 두어 번 있었다) 레스토랑의 경우 최소 저녁 8시는 되어야 문을 열고 식사 예약을 11시 시작까지 받으니, 외식을 하는 날이면 항상 소화가 거의 되지 않은 채로 자야 했다. 북서부 유럽의 근무 스케줄과 스페인 생활 스케줄을 한데 겹치려다 보니 어쩔 수 없이 겪은 작은 불편함이었다.
발렌시아에 머무는 동안 가장 좋았던 건 이전 글에서도 소개했던 세르비아인 부부가 운영하는 와인바에서 밤늦게 와인을 홀짝이는 시간이었다. 어슬렁어슬렁 걸어가도 채 5분이 걸리지 않아 풀방구리에 쥐 드나들듯 매일 저녁 마실을 나갔다. 밤공기 내음을 맡으며 테라스에 앉아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는 일. 신이 난 주인이 추천해주는 와인을 이것저것 여러 잔 맛보는 일. 이상하게도 이곳에 갈 때마다 매번 나는 한국에 살 적 동네 친구들과 호프집 밖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치킨에 생맥주를 마시던 기억을 떠올렸다. 암스테르담에는 없고 남부 스페인 도시에는 어렴풋이 있는, 그런 정취다.
두 번째로 좋았던 건 정육점(Carniceria)과 햄을 파는 상점(Charcuteria)이었다. 식문화가 발달한 나라다 보니 작은 동네 정육점에서도 특수 부위를 쉽게 볼 수 있었고 드라이 에이징 고기도 흔했다. 안심, 등심만 진열된 암스테르담의 지루한 정육점에 익숙한 내 눈은 덕분에 발렌시아 어디를 가든 탐욕스럽게 식재료 구경하기 바빴다. 하몽(Jamon, 염장한 햄)은 또 어떤가. 커다란 돼지다리가 줄줄이 나무 천장에 매달려있고, 몇 개는 하모네라(Jamonera, 하몽을 쉽게 자를 수 있도록 고정시켜두는 장치)에 꽂혀 윤기 반지르르한 속살을 드러낸 풍경은 왠지 모를 아늑함을 자아낸다. 이것도 저것도 다 맛보고 싶은 내 마음을 알기라도 하듯 조금씩 잘라 입에 넣어주는 주인아저씨의 인심까지 더하니 내 마음을 뺏는 데 모자람이 없었다. 생고기와 햄을 함께 취급하는 곳도 종종 있지만 어쨌든 이 둘을 엄연히 다른 이름으로 갈라 부르는 스페인 사람들의 음식에 대한 진지함이 참 귀엽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