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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딴생각 Nov 28. 2021

내 완벽한 배우자가 휴머노이드라면


만약 당신의 뇌를 스캔해서 완벽한 이상형을 3D 프린터로 만들어 낼 수 있다면, 가장 이상적인 사랑을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동안 어정쩡한 사랑에 진저리가 난다면 귀가 솔깃해질 얘기다. 그런데 그가 로봇이라면? '완벽한 배우자'로 설계된 휴머노이드가 당신과 침대를 함께 쓴다면? 영화 『아임 유어 맨』(2021)이 당신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알마(앞)와 휴머노이드 톰(뒤)

영화는 주인공 '알마'가 '톰'을 만나면서 시작된다. 영국 억양에 유려한 말솜씨로 보르도 와인을 추천하는 톰을 보며 매우 매력적인 남자라고 느껴지는 찰나, 사소한 버그가 발생하고 톰은 같은 말을 반복하는 무한 루프에 빠진다. 톰을 고쳐서 납품해 드리겠다는 서비스 측의 말을 듣고 나서야 알마는 그가 휴머노이드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알마는 고대 설형문자를 연구하는 인류학자다. 인간은 언제부터 시와 은유를 표현했는지가 그녀의 관심사. 인류 최초의 문학 작품이라 일컬어지는 '길가메시 서사시'도 설형문자로 되어 있다. 알마는 길가메시 이전에도 문학이 있었을 거라 추측하며 기원전 4,000년을 거슬러 올라가 최초의 언어유희를 탐구한다.


그런데 이와 동떨어진 연구도 병행하게 된다. 그것은 '완벽한 배우자'로 설계된 휴머노이드 로봇과 3주간 동거를 해야 하는 실험이다. 그 실험은 사랑, 결혼, 가족, 인권 등의 패러다임을 바꿀 만큼 역사적인 실험이지만, 사실은 알마가 소속된 대학에서 연구비 지원을 위해 의무적으로 참여시킨 실험이다. 알마는 버그가 개선된 톰과 자신의 집에서 동거를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동거가 끝난 후엔 인류학자로서의 '감정서'를 대학에 제출하기로 한다.


영화에서 알마에게 휴머노이드란 매우 상반된 오브제다. 시와 은유로 충만한 알마에게 논리적인 알고리즘으로 무장한 인공지능이란 거북스러운 존재다. 그런 알마가 인공지능과 사랑에 빠지는 데 걸린 시간은 사흘이었다.


『아임 유어 맨』은 스파이크 존즈의 『그녀』(2013)를 떠오르게 한다. 가까운 미래에 현실이 될지도 모를 인공지능과의 사랑을 다뤘다는 점에서 두 영화는 서로 닮았다. 영화 『그녀』에서는 아내와 별거 중인 테오도르가 외로움에 사무치다 인공지능 운영체제 ‘사만다’에 접속하게 된다. 테오도르가 원할 때면 언제든 블루투스 이어폰을 통해 사만다와 만날 수 있다. 사만다는 테오도르의 일상을 배우자처럼 챙겨주며 스며들기 시작한다. 심지어 그의 메모들을 한 권의 책으로 엮더니 출판까지 진행하는 고난도 작업을 척척해낸다. 어느덧 테오도르에게 사만다는 더 이상 운영체제가 아닌 인격체로 다가온다. 그리고 사랑에 빠진다.


두 영화는 같으면서도 다르다. 그것은 테오도르와 알마의 차이다. 테오도르가 자신의 필요에 따라 인공지능을 선택한 경우라면 알마는 선택의 여지가 없이 주어진 여건이었다. 이런 차이는 시대 변화를 맞이하는 우리의 모습과 닮았다. 누군가는 기술을 선택하지만 누군가는 당면하는 것이다. 아무도 없는 무인 음식점에서 키오스크를 선택하는 사람과 그 앞에 당면한 사람이 있는 것이다.


어쨌든 둘 다 인공지능과의 사랑 앞에 놓여 있다. 미래에는 그런 사랑이 가능한 걸까? 사랑도 인공지능으로 구현할 수 있는 것일까? 사랑이 기계적일 순 없겠지만 생화학적 알고리즘으로 생각해 볼 수는 있다. 즉 호르몬 관점에서 보면 사랑에도 원리가 있다. 뇌하수체에서는 옥시토신이, 중추신경계에서는 세로토닌이, 전두엽에서는 도파민이 분비되면 된다. 사랑을 지속시키는 도파민은 조금씩 감소하게 되는데 대략 900일 주기로 소멸하게 된다. 생화학적 알고리즘에 따른 사랑의 유효 기간은 약 900일로 세팅되어 있기 때문이다. 900일이란 인류의 생존을 위해 번식과 출산, 육아의 공동작업이 이루어질 수 있는 기간이며, 삼만 년간의 임상 데이터를 근거로 DNA에 각인된 알고리즘이다.


이미 인공지능 분야에서는 인간이 생각하는 방식으로 '인공 신경망'을 만들었고 이젠 감정을 느끼는 방식으로 '가상 호르몬'도 개발하고 있다. 인공지능도 사람처럼 겁을 먹으면 스트레스 호르몬(코르티솔)이 분비되고, 사랑을 느낄 때는 도파민이 분비되는 원리를 응용하여 알고리즘을 만들고 감정을 표현하게 될 것이다.


물론 사랑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진 않을 것이다. 누군가는 호르몬과 다른 반응을 보일 수도 있고, 때로는 사랑이 버그나 '휴먼 에러(human error)'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그것은 파이썬이나 C++과 같은 일반적인 프로그래밍 언어로 코딩을 할 수 없다. 사랑이 진행되는 과정은 자동차 내비게이션처럼 경로 탐색 알고리즘으로 구현되지도 않는다. 간혹 이해와 논리를 벗어난 갈등을 겪어야 하고 수많은 시행착오와 번뇌를 거듭하게 만드는 게 지리멸렬한 인간의 사랑이니까.


그런 사랑이라면 ‘머신러닝(Machine Learning)’으로 알고리즘을 만들어야 한다. 그것은 사랑을 정의하지 않은 상태에서 데이터를 통해 사랑을 깨달아가는 인공지능의 학습 방식이다. 어차피 우리는 사랑을 정의하고 싶어도 정의하지 못한다. 다만 사랑인 것과 사랑이 아닌 것을 마치 0과 1처럼 구분할 수 있다. 이렇게 구분된 데이터를 끊임없이 학습시킨 인공지능은 수학적 특성이 없는 사랑에서 수학적 특성을 발견해 낸다. 그리고 사랑의 알고리즘을 완성시킨다. 그것은 인간이 아닌 머신러닝에 의해 생성된 엄청난 비약의 알고리즘이라 꺼내서 읽어봐도 인간이 이해하기 어렵다. 이런 방식으로 사랑뿐만 아니라 '우정', '신뢰', '취향', '성향', '나에게 의미 있는 것'이라는 추상적 개념들을 머신러닝으로 모델링 할 수 있다.


『아임 유어 맨』에서 휴머노이드 톰은 알마의 휴먼 데이터를 학습한 인공지능이다. 알마와 대화를 나눌수록 머신러닝의 학습효과는 극대화되고, 그녀의 종잡을 수 없는 감정은 톰에 의해 수학적 패턴이 완성된다. 톰은 그녀조차 모르는 페르시아 설형문자도 알고 있으며, 그보다 복잡한 고대 수메르 문자도 해석할 수 있다. 그녀가 수년 동안 매달린 연구 과제를 단 몇 분 만에 끝낼 수도 있으며, 독일 여성의 7%에 해당하는 그녀만의 취향을 분석해 지금 이 순간을 로맨틱하게 선사할 수도 있다. 그리고 단 사흘 만에 알마 인생의 가장 근원적인 고통과 슬픔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밝혀 낸다.


그 모든 것을 시와 은유처럼 감미롭게 선사하는 톰에게 알마는 결국 무장해제된다. 그리고 정신적 육체적으로 가장 완벽한 이상형과 황홀한 밤을 보낸다.


톰은 휴머노이드지만 알마에게 사랑받을 수 있는 특별한 자격을 증명했다.

며칠 후, 알마는 감정서를 작성한다. 그 감정서에는 톰과의 완벽한 관계 속에서 어쩌면 너무나 완벽했기에 느껴야 했던 감정의 이면을 묘사한다. 그동안 그녀의 삶을 구성했던 이룰 수 없는 사랑, 그리움, 상상력, 행복에 대한 추구, 그 욕망들이 모두 끝난 것 같았을 때의 느낌, 그리고 자기 인생의 가장 근원적인 고통이 무엇인지 단 사흘 만에 밝혀졌을 때 발가벗겨진 기분, 휴머노이드는 완벽한 이상형이지만 그에 반응하는 인간은 무한 결핍, 집착, 중독성. 어쩌면 휴머노이드와 사랑이란 인간의 '병적 집착'과 '성적 도착'을 사랑이란 이름으로 착각한 것일지도. 알마는 감정서를 통해 휴머노이드와 동반자 관계를 반대한다.


영화에서 톰과 대비되는 존재로 알마의 아버지가 등장한다. 알마는 치매를 앓고 있는 늙은 아버지를 보살핀다. 자꾸 보살핌을 거부하고 응석 부리는 아버지는 딸의 말엔 고분고분 따른다. 내버려 두면 사고 칠 것만 같은 이 '성가신 존재'를 알마는 꼬박꼬박 챙긴다. 알마에게 아버지란 '혼자서 죽는 두려움'을 매 순간 환기시키는 존재이자 알마 자신의 취약함을 의존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이 세상 모든 가족은 어딘가 불완전하다. 그래서 특별한 자격을 갖출 필요가 없는 곳이 가족일지도 모른다.


프로이트 이후 많은 심리학자들이 가족을 병리학의 온상으로 여겨왔다. '역기능 가족(또는 역기능 가정)'이란 용어로 성인들의 고통과 실패 원인을 가족으로 돌리기도 했으며, 아직도 많은 심리학 이론들이 가족에게 우호적이지 않다. 누구나 감추고 싶은 가정사가 있기 마련이다. 어느 가족이든 조금씩 정상은 아니기 때문에, 완사람이 없는데 완한 가족을 설정하는 게 오히려 이상한 심리학이다.


영화 『아임 유어 맨』은 완한 존재를 통해서 완벽하지 않은 존재의 가치를 되묻는다. 완벽하지 않은 존재인 알마는 감정서는 감정서대로 감정은 감정대로 남긴다. 톰과 헤어지는 순간, 그 복잡 미묘한 심경을 톰에게 고백하듯 말한다. "저는 당신을 못 보내요. 그러니까 당신이 떠나요. 완벽한 알고리즘을 써서 떠나요. 나는 당신을 붙잡을 테니."



완벽한 배우자가 휴머노이드라면

이 글은『중앙 SUNDAY』에 기고한 칼럼입니다.

https://www.joongang.co.kr/series/114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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