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읽고 미래를 보다.
유발 하라리는 전작 '사피엔스'에서 다른 동물과 다를 것 없던 호모 사피엔스라는 종이 어떻게 지구를 지배하게 됐는지 설명했다. 그 시작은 인지 혁명이다. 다른 동물의 경우 최대 100명에서 150명의무리를 만들 수 있다. 이와 달리 사피엔스는 '언어'를 사용해 상상속의 규칙을 만들어 수천, 수만 명의 무리를 만들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상상 속의 규칙은 지금까지 계속 변화해 왔지만, 여전히 유효하다.
우리는 통장에 찍힌 숫자일 뿐인 화폐를 사용하고 (비트코인! 가즈아!) 각자 자국민으로써 같은 나라 사람들과 유대감을 가진다. 결국, 인류는 다양한 '믿음'과 '이야기'들을 공유하고 있으며 저자 유발 하라리는 그 변화를 인지하는 게 역사를 공부하는 것 이라고 말한다.
역사를 공부한다는 것은 이런 의미의 그물망들이 생기고 풀리는 것을 지켜보고, 한 시대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였던 것이 후손에 이르러 완전히 무의미해진다는 것을 깨닫는 일이다.
그렇다면 역사를 공부하는 목적은 무엇인가?
인류의 역사는 우리의 평균 수명보다 훨씬 길고 큰 틀에서 우리가공유하는 '믿음'과 '이야기'들의 변화는 우리가 단일 개체로서 살면서 접할 수 있는 변화보다 훨씬 다양하다. 따라서 인류를 결속시켰던 과거의 '믿음'들을 돌아봄으로써 현재의 우리가 고려할 수 있는 '믿음'의 선택지를 늘리는 것. 이것이 현재의 우리가 역사를 공부하는 목적일 것이다.
모든 분야의 학자들은 우리의 지평을 넓히고 그럼으로써 우리 앞에 새로운 미지의 미래를 열고자 한다. 역사 분야에서는 특히 그렇다. 이따금씩 역사학자들이 예언을 시도하기도 하지만 (성공 사례로 꼽을 만한 것은 딱히 없다), 그럼에도 역사학의 가장 큰 목표는 우리가 평상시 고려하지 않는 가능성들을 인지시키는 것이다.역사학자들이 과거를 연구하는 것은 그것을 반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에서 해방되기 위해서 이다.
인류의 생활을 실질적으로 개선한 것들로 농업혁명이나 과학 기술의 발달, 경제 성장 등을 들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개선의 바탕이 되는 협력 시스템, 다시 말해 인류를 결속시켰던 '허구' (앞에선 '믿음'이나 '이야기'로표현했다) 들을 중심으로 인류의 역사를 되돌아본다면 재미있는 해석이 나올 수 있다.
허구는 나쁜 것이 아니다. 허구는 꼭 필요하다. 돈, 국가. 기업 같은 허구적 실체에 대한 널리 통용되는 이야기가 없다면 복잡한 인간 사회가 제대로 돌아갈 수 없다. … 하지만 이야기는 단지 도구일 뿐이다. 이야기가 목표나 잣대가 되어서는 안된다. 그것이 단지 허구임을 잊을 때 우리는 실제에 대한 감각을 잃게 되며, 그때 우리는 '기업을 위해 많은 돈을 벌려고' 또는 '국익을 보호하려고' 전쟁을 시작한다. 기업, 돈, 국가는 우리의 상상에만 존재한다. 우리는 우리를 도우라고 그것들을 발명했다. 그런데 왜 그것들을 위해 우리의 생명을 희생하는가?
인류를 결속했던 많은 허구 중 인류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던 것 둘을 뽑자면 다음과같다.
1. 전근대 시대의 종교
2. 근대, 현대 시대의 인본주의
전근대 시대의 종교는 가치 판단의 주된 기준이었다. 책에서 나온 예를 하나 들자면, 한 사람이 불륜을 저지르고 이게 옳은 것인지틀린 것인지 판단을 하기 위해선 성경을 뒤지거나 교회의 목사에게 물어봤다. 성경에 불륜은 나쁜 것이라고 적혀있으므로 불륜을 저지른 사람은고해성사해야 천국에 갈 수 있었다. 태풍이 불어 농작물이 피해를 본다면 신이 노하신 것이고 별똥별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신이 어떤 개시를 내린것인지 알아내야 했다. 전근대 시대에선 신이 개인의 삶에 큰 영향을 주었고 인생의 의미는 신의 장대한 계획 아래에 있었다. 내가 오늘 당장십자군 전쟁에 나가 죽더라도 내 인생은 이단을 물리치고 기독교를 전파 하려는 하느님의 큰 뜻을 받들어 희생되었기에 의미 있는 인생이다. 즉 인류는 신의 목적을 믿었다.
하지만 과학이 발달하며 신의 영향력은 희미해져 갔다. 태풍이 불어 닥친 것은 기후 변화의 하나이고 별똥별이 떨어지는 이유를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게 되자 인류는 신을 찾지 않게 되었다. 근대 이후의 세계는 목적을 믿지 않고 원인을 믿었다. 그러자 하나의 큰 문제가 발생했다. 아무리 과학 기술이 발달해도 알아낼 수없는 것들은 어떻게 할까?
바로 가치와 의미에 관한 질문의 답 말이다.
전근대 시대에선 종교가 간단히 답을 주었던 가치와 의미에 관한 질문들은 과학이 아무리 발전한다 한들 답을 줄 수 없다. 불륜과 동성애는 옳은 것인가? 신이 없어진 상황에서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난 이유는 무엇이며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것일까? 이러한 윤리적 질문들에 답을 하기 위해 나온 것이 인본주의이다. 불륜을 저질렀지만 내가 괜찮다고 생각한다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 현대에도 역시 종교가 여전히 존재하지만, 대부분의 가치 판단은 자기 자신에게 달렸다.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라.'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하라.' 오늘날 우리가 많이 보는 이러한 문구들은 인본주의에서 나온 것이다. 전근대 시대에 신이 내려주던 인생의 의미까지도 현대에 이르러서 인본주의가 규정하게 되었다. 종교가 인류의 행동에 걸었던 많은 제약이 인본주의가 들어서며 없어지게 되었고 그 결과 과학이 발달하게 되었다.
과학의 발달 바탕이 되었던 인본주의가 아이러니하게도 과학이 더욱 발달하며 흔들리고 있다. 인본주의는 개인의 자유의지에 큰 의미를 부여하며 자유의지가 있어야만 성립된다. 하지만 과학이 개인의 자유의지는 없다고 말한다면 어떨까? 지난 세기 과학자들은 굳게 믿고 있었던 영혼, 자유의지, 자아 같은 건 우리에게 없다는 것을 밝혔다. 우리는 물리적, 화학적 법칙의 지배를 받는 유전자, 호르몬, 뉴런으로 이뤄져 있었다. 생명과학은 인간을 유전자, 호르몬, 뉴런으로 이뤄진 알고리즘으로 보기 시작했으며 우리가 자유의지라고 생각했던 행동은 몸에서 분비되는 유전적 기초와 호르몬과 뉴런의 화학 작용이라고 말한다. 이렇게 과학적인 이유를 들지 않더라도 잘 생각해보면 '자유 의지'라는 것이 상당히 모호한 개념이란 것을 알 수 있다.
TV를 틀면 끊임없이 나오는 광고들, 눈을 돌리는 곳마다 광고가 아닌 것이 없는 도시 속, 광고들은 우리의 머릿속에 자리를 차지하려 달려든다. 이런 환경에서 내가 점심때 마실 우유를 하나 고른다고 했을 때 그 우유는 내 자유의지로 고른 것일까? 과연 광고에서 본 이미지는 내 선택에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우리의 가치관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이어져 오는 자신을 단일 자아라고 인식하지만, 그 자아는 절대 과거와 같지 않다. 우리가 읽는 책, 보는 영화, 우연히 듣게 된 강연이나 사람들과 했던 대화들과 자신의 무작위적인 기억을 합쳐 일관된 이야기를 형성해 낸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가치관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것은 결국 '이야기', 앞서 말한 '허구'와 다르지 않다.
하지만 아무리 설득력 있고 매력적일지라도 이 이야기는 결국 허구이다. 중세 십자군 전사들은 삶의 의미가 신과 천국에서 온다고 믿었고, 현대의 자유주의자들은 인생의 의미가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에서 나온다고 믿는다. 하지만 둘 다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에게 자유의지는 없고 유기체는 알고리즘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순간 문제는 심각해진다. 알고리즘은 우리의 행동을 결정하는 패턴 자체가 중요한 것이지 그 패턴이 유기체에서 일어나는지 컴퓨터에서 나오는지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미래에는 사피엔스의 행동 알고리즘을 해독해 지능과 의식을 분리할 수 있다.
실생활의 예를 들자면, 웹서핑 하다 내 마음을 꿰뚫어 보듯 필요한 것을 보여주는 구글의 인공지능 광고를 보고 놀란적 없는가? 내 구글 어시스턴트는 비행기 표 일정을 달력에 등록해 미리 알려주며 출퇴근 시간이 되면 도로가 얼마나 막히는지 알려준다. 페이스북은 SNS에서누른 '좋아요'를 분석해 우리의 가족보다 우리를 더 잘 알 수 있다고 말한다. 이렇듯 미래에는 우리 자신보다 우리를 더 잘 아는 알고리즘이 만들어질 것이다.
우리는 알고리즘일 뿐이라는 것이 받아 들여지고 자신보다 자신을 더 잘 아는 알고리즘이 만들어지면 지금까지 우리가 믿어왔던 자유주의, 인본주의, 개인주의는 무너질 것이다.
물론 저자는 이 같은 미래가 무조건 올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책에 있는 근거와 논리를 따라가 본다면 절대 허무맹랑한 이야기는 아니다. 충분히 우리가 가축을 길들였듯 알고리즘이 인간을 길들이는 상황이 올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것 인가? 유발 하라리는 사피엔스에서처럼 확실한 결론을 말하기 보단 독자들이 생각하게 하는 질문을 던지고 끝낸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나는 과거에 많은 경험을 하고 많이 배울수록 내 가치관이 단단해 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최근 들어 그 생각이 틀렸다는 느낌이 든다. 인생의 목적이나 어떤 사건의 가치 판단이 기독교의 성경처럼 절대적으로 정해져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어떤 입장에서도 다양한 의견이 나올 수 있었다. 누군가 내게 '좋은 인생이란 무엇인가요?, 행복이란 무엇인가요?'라고 물으면 나는 '자신의 경험 의미 부여를 하고 그걸로 재밌는 소설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이 행복하고 그게 인생은 좋은 인생 아닐까요? 물론 그렇지 않다고 해서 나쁜 인생은 아니지만요.'라고 말할 것이다. 그렇다면 유발 하라리가 제시한 미래 또한 순순히 받아들일 수 있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알고리즘이 우리를 길들인다니! 껄끄럽다. 당연히 껄끄러울 수 밖에.
나는 신이 사라지고 그 빈자리를 인본주의가 채웠듯 다른 '허구'가 우리를 채워줄 거라고 생각한다. 익숙한 인본주의가 좋긴 하지만 대체 되어야 한다면 (절대적인 기준은 없으니) 나도 스스로 '허구'를 만들어 보려 한다. 많은 사람과 같이 일하며 살고 싶은 사람으로서 어떤 '믿음'이 사람들을 잘 결속 시킬 수 있을지 생각 중이다.
가치관을 말하는 대목에서 정곡을 찔린듯했다. '자신의 경험을 재밌는 소설로 엮을 수 있는 인생이 좋다.'라고 생각했던 나는 절대적인 기준은 없다는 것을 인정했지만 역시 인류가 가축과 같아지는 건 싫다. 알파고를 당황하게 해 패배하게 만든 이세돌의 신의 한 수 처럼, 우리가 단지 알고리즘이 아니라 다른 무언가가 있기를 바란다 ㅠㅠ.
물론 종교와 자본주의, 인본주의 등 우리를 결속 시켜왔던 사상들은 기술 발전에 맞게 사회를 협력시켜 줄 수 있는 '허구'이다. 앞으로 대두될 새로운 '믿음'들도 허구일것이다. 우리가 발명한 허구들의 목적은 우리를 돕기 위함이다. 앞서 제시했던 책속의 내용처럼, 허구를 위해 우리를 희생할 필요는 없다. 인류의 역사를 보면 시스템은 우리의 필요에 맞게 잘 진화해 왔다. 완벽한 것은 아니지만 현재 우리는 과거와 달리 '믿음'에 대한 다양한 선택권이 있다. 미래는 유발 하라리가 말했던 , 데이터교 처럼, 효율성만이 부각되는 '믿음' 뿐만 아니라 우리에겐 다양한 선택권이 주어지지 않을까? 인본주의 시대에 종교에 대한 믿음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것 처럼. 소비물이 개인화 되어 아이러니 하게도 처음 보는 사람과 소비물을 나누는 공유 경제가 발달하는 것 처럼 말이다. 어쩌면 인류가 자신을 알고리즘으로 인식하게 되는 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인간 다움을 발견 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당신은 이 책을 덮은 뒤에도 이 질문들이 오랫동안 당신의 마음속에 남아 있기를 바란다.
1. 유기체는 단지 알고리즘이고, 생명은 실제로 데이터 치리 과정에 불과할까?
2. 지능과 의식 중에 무엇이 더 가치 있을까?
3. 의식은 없지만 지능이 매우 높은 알고리즘이 우리보다 우리 자신을 더 잘 알게 되면 사회, 정치, 일상에 어떤 일이 일어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