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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당 모두를 '방법'하고 싶다

사법으로 '방법'해야

 영화 <헝거 게임>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세상을 이야기하면서 우리가 사는 세상을 현실적으로 담아낸다. 영화는 지배자와 피지배자가 엄격하게 구분된 세상이 배경이다. 통치권을 가진 한 국가는 나머지 피지배국으로부터 2명씩 전사를 선발해 서바이벌 게임을 해마다 개최한다. 놀이하듯 즐기는 게임이 아니라 목숨을 건 게임이다. 통치국 시민들은 마치 올림픽 경기 중계를 보듯 죽이지 않으면 자신이 죽을 수밖에 없는 그 살인현장을 환호하며 즐긴다. 피지배국 시민들도 그 중계를 본다. 그들은 즐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국의 아이들이 살아남길 간절히 바라며 숨죽이고 본다. 통치국 시청자들의 탐욕을 채우기 위해 살인 서바이벌 운영기관은 끊임없이 가혹한 상황을 조작하고 참가자들을 위험에 빠트린다. 참가자의 사망을 알리는 신호가 화면에 뜨면 통치국 시청자들은 환호성을 지르고, 해당 피지배국 국민들은 통탄에 빠진다. 어찌할 도리 없이 목숨을 잃는 아이들, 그들을 지켜보던 피지배국 시민들은 무기력과 자괴감에 빠져 그 어떤 저항도 해볼 마음을 품지 못한다. 오로지 복종뿐이다. 분노는 더 강한 탄압으로 이어지기에 그저 침묵하며 서바이벌 게임에 선발되지 않기만 바랄 뿐이다. 통치국이 노리는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나는 할 수 없다, 우리는 할 수 없다는 무기력과 자괴감을 심어주는 것. 피지배국끼리 서로 시기와 질투 같은 감정에 휩싸여 서로 연대해서 세상을 바꿔보겠다는 꿈과 의지를 품지 못하게 하는 것이 그들의 지배기술이었다.

     

N번방 사건 기사를 읽다 이 영화가 생각났다. 지배와 피지배, 착취가 놀이가 되는 어이없는 상황, 분노와 저항보다 무기력과 자괴감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피해자들. 가상의 세계를 담고 있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에 그런 세상이 엄연히 존재했다. 이런 사실을 인정하는 것조차 두렵다. 

     

또 한 명의 악마가 나타났다. 한 명만이 아니다. 수십만 명이다. 수백만 명일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악마들이 창궐했다.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오래전부터 곳곳에 숨어 몰래몰래 활동해왔다. 안타깝게도 오래된 일이다. 이 악마들을 먼저 본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자신이 할 수 있는 방법을 다 동원해 세상이 이들의 악행을 알렸다. 그런데 직접 그 악마들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은 그들의 이야기를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다. 면죄부를 여러 번 받은 악마들은 알게 됐다. 이 세상은 우리 같은 악귀를 단죄할 생각도, 그럴 방법도 갖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악마들은 살맛이 났고, 사람들은 죽을 맛이다. 이제는 보란 듯 대놓고 떼거리로 몰려다니며 백주대낮에 추악한 만행을 저지른다. 잡아보려면 잡아보라는 듯이. 최첨단 디지털 도술을 요리조리 써가며 말이다. 

    

사람이라면 어쩌면 저런 짓을 할 수가 있을까 생각해본다. 사람의 본질이 선하다는 성선설, 요즘 같은 일을 겪으면 틀린 말이 아닌가 싶다. 그렇다고 사람이 본디 악한 존재라는 성악설을 받아들이지도 못하겠다. 사람이 위기에 처하면 본색이 드러난다는데, 아무리 악한 상황이라도 사람의 탈을 쓰고 해서는 안 되는 짓들이 있기 마련인데, 모두가 상황으로 탓을 돌리지는 않는다. 여전히 성선설이 맞다 믿고 싶다.      


다산 정약용은 사람의 본질에 대해 좀 이색적인 견해를 갖고 있었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사람은 선한 본질도 악한 본질도 타고 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상황에 따라 그때그때 달라진다고 봤다. 명답이다. 사람의 본질이 하나로 규정할 수 없다는 것. 사람은 본디 타고난 본질을 죽을 때까지 이어가는 것이 아니라 숱한 상황에서 그때마다 달라진다는 것이다. 한 번 타고난 본질이 변하지 않는 게 아니라 상황, 환경, 맥락에 영향을 더 받는다는 것이다. 즉 선한 환경 속에 있으면 사람은 선해지고, 나쁜 환경에 처하면 사람은 악해진다고 봤다. 환경이 더 결정적이라는 말이다. 중요한 것은 선하니 악하니 하는 본질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선을 실천하느냐 악을 실천하느냐, 어떤 행동을 실천할지는 그의 뜻에 달려 있으니 어떤 실천을 하는지가 더 중요하다고 봤다. 이를 두고 성기호설이라고 한다. 선을 실천하는 것에는 그 사람이 처한 환경에 따라 그의 의지와 실천이 그 사람의 취향, 기호에 따라 달라진다고 봤다.     


한 명의 악마에 집중할 때가 아니다. 그 악마가 활개 치도록 내버려 둔 세상을 점검해야 한다. 악마의 서사를 중단하라는 요구가 빗발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개인의 삶을 조명할 때가 아니다. 그 일당들이 추악한 죄를 짓고도 아무런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 그런 사회를 수술해야 한다. 그들의 죄를 묻는 사법제도가 단호하고도 촘촘해야 한다. 솜방망이 처벌이라는 말 다시는 듣지 않길 바란다. 이런 추악한 짓을 하고도 세상의 단죄가 허술하다 보니 악마들이 창궐할 수 있었던 거다. 그 악마들이 활개 칠 수 있는 생태계 전반을 수술해야 한다. 이번에 명확하게 처벌하지 못하면 더 큰 악이 창궐하게 될 게 분명하다.      


영화 <헝거 게임>은 결국 영웅의 맹활약으로 지배체계를 무너뜨리며 끝이 났다. 영웅 한 명의 역할도 컸지만, 숨죽이며 제 목숨 하나 부지하기 버거운 삶을 살아야만 했던 힘 없는 보통의 시민들이 분노하고 연대하며 거대 악을 물리쳤다. 몇 년 동안 성착취 범죄에 대해 추적해온 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영웅적 노력 덕분에 이제야 제대로 세상 사람들이 이 범죄의 위험성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평범한 시민들이 분노하고 연대해야 할 때다. 제대로 힘을 보여줘야 할 때다. 솜방망이 사법체계를 바꿔야 한다.      


드라마 <방법>에 등장하는 방법사의 능력이 있었으면 좋겠다. 방법사들은 이름과 생년월일, 얼굴 사진으로 한 사람을 온몸이 오그라들게 해 죽이는 능력을 갖췄다. 지금 마음으로는 수십만 명 모두를 방법 하고 싶은 심정이다. 사지를 뒤틀어 자신들이 저지른 탐욕으로 피해자들은 겪은 고통이 얼마인지 조금이라도 알게 해주고 싶다. 현실 세계에서 방법을 할 수만 있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해보고 싶다.     


마음으로는 그들을 방법사들처럼 사지를 오그라뜨려 죽이고 싶지만, 현실적으로 그럴 순 없다. 우리는 그 범죄집단 일당들을 사법의 이름으로 ‘방법’ 해야 한다. 썩어빠진 생각, 추악한 행동들, 세상을 조롱하며 비아냥거리는 태도들, 그 모두를 이번에 사법의 틀로 단단히 ‘방법’ 해야 한다. 지금 우리가 만든 사법의 체계는 그들을 ‘방법’ 하기에는 너무 허술하다. 더 늦기 전에 당장 과할 정도로 사법체계를 바로잡아야 한다. ‘빨리빨리’라는 한국인의 특성, 이번 이 사건에도 최대한 빨리빨리 적용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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