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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am Aug 19. 2016

공부를 시작한 이유

서른 넘어 돌아보는 공부 인생

"너는 인마 대학원이나 가라. 그게 어울린다."


하루 종일 땀을 뻘뻘 내며 모교 앞 거리를 헤매고도 잠이 오지 않는 올해 여름. 다시 대학교 앞을 서성이는 요즘, 내가 이곳에 돌아온 이유를 생각해본다. 해를 좀 많이 거슬러 올라가 200X 년 여름 군대를 다녀온 4학년 남자라면 누구라도 그러하듯이 취업을 준비하고 있었다. 운 좋게 인적성 시험과 면접을 통과하고 대기업 인턴을 하면서 처음으로 기백의 월급이라는 것을 받아보고 인턴 동기들과 즐거운 합숙을 하면서 꿀 같은 5주를 보낸 그 해 여름은 대학생활 중 가장 보람찬 여름방학이었다. 그리고 개강을 2주 정도 남긴 8월에 나에 대해 가장 잘 안다고 말할 수 있는 고시생 동기를 만나 밥을 사고 커피도 샀다. 안 그래도 평소 스타에 절어있는 동기는 장기로 접어들기 시작한 고시생활에 더 절어있었다. 나름 직장에 대한 맛을 보고 온 사회의 선배로서 이것저것 말을 해주고 있을 때 녀석은 한 마디 말을 건넸다.


"넌 인마, 회사랑 안 맞아. 대학원이나 가. 그게 맞을 거야."


대학 생활 내내 나를 지켜봤고 같이 보낸 밤(?)을 셀 수 없을 정도였으니, 녀석의 말을 그냥 넘길 수는 없었다. 사실 입학하면서부터 지속적으로 공부하는 것과 유학에 대한 포부를 얘기해왔던 터라 내가 무엇이 되고 싶은지, 보다 정확히 무엇을 하고 싶은지 아는 사람의 말을 그냥 넘기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무슨 공부를 하고 싶은지, 많은 공부량을 감당할 수 있을지, 학비는 어떻게 대야 할지, 대학원을 진학한다면 해결해야만 하는 여러 가지 문제를 마주 보기 싫었던 그때 공부는 나중에 해도 되겠지 하는 마음으로 친구의 조언을 곱씹다가 뱉어버렸다. 그리고 당분간 돌아볼 일은 없을 거라고 여겼다.




"니 10년 뒤가 궁금하냐? 나를 봐. 그게 나야."


지금은 취직이 더 힘들지만 200X 년은 이태백이라는 말이 유행하기 시작했던 해였다. 이명박 정부의 출범과 함께 맞이한 글로벌 금융위기로 취직 시장의 문턱은 한없이 높아 보였고, 취업계의 서자는커녕 양인도 되기 힘든 비상경 문과생은 100개 가까이 서류를 작성해야 한 군데 정도 합격할 수 있었다. 나는 80개쯤을 썼을 때, 정말 운 좋게 추가합격으로 대기업 중 하나에 입사했고 졸업이냐 수료냐를 놓고 고민하지 않아도 돼서 정말 기뻤다. 비록 추가합격이라 일하고 싶던 부서로 가지는 못했지만 유사한 직무를 맡으며 나름 일도 만족스러웠고 급여도 쏠쏠했다. 대학생 때는 과외 네다섯 개는 뛰어야 벌던 금액을 월급으로 받고 학생에게 사치스러운 물건들도 척척 살 수 있었다. 신입사원 교육에서 만난 좋은 인연은 덤. 모든 게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좋았다. 직장과의 허니문, 딱 두 달이었다.


어느 조직을 가든 태양 같은 사람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부서 배치를 받은 첫날, 술을 못한다는 내 말에 썩은 미소를 짓던 그 사람은 생각보다 더 태양 같은 사람이었다. 옆 부서 사람들에겐 적당한 햇빛을 비추니 좋은 사람이었지만 같은 부서 사람들에겐 너무 뜨거워 다가가기 싫은 사람, 태양 같던 그 과장. 그가 위아래 가리지 않고 시시때때로 소리를 지를 때면 내가 직접 듣는 게 아니어도 머리가 아파 왔다. 부서 특성상 야근이 많아 아침 8시부터 밤 11시까지 보던 사람이 매일 두통을 제공하는 사람이니 미칠 지경이었다. 그리고 스스로 '가정적인 남편, 좋은 아빠'라는 구호를 달고 사는 그는 술자리를 참 좋아했다. 마시지도 못하는 나도 끌고 가 나를 제외한 모든 선배들에게 술을 강권하고 인사불성이 되기 직전쯤에야 자리를 파하곤 했다. 야근도 많고 주말 특근도 많았던, 소규모 회식은 종종 있었던 회사 생활은 어느새 피로로 가득 찼다. 그저 월급이 입금되던 19일에만 행복했던 기간이었다.


그런 직장생활에서 흡연타임은 곧 충전타임이다. 비흡연자였던 나였지만 선배들이 담배를 핀다고 하면 커피 한잔 들고 나가 최대한 연기를 피해 그들의 이야기에 응해주는 것은 신입사원의 도리였다. 늘상 과장에게 깨지던 선배도, 태양같은 과장도 나를 꼭 끌고 갔다. 둘이 가는 일은 없었다. 사이가 좋을 리가 없었으니까. 흡연타임은 약 10분 정도 되었는데 한 개비를 오래 피면서 시덥잖은 수다를 떠는 것이 핵심이었다. 한번은 과장과 함께 했던 흡연타임에서 그는 자신의 대학생활을 압축하여 들려줬다. 얼마나 술을 좋아했는지, 여자는 어떻게 만나서 결혼했는지 등등 자기 과거를 무용담처럼 늘어놓던 그는 문득 내게 물었다.


"너는 니가 어떻게 살 거 같냐? 너랑 나랑 나온 대학은 다르지만 회사는 같잖아? 부서도 같고. 니 10년 뒤가 궁금해? 나를 봐. 너도 이렇게 돼."


나도 10년 뒤에는 그처럼 태양 같은 사람이 될 수 있다니, 무서운 일이었다. 그냥 들을 때는 아무 생각이 없었지만 곱씹어보니 끔찍했다. 위아래 모르고 소리치는, 자기 부하직원에게는 한없이 뜨거운, 관계 없는 사람에겐 따듯한, 술로 부하들을 죽이는, 그러면서 가정적이라 말하는, 그런 태양 같은 사람. 되고 싶지 않았다. 잉여가 될 지언정 사람답고 싶었다.


그리고 두 달 뒤, 나를 붙잡던 햇살을 피해 직장을 관뒀다.




사람 냄새


1년 조금 넘게 다니다 직장을 뛰쳐나오니 당장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조직과 사람에 질린 그 때 재취업은 꿈도 꾸지 못했고 도망치듯이 댄 핑계, '대학원 진학'이 현실의 선택이 되었다. 이런 나를 보고 고시생 친구는 돌아돌아 제자리 찾는다고 놀려댔고,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커피만 마셨다. 언젠간 대학원을 갈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했지만 생각보다 그 시기가 매우 앞당겨졌으니까. 녀석의 말이 맞는 셈이었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대학원 진학을 선택하자니 어문계열을 피할 수 없었다. 제 2전공을 선택할 수도 있었지만 원전공에 대한 의무감 같은 것이 작용했던 것일까, 어문계열 대학원으로의 진학은 당연한 것처럼 여겨졌다. 어렸을 때 들었던 굶어죽기 딱 좋은 문사철 대학원생 그 길에 서게 되었다. 운 좋게 좋은 대학 대학원으로 진학했고 좋은 사람들을 만나 제 때 졸업하고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석사로는 부족했는지 박사 과정까지 밟고 있는 중이다.


박사 과정을 시작하면서 스스로 질문을 던졌다. 나는 왜 이 공부를 하고 있는가. 너무 늦은 때에 던지는 감이 있지만 그 답을 도출하는데 오래 걸리진 않았다. 비록 원전공의 영역을 벗어나지 힘들기에 어문계열을 전공하게 되었지만, 내가 언어를 공부하고 연구하고 싶은 이유는 단순하다. 사람이 알고 싶어서다.


언어는 인간의 천형 같은 것이다. 의미를 담고 의사소통을 하는데 사용되지만 메시지를 온전히 전달하기에는 그 시스템이 완벽하지 않다. 지구 상 존재하는 어떤 동물의 의사소통 수단보다도 우수한 전달체계이지만 우리의 의사소통 시스템은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그 오해의 책임은 언어에 있다. 사회적 동물로써 언어 사용을 피할 수 없지만, 인간은 언어를 쓰기 때문에 한계점을 갖는다. 인간에게 효용과 한계를 동시에 주는 이 언어에 대해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다면 인간에 대한 이해는 불가능할 것이다. 


모든 문사철 과목, 넓게 보면 모든 학문이 그러하듯 언어학은 인간을 이해하기 위한 학문이다. 그리고 나는 이 학문의 사람냄새때문에 공부하고 싶고 연구하고 싶은 것이다. 언어는 사람 냄새가 깊이 베인 축복이자 저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제 그 이야기를 시작하고자 한다. 언어와 사람, 사회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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