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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am Jan 24. 2017

영어로 리딩 하기?

리딩(Reading)에 대한 소고 1

리딩의 중요성

우리는 일평생 영어공부에 대한 강박증을 가지고 살아간다. 멀리서 찾을 것 없이 각자의 경험에서 꺼내보면 영어가 인생에서 얼마나 중요했는지 찾아보면 쉬이 알 것이다. 먼저 나의 경험을 꺼내보면 내 첫 영어공부는 5학년 때였다. 아직 정규 영어교육은 중학교 1학년이 시작이었던 때였지만, 당시 집안 사정에 맞춰 학원은 못 다니고 학습지로 시작한 영어공부, 처음 배운 단어는 ant였다. 두 번째 단어는 vest였으며, 당시 교재에서 가장 어려운 단어는 elephant였다. 몇 개의 단어가 기억날 정도로 선명했던 영어교육의 시작은 12살이었다. 당시 정규 영어교육 시작 나이가 14살이니, 현 기준으로 따지면 초등학교를 입학하면서 영어공부를 시작한 셈이다(현재의 영어 조기교육 나이를 생각하면 이도 상당히 늦은 나이다).


그렇게 단어와 그림을 맞춰가면서 외우기 시작한 영어공부는 말 그대로 '공부'였다. 이쯤에서 대학 친구들의 사례를 비교해보자. 친구 A는 초등학교 과정을 미국에서 나왔다. 상당히 이른 시기에 영어 조기교육을 받은 셈인데, 굳이 현재에 적용해보자면 미국에서 태어나는 정도가 아닐까. 아무튼 그렇게 미국에서 초등학교를 나온 그는 한국어보단 영어를 더 잘하고, 남들처럼 회사를 다니기도 했었지만 현재는 영어에 관계된 일로 밥을 먹고사는 프리랜서로 살고 있다.


다소 극단적인 예를 비교했지만, 이러한 한국에서만 영어를 공부하는 사람과 현지에서 영어를 습득하는 사람의 영어실력 차이는 단순히 시간으로 비교할 만한 것이 아니다. 같은 나이에 시작해도 하루 1~2시간 공부하는 아이와 24시간 영어에 노출되어 사는 아이의 차이는 굳이 필설로 풀어낼 필요가 없다. 이 차이를 완전히 극복하는 방법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래도 이러한 것을 극복해내는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 영어교육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할 일이다. 지금은 비록 그 길에서 엇나 있지만, 한 때 공교육 혹은 사교육의 경계를 오가며 일했던 경험을 통해 볼 때 가장 좋은 공부법 솔류션을 제공하는 것이 바로 교사가 할 일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 A의 영어공부 케이스를 좀 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한국으로 돌아온 그가 영어 실력을 오히려 더 상승시켰던 방법은 바로 리딩이다. 영어소설을 읽는데 취미를 붙인 것, 그것이 영어에 대한 감각을 잃지 않고 강화시킨 비법이다. 그리고 외국어를 잘 하는 방법은 '리딩'만이 유일한 방법이라는 외국어 교육전문가 스티븐 크라센의 말을 상기한다면, 리딩 만이 살 길이다.




내 공부 경험: 영자신문, NYT vs. KT

'영어로 된 글을 많이 읽어야 한다.' 굳이 사례를 들어 풀어냈지만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모두가 아는 중요한 격언이다. 여기서 이 결론을 끝나버리면 이러한 글은 쓸 필요도 없으며 지면만 아까울 뿐이다. 진짜로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다른 것이다. 정말로 영어로 글을 읽으면 영어실력이 향상될까?


당연한 말을 질문으로 던지는 어리석음이 아니다. 이 질문은 이렇게 읽어야 한다. '정말로 내가 영어로 된 글을 영어실력이 향상될 만큼 꾸준히 읽을 수 있을까?' 여기에 대답하지 못한다면 당신은 실패할 것이다. 한두 번은 어떻게 해낼 수 있겠지만, 그 이상은 어려울 것이다. 왜냐하면 어떤 상황에서든 영어는 지금의 우리에게 '공부해야 하는' 대상이다. 공부를 '공부'가 아닌 유희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아닌 이상, 당신은 실패할 것이다. 나처럼.


학부생 시절, 영어를 공부해야겠다는 사명에 영어로 된 글을 골라야 했다(어찌 됐든 영문과생으로 살아남아야 한다는 절박감이었다). 장편소설같이 긴 호흡의 글보다는 신문기사나 칼럼 같은 짧게 끊을 수 있는 글을 선호하는 나의 성향을 고려하여, 내가 선택한 영어 교보재는 영자신문이었다. 이는 영문과의 경험이 담긴 선택이었다. 영자신문은 일단 어휘가 격식적인 어휘를 사용하며(한마디로 수준이 높고), 글쓰기에 대한 교육이 철저한 기자들이 쓰는 것이므로 논리적으로 완결성이 뛰어나며, 내가 흥미 있는 분야를 선택해서 본다면 재미를 잃지 않을 수 있다. 이론적으로 완벽한 선택이라고 생각하며, 당시에는 완전히 무료였던 뉴욕타임스에 접속해 표제만을 보고서 나에게 흥미로울 기사들을 골라서 읽었다.


당시의 내 영어실력을 설명하자면, 비록 영문과생이 된 지는 1~2년에 불과했지만 수많은 과제와 싸우면서 학술적 글쓰기가 단련이 되어있었고, 수업을 이해하기 위해 (학부생 수준의) 언어학 서적들과 영미 고전 시/소설을 독파하기 위해 처절한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다른 부분은 몰라도 독해만큼은 자신을 가졌던 시기였다. 하지만 그 자신감은 금세 깨졌고, 시쳇말로 멘붕에 빠져버렸다. 뉴욕타임스의 글은 그 악명(?)대로 길었고, 글자 그대로 50% 정도만 이해할 수 있었다. 문장은 해석할 수 있었으나, 문단 전체에 대한 파악은 안갯 속을 걷는 듯했고, 전체 글에 대한 파악은 하나도 하지 못했다. 뉴욕타임스와의 첫 결투에서 완패를 당한 것이다.


이렇게 바로 실패를 하면서 '나는 안돼'라고 접을 순 없었기에, 차선책으로 생각해두었던 코리아타임스(KT) 기사를 긁어 출력해 보았을 때는 또 전혀 달랐다. 평소 수업 원서를 볼 때보다도 술술 읽히는 것이 놀라울 지경이었다. 분명 내가 모르는 단어들이 있었지만 굳이 찾을 필요가 없었다. 단어 뜻에 대한 추측은 자연스러웠고, 전체 내용 파악이 끝난 뒤 사전을 찾아봤을 때 그 추측은 크게 빗나가지 않았다. 정말로 효율적인 독해를 했고, 사라졌던 자신감은 다시 돌아왔다. '내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NYT가 너무 어려운 거야'라는 정신승리는 덤이었다.




내게 맞는 글을 찾기(1)

그때는 그저 이상한 경험 정도로 여겼지만, 사실 가방끈이 좀 더 길어지고 영어교육과 언어학의 경계에 서성이는 공부노동자의 시각으로 보면 이 경험은 단순히 '이상한' 경험으로 치부하긴 어렵다. 먼저, NYT와 KT의 단어 사용 수준은 차이가 나긴 하지만 내가 겪은 만큼 '못 읽을 정도', 혹은 '술술 읽히는' 차이를 보일 만큼은 아니다. 아무리 쉽다 해도 KT 역시 영자신문이며, 일상 구어에서 접하기 힘든 학술적 용어도 많다. 두 번째, KT의 문장 구조나 문단 구조 역시 단순하다기보다는 원어민들이 쓴 것만큼이나 격식성이 있으며 복잡하다. 세 번째, KT의 글도 한국인 기자만 쓰는 것도 아니며 원어민들의 칼럼이나 오피니언이 수록되어 '한국적'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종합하자면 NYT 만큼은 아니겠지만 KT 역시 영어텍스트로 훌륭하며, 만만하게 볼 대상은 아니다. 그렇다면 그 당시 나는 왜 그리 극과 극의 경험을 했던 것일까.


당시 내가 공부했던 글을 찾기란 어려운 것이니 몇 가지 짐작 가는 포인트를 짚어보자면 다음과 같다.


첫 번째, 당시 나의 단어 실력은 KT와 NYT 사이 지점에 위치해 있었다. 위에서 KT 역시 소위 고급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고 했지만, 그 숫자나 어려움의 정도는 NYT와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차이가 나는 지점에 내 단어 실력이 위치해 있었다. 이제 막 2차 함수를 풀 수 있는 학생에게 3차 이상의 고차 함수 문제는 어렵듯이 내 단어 수준은 'KT는 할 만하고, NYT는 버거운' 그 수준에 있었다.


두 번째, 주제가 너무 생소했다. 아무리 내가 표제를 읽고 흥미가 가는 기사를 골랐다고 해도, NYT가 다루는 내용에 대한 배경지식은 너무 부족했다. 똑같이 정치기사라고 해도 보통의 한국인이 미국 정치에 대해 가지는 이해도와 한국정치에 대한 이해도는 차이가 크다. 변함없이 미국 정치에 대한 관심이 있다곤 해도 그건 '외국인으로서' 갖는 수준이지, NYT를 구독해서 보는 독자들만큼 가질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반면에 한국 정치에 대한 기사는 좋든 싫든 배경지식이 풍부했고 기사를 읽어가면서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다음 내용을 추측할 수 있을 수 있었다. 즉, 배경지식에 대한 차이가 너무 현격했다.


세 번째, 길이의 차이가 컸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NYT의 기사는 길고 자세하기로 유명하다. 이것은 저널리즘 수업에서 배운 것이지만 그것이 NYT의 특징이라고 할 만큼 아주 심도 있게 주제를 다루기로 유명하다. 평소 짧은 글을 즐겨 있는 나의 호흡으로 NYT의 기사는 상대하기 힘들었다. 반면에 KT의 길이는 한국 기사 수준이었다. 편히 읽을 수 있는 길이였던 것이다. 가뜩이나 보다 수준 높은 단어, 부족한 배경지식으로 공부의 의욕이 줄어든 상황에서 말도 안 되게 길어 보였던 NYT의 기사와 달리, 적당한 수준의 단어+풍부한 배경지식은 KT의 기사를 더 만만하게 보도록 만들었다. 이런 편안함은 KT 기사를 더 쉽게 보는 요인이 되었다.




나를 잘 안다는 것(1)

결론적으로 KT는 내게 아주 적합한 상대였고, NYT는 너무 버거운 상대였다. 호기롭게 NYT로 뛰어들었던 것은 나의 자만심이었으며 나 자신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했던 것이다. 주제의 선택에서도, 단어 수준에서도, 글의 길이에 대해서도 그저 막연하게 생각했던 것이 결국 실패로 가게 만들었다. 그저 영어다운 영어를 찾겠다는 호승심으로 NYT를 선택했고, 바로 실패했으며 그 후 KT를 시도하지 않았다면 그 당시 나의 영어 공부는 완전한 실패로 돌아갔을 것이다. 즉각적인 실패 후, 바로 나 자신의 수준에 글을 찾을 수 있었던 것, 그것이 일정기간 영어공부에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다. 단어 수준, 좋아하는 분야와 배경지식, 내 리딩 타입에 맞는 길이의 글을 찾는 것, 곧 나 자신을 잘 파악하는 것이 영어공부와의 싸움에서 승리로 이끄는 길이라는 것이 경험으로부터 배웠던 교훈이었다. 


즉 '나 자신을 알아야 한다.' 그래야 영어공부에서도 성공할 수 있다. 그럼 어떻게 하면 나 자신을 알 수 있을까. 그것은 '리딩에 대한 소고 2'에서 다루기로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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