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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호랑이 Oct 02. 2016

바츨라프 광장의 센치한 밤

#바츨라프 광장  #국립 박물관 #안녕, 프라하


19.


눈부신 햇살이 오늘도 나를 감싸면
살아있음을 그대에게 난 감사해요



"목소리 듣고 싶을 때 듣게, 노래 좀 불러줘."

"아 싫어, 부끄러워. 보이스톡 하면 되잖아."

"시차 때문에 전화 못 할 수도 있잖아. 시~작!"


공항으로 가는 차 안에서 남자친구가 불러준 노래를 들으며 오페라 극장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숙소에서 잠시 눈을 붙인다는 게 세 시간 넘게 자버렸고, 대학생으로 돌아가 캠퍼스를 거니는 꿈을 꾸는 바람에 또다시 한국앓이가 시작되는 듯했다.

'이놈의 변덕, 도대체 하루에 몇 번 바뀌는 거야.'

남자친구가 녹음해준 노래들을 번갈아 들으며 청승맞은 감상에 젖어 있었다. 오페라 극장에 도착하자, 늑장 부린 나를 약 올리는 듯 이미 시작한 공연이 스크린에 나오고 있었다.


20.

"오늘 저녁에 다 같이 삼겹살 파티할 거니까 올 수 있으면 와요."

민박집 아주머니가 해준 말이 떠올라 다시 숙소로 돌아가려다, 프라하에서 보내는 마지막 밤을 만끽하기로 했다. 좀 더 머무르고 싶었지만, 오스트리아를 거쳐 헝가리까지 가는 일정을 맞추기 위해서는 내일 떠나야 했다. 새 학기, 이제 막 마음을 열기 시작한 짝꿍이 갑자기 전학 간다는 말을 들었을 때처럼 섭섭했다. 발길을 돌려 바츨라프 광장으로 향했다.


"와, 진짜 넓다. 세종대왕 동상 있는 광화문이랑 완전 느낌 비슷한데."

혹시나 하는 마음에 검색해보니, 실제로 바츨라프 광장을 모티브로 광화문을 만들었다는 글이 있었다. 기마상 뒤에는 국립박물관이 은은한 조명을 받으며 늠름하게 서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우람한 어깨를 가진 경호원이 바츨라프 광장에 절대 나쁜 일이 생기지 못하도록 지키고 서 있는 것 같았다. 모두가 극찬하는 블타바 강 야경을 보러 가는 대신 국립박물관 난간에 자리를 잡았다. 지금 내게 필요한 건 화려한 색조 화장을 하고 유혹하는 블타바 강의 야경이 아니라 우직하게 지켜줄 국립박물관이었다.


바츨라프 광장, 경복궁에서 광화문대로를 내려다보는 느낌이었다


21.

난간에 기대어 앉아 있으니 바츨라프 광장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바쁘게 오가는 자동차와 사진 찍는 관광객들, 불 켜놓고 영업 중인 가게들이 바로 눈앞에 보였지만 내가 앉아 있는 곳은 다른 시공간에 존재하는 듯 바람 한 점 불지 않고 고요했다.


'누군가 혼자 다니는 여행이 이렇게까지 외롭다고 미리 알려줬다면 여기까지 왔을까? 가까운 일본이나 동남아도 아니고 유럽까지 혼자 올 상상이나 했겠냐고. 하긴 뭐, 그걸 누가 말해준다고 알겠어. 이렇게 와서 직접 경험하지 않으면 평생 모르는 거지. 그러니까 여기까지 온 건 정말 잘한 거야.'


혼자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는데 한 남자가 이쪽으로 걸어왔다. '설마 나한테 오는 건 아니겠지'라고 생각하며 애써 태연한 척 하고 있으니 조용히 옆으로 지나갔다. 정말 갔는지 확인하려고 뒤돌아보는 순간, 지나간 줄 알았던 남자가 갑자기 나에게 달려왔다.

"악!"

난간에서 뛰어 내려와 반대편으로 내달렸다. 정신 없이 달리다 관광객이 모여 있는 광장에 도착해 속도를 줄였다.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숨을 고르며 무슨 일이 있었는지 되짚어 보았다. 그냥 지나친 줄 알았던 남자가 가다 말고 뒤돌아서 손을 내밀며 나에게 다가왔다. 그 순간, 난간 밖으로 밀어버리려는 줄 알고 겁에 질려 도망쳤던 거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돈을 달라는 의미로 손을 내민 것 같았다. 해치려고 한 게 아니라는 생각에 마음은 놓였지만, 너무 놀라 쿵쾅대는 심장은 쉽게 진정되지 않았다.

프라하에는 깨끗한 옷을 입고 건강하게 걸어 다니며 동전을 구걸하는 사람이 종종 있었다. 이번에도 평범한 옷차림에 돈을 구걸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던 거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은 조금 전 이어폰을 꽂고 노래를 흥얼거리며 걷던 그 거리가 아니었다.

"숙소 사람들이랑 삼겹살이나 구워 먹을걸 그랬나. 뭘 좀 느끼고 마음 단단히 먹으려고 하면 일이 터지냐고."

혼자 궁시렁대며 앞에 보이는 숙소까지 뛰어갔다.




ps.

지나고 보니 프라하는 정말 안전한 나라였습니다. 사람들도 순하고 겁먹을 필요가 전혀 없었죠.

혼자 해외여행 가는 건 처음이었고, 그것도 머나먼 유럽이라 지나치게 주변을 경계했던 것 같아요.

언젠가 다시 프라하에 가게 된다면, 그때는 마음을 활짝 열고 많은 친구들을 사귀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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