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쓰는 호랑이 Oct 03. 2016

동화 속 마을, 체스키 크룸로프

22. 

"헝가리에 가면 이건 꼭 사야 돼. 관절 아플 때 바르면 효과가 직방이라니까. 다른 데서는 사고 싶어도 못 사요. 잊지 말고 사진으로 찍어 가."

유럽여행 셋째 날, 체스키 크룸로프로 떠날 준비를 마친 나에게 주인 아주머니는 헝가리에 가면 관절약은 무조건 사야 한다며 신신당부했다. 내가 며칠 더 머무르는 줄 아셨는지, 이미 캐리어를 문 앞에 내놓은 내 팔을 끌어 앉혀놓고 이것저것 알려주었다.

"그리고 헝가리 야경은 꼭 봐야 돼. 난 프라하보다 헝가리 야경이 더 좋더라고. 유람선 타고 구경하면 정말 환상적이야."

오스트리아는 가본 적이 없으신지, 아직 가려면 한참 남은 헝가리에 대한 설명만 잔뜩 해주시곤 문 앞까지 배웅해 주었다.

관절약은 결국 사지 못했다..

체스키 크룸로프는 당일치기로 다녀와도 충분한 아주 작은 마을이라고 했다. 원래 계획은 프라하에서 잘츠부르크로 바로 이동하는 거였는데,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하는 여행지에 소개되었길래 급하게 일정에 끼워 넣었다. STUDENT AGENCY 버스 정류장으로 이동하기 위해 민트색 가게에 들러 트램 티켓을 끊었다. 어제 한 번 타보았다고 제법 익숙하게 티켓을 끊고 트램에 오르는 내 모습이 기특했다. 

'며칠만 더 있으면 현지인 다 되는 거 아니야? '

아쉬운 마음에 혼자 실없는 생각을 하며 마음을 달랬다. 창문에 얼굴을 바짝 갖다 대고 차창 밖으로 지나가는 풍경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프라하 안녕. 언젠가 또 보자."



23. 

정류장에 도착하니 웬 남자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실성한 듯, 허공에 대고 삿대질을 하며 목청 끊어지게 고함을 질렀다. 그런 그의 모습을 예의 주시하며 캐리어를 끌어안고 벤치에 앉아 있는데, 나이 지긋한 할아버지가 한마디 했다.

"무언가에 불만에 많은 사람인가 보군. 참 안됐어, 안 그래요?"

He must be very angry at something. What a poor man, don't you think?"

깜짝 놀라 돌아보니, 부인이 아무런 대꾸가 없자 나에게 말을 건넨 듯했다.

"네, 그런 거 같아요. 조금 무섭네요."

Yeah, he must be. It's kind of scary.

잠시 대화를 나누어보니, 은퇴 후 방방곡곡 세계여행을 다닌지 5년이 되어 간다고 했다. 몇 년 전에는 한국에도 가보았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정말 아름다운 나라였어. 언젠가 한 번 더 가고 싶다니까."

Korea was such a beautiful country. I loved it. Hope we could visit again someday.

그들도 체스키 크룸로프에 간다며 티켓을 보여주는데, 나보다 20분 일찍 출발하는 버스였다.

"이거 제거보다 빠른 버스표 같은데요. 지금 도착한 버스 아니에요?"

Your bus starts earlier than mine. Isn't that your bus?

두 사람은 그제야 헐레벌떡 짐을 챙겨 고맙다는 말을 남기고 버스에 올라탔다. 이번에야말로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재미있는 여행 친구를 만나나 기대했는데, 그렇게 짧은 대화를 끝으로 다시 만나는 일은 없었다. 


여행 중에 만난 사람과의 대화는 한 사람에 대한 자서전을 읽는 것처럼 흥미롭고 재미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짧다는 걸 알기에 살면서 겪은 일의 엑기스 중에 엑기스만 들려주어 지루할 틈이 없다. 푹 빠져 읽고 있던 책의 결말을 알지 못한 채 평생 덮어 두어야 하는 것처럼, 짧은 만남 뒤 헤어지는 순간은 한없이 아쉽다. 마음 착한 두 부부가 아직도 세계여행을 다니고 있을지 궁금하다.



24. 

드르륵- 드르륵 - 

버스에서 내린 사람들이 각자 캐리어를 끌고 마을로 이동했다. 숙소로 가는 길이 너무 예뻐 계속 사진을 찍는 바람에 도착하기까지 한참 걸렸다. 옹기종기 모여 있는 붉은 지붕의 건물들을 잔잔한 강물이 휘어 감고 있었다.



우르르 몰려가던 사람들이 하나둘 숙소를 찾아 빠지는 동안 나 혼자 끝까지 남아 캐리어를 끌고 있었다.

"아, 내 숙소는 왜 이런 게 먼 거야. 도착하기도 전에 지치겠네.'

더 이상 감탄할 힘도 없이 인내심의 한계를 느낄 때쯤, 사랑스러운 게이트와 간판이 보였다.

Hostel Postel

친절하고 아늑한 호스텔이라는 칭찬 일색의 후기를 보고 고민 없이 예약한 곳. 문을 열고 들어가니 기대 이상이었다. 야외에 테이블과 파라솔이 꽂혀 있었고 상냥한 직원이 밝게 웃으며 맞아 주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다음 날 오후에는 진짜 잘츠부르크로 떠나야 했지만, 체스키 크룸로프와 사랑에 빠져버린 나는 미리 짜둔 루트는 잊어버린 않은 채 그 자리에서 하루 더 묵겠다고 말해버렸다.

개인 램프가 있어서 잠이 안 오는 저녁에도 조용히 혼자 깨어있을 수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바츨라프 광장의 센치한 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