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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르테나 May 11. 2018

<라이크 크레이지> 에로스의 결말, 혹은 새로운 시작.

<라이크 크레이지>를 보고 극장을 나오는 순간, 데미안 라이스 음악이 생각났다. 부드럽지만 쓸쓸한 느낌 , 사랑에 대한 사색들을 펼쳐 놓는 그의 음악들... 딱히 어떤 노래가 떠올랐다기 보단, 그 음악적 분위기가 떠올랐던 것 같다. '강렬한 사랑의 추억, 제어할 수 없이 이끌리는 마음, 혼란스러운 생각의 파편들, 차분하지만 강렬한 내면적 고뇌가 느껴지는...' 데미안 라이스 음악과 영화 <라이크 크레이지>는 꼭 닮아 있다!



1. 미칠 듯이(Like Crazy)

포스터에도 있듯이, '라이크 크레이지'는, 격정적인 사랑의 감정을 표현할 때, 자주 사용하는 말이다. 그래서인지, 영화는 초반부터 사랑의 격렬한 감정을 드러내며 미칠 듯이 서로를 원하고, 미칠 듯이 사랑하며, 미칠 듯이 그리워하는 연인들의 모습을 그려낸다. 서로에 대해 알아가며 대화를 나누는 장면은 첫 데이트에만 등장할 뿐, 사랑이 깊어지는 과정은 대부분, 애나와 제이콥이 장난치며 스킨십하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이를 통해 영화는, 초기 연인들의 친밀한 행복감을 뛰어넘어 미칠 듯한 사랑의 감정으로 빠르게 진입해 들어간다.


재미있는 것은, 리얼한 사랑 이야기를 하는 영화에, 수백 컷 이상의 스킨십과 침대 위 장면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흔한 섹스 신 하나가 없다는 점이다. 대신, 애나와 제이콥의 열정적 사랑은, 침대 위에 함께 잠들어있는 수많은 날들의 몽타주가 빠른 음악과 함께 연출되어,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고 있다. 특히 이 장면은, 한시도 떨어져 있기 싫은 연인들의 미칠듯한 사랑을 보여 줄 뿐만 아니라, 이후에 드러날 영화 속 주된 갈등, 즉 비자 만료 기간을 넘겨, 더 이상 미국에 올 수 없는 애나의 위기를 촉발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기도 하고, 후반부에 드러나는 영화 주제적 측면에서, 애나와 제이콥의 에로스적 사랑을 증명하는 풍성한 근거가 되기도 한다.



애나와 제이콥의 미칠 듯한 사랑 장면에 등장하는 다양한 스킨십들 중에서 가장 주목해 봐야 할 것은 애나의 발이다. 본격적으로 사랑을 시작한 바닷가 데이트신에서 해질녘, 모래사장 난간에 앉아 쉬고 있던 애나가 맨발로 제이콥의 맨발을 건드리며 장난치는 장면은 매우 감각적이면서 자연스럽게 다음 장면의 침대 신으로 이어진다. 하얀 이불속 애나의 발이 제이콥의 발에 가 닿는 것으로 시작하는 침대 장면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별다른 섹스 장면 없이도, 두 연인의 성적 결합에 대한 이미지로 받아들여진다. '발'은 아주 오랜 옛날부터 '성'에 대한 상징이었고, 남녀가 성적으로 끌리는 신체 부위 1위가 발이라는 연구 결과도 있으니, 맨발이 겹쳐지는 이미지로 촉발되고 상징화되는 베드 신은 감각적 은유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중에서도, 영화 속 '발'이 등장하는 가장 상징적 장면은, 영화 결말 부분, 비자 문제가 해결되어 미국의 제이콥에게 돌아가는 비행기 안 애나의 '맨발 이미지'다. 제이콥과 결혼해서도 비자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크게 싸우고 미국과 영국에 떨어져 남남처럼 살고 있던 애나. 어느 날 갑자기 비자 문제가 해결되지만, 어떻게 할지 망설이는데, 새 애인 사이먼이 청혼하자 제이콥에게 돌아갈 결심을 한다. 제이콥이 있는 미국행 비행기를 타서도 복잡한 심정이 엿보이는 애나. 영화는 그녀의 혼란스러운 표정과 함께, 신발 벗은 하얀 맨발을 단독 커트로 보여준다. 발이 상징하는 성적 이미지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비행기 안 장면에, 그것도 애나가 심리적으로 가장 혼란스럽고 복잡한 상황에서, 감독은 애나의 하얀 맨발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도대체 왜 감독은 이 한 컷을 집어넣은 것일까?


그것은, 애나가 제이콥에게 돌아가는 이유를 은밀하게 설명하기 위해서다. 앞에서도 언급했다시피, 애나와 제이콥의 미칠 듯한 사랑의 모습은 대부분 스킨십 에피소드로 이루어져 있다. 특히, 둘이 처음 관계를 맺는 장면을 촉발시킨 애나의 맨발은 순수한 사랑을 향해 돌진하던 그녀의 미칠 듯한 사랑의 정서, 에로스를 대변한다.  애나와 제이콥을 한때 미칠 듯 사랑하게 만들었던, 격렬하면서도 순수한 에로스적 교감은 그들 가슴속 깊숙한 곳에 여전히 남아 있어, 오랜 시간 떨어져 있어도 미칠 듯 그리워하게 만들고, 새로운 애인들마저 결국 떠나게 하며, 오랜 방황 속에서도 다시 서로를 간절히 찾게 만드는 구심력의 핵이 되고 있는 것이다. 애나가 제이콥에게 결혼에 대한 확신이 든다며 전화하는 내용을 살펴보면, 두 사람에게 있어, 에로스적 교감이 얼마나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는지 명확히 알 수 있다.

내 삶을 지속할 수가 없어!
...
우리가 나누었던 감정이
다른 누구와도 생기질 않아.
우린 함께 해야 해! 난 그걸 강하게 느껴!
 

2. 인내(Patience)

미칠 듯이 뜨겁게 사랑하는 연인에게 떨어져 지내야 하는 두 달이란 시간은 영원처럼 긴 시간이었나 보다. 결국, 미국 채류 비자의 기간이 만료되든 말 든, 사랑에 빠져 있던 애나는 2달 동안 헤어져 인내해야 하는 상황을 거부하면서 더 큰 시련을 맞게 된다. 결혼으로도 해결되지 않던 비자 문제 때문에, 미국과 영국에 계속 떨어져 지내야 하는 애나와 제이콥. 사랑이 깊은 만큼, 외로움도 깊을 것을 알기에, 애나는 떨어져 지내는 동안 각자 다른 사람을 만나도 상관하지 말자는 제안을 한다. 처음엔 펄쩍 뛰던 제이콥도, 먼저 제안한 애나도, 떨어져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각자에게 애인이 생기게 되고, 그들의 삶은 애증이 뒤섞인 혼란 속에 빠지고 만다.


에로스적 사랑에 빠져있던 애나와 제이콥에게, 함께하지 못하는 괴로움은 미국과 영국의 먼 거리만큼이나 크게 느껴졌을 것이다. 하지만, "인내엔 보상이 따른다"는 사이먼의 말처럼, 애나와 제이콥이 두 달의 시간을 인내했다면, 아니, 그 후라도 외로움과 싸우며 서로에 대한 사랑의 신뢰를 지키기 위해 인내했더라면 어땠을까? 미칠 듯이 격렬한 그들의 에로스적 사랑에, 굳건한 믿음과 애틋한 그리움이 더해지면서 서로를 더욱 소중히 여기는 간절하고 성숙한 사랑으로 키워 낼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인내'라는 키워드는 영화 속 상황에서 매우 의미 있는 단어가 된다. '인내'라는 요소는 그들이 흠뻑 빠져있던 에로스적 사랑에, 플라토닉, 또는 아가페적 사랑을 결합시켜 보다 성숙한 사랑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마법의 열쇠가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제이콥이 애나에게 선물한, 인내라는 글씨가 세겨진 팔찌


3. 몸을 씻다(Shower)

넓은 땅만큼이나 휑한 LA 풍경과, 작업실을 겸하는 제이콥의 집은 애나에게 매우 낯설기만 하다. 좋아하는 일을 하며 영국에서 안정된 생활을 했던 애나는, 미국에서 좋아하는 일을 찾을 수 있을지 조차 알 수 없는 불안한 상황이다. 제이콥도 불안하긴 마찬가지. 애나와 결혼은 했지만 떨어져 지낸 시간이 길었고, 자신에게 헌신적이기까지 한 사만다와 헤어지며 애나를 받아들였다. 사만다와 함께 했던 편안하고 행복한 생활을 애나와 함께 할 수 있을지 그 또한 미지수다. 그래서 둘은 서먹하다. 서먹함을 없애려는 듯, 애나와 제이콥은 함께 샤워하며 서로를 안아 본다. 서로를 느끼며, 처음 만났던 대학시절 순수했던 모습을 회상하는 애나와 제이콥. 여전히 '인내'란 글씨가 세겨진 팔찌를 하고 있지만, 어색한 느낌은 가시지 않고, 애나가 먼저 샤워장을 벗어난다. 샤워장에 혼자 남은 제이콥은 생각이 복잡하다.


영화는, 둘의 사랑이 다시 시작된다거나, 헤어질 것이라는 그 어떤 암시도 주지 않은 채 샤워하는 장면으로 끝이 난다. 열린 결말이자, 상징적 결말이다. 어쨌든, 애나와 제이콥은 각자의 새 애인들을 정리하고, 함께 다시 시작하기로 했다. 그들이 떨어져 있던 시간만큼 너무나 달라져 버린 서로가, 사랑을 회복하고 함께하기 위해선, 인내하지 못해 벌어진 일들을 모두 잊고 새로 시작해야 한다. 물로 깨끗이 씻어내듯 과거의 기억을 정화하는 작업이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영화의 마지막은 그들이 함께 사랑을 나누는 장면이 아니라, 함께 샤워하는 장면을 보여준다. 샤워기의 물을 함께 맞으며 새로운 시작을 위한 정화와 재생의 의식을 치르는 것이다.


그들이 어떤 선택을 하게 될진 알 수 없다. 샤워장 공간의 푸른색처럼, 차갑게 식어버린 사랑을 확인하고, 각자의 삶으로 되돌아 갈 수도 있고, 끊어진 '인내' 팔찌를 기어이 이어 붙인 애나의 의도처럼, 서로를 인내하며 기어이 사랑을 재생시킬 수도 있다. 다만 확실한 건, 순수했던 대학시절의 에로스적 사랑은 끝났다는 점이다. 그들이 샤워를 하며 순수했던 시절을 회상하고 그리워하는 것은, 이미 그들이 그 시절 에로스적 사랑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에로스적 사랑의 종말을 느낀 애나와 제이콥은, 지금 선택의 갈림길에 서있다. 이제는 끝나버린 에로 사랑 앞에, 인내로 시련을 극복하며 성숙한 사랑으로 발전해 갈 것인가? 인내하지 못해 벌어진 실수를 또다시 반복하며, 차가운 이별을 맞을 것인가?

<라이크 크레이지>의 마지막 샤워 장면은 감독이 관객들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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