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스타는 빠와 까를 모두 미치게 한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고깃집에서 자연스럽게 냉면을 시켰다. 세상 황홀하던 고기의 첫 점의 감동이 까맣게 잊혀져 갈 때쯤, 달콤 시큼한 물냉면을 시키면 더 못 먹을 것 같던 고기도 몇 점 더 맛있게 먹게 되고 시원한 국물을 후루룩 들이켜면 입안에 가득 남았던 조금 불쾌한 기름기는 사라진다. 그러고 나면 그제야 '고기를 다 먹었다.'라는 마침표가 찍힌다.
하지만 여름에는 그런 냉면이 한시적으로 주연급으로 올라선다. 한국의 피부가 따가울 정도의 여름더위에 주연이었던 고기는 뒤로 밀려나고 시원한 냉면만이 오롯이 떠오른다. 당당히 주연이 된 냉면은 '만두'라는 조연을 대동하지만 자신이 조연이었을 때 맡았던 '피날레'역할만은 절대 내주지 않는다.
2012년 즈음, 꽤나 긴 지방생활을 마치고 서울생활을 시작했을 때, 간간히 맛집에 관한 연락을 주고받았던 친구가 잡담 중 내게 물었다.
"너 평양냉면 먹냐?"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했다. 당시만 해도 평양냉면=물냉면, 함흥냉면=비빔냉면이라는 인식이 만연했다. 하지만 그 친구는 새롭게 유행하는 음식을 재빨리 먹어보는 '얼리어먹터'라고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저 한심해 보이는 질문에 무슨 의미가 담겨있을까 고민했다. 대충 '먹는다'며 답을 얼버무리고 재빨리 인터넷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주 신기한 광경을 목격했다. 온라인의 여러 페이지에서는 '평양'냉면을 두고 호평과 혹평이 난무했다. 호평하는 이는 혹평하는 이에게 짜고 단맛에만 혀가 절여져 '슴슴한 맛'을 모른다며 무시했고, 혹평하는 사람은 호평하는 이에게 '걸레 빤 물'이 뭐가 맛있냐며 혹시 맛이 느껴지지 않는데 애써 맛을 느끼는 척하는 것 아니냐며 비난했다.
과연, 너무 먹어보고 싶었다.
집에서 가장 가까운 평양냉면집을 검색했다. 어린이대공원 근처에 역사 있는 평양냉면집을 찾아냈다.
'서북면옥'
그리고 바로 찾아갔다. 여름이라 꽤나 긴 줄이 있었고 번호표를 뽑았다. 점심시간이 지났지만 서있던 꽤나 긴 줄, 오래된 건물, 오래된 간판에서 느껴지는 맛집의 포스가 기대감을 더 부풀렸다. 순서를 기다린 끝에 식당에 입장했고, 이내 평양냉면이 나왔다.
난 당황했다.
정말 황당한 맛이었다. 뭔가 맛이 있는 것 같은데, 그 맛이 뭔지 알 수가 없었다. 보통 어떤 맛이 생소할 때는 처음 먹어보는 식재료 또는 향신료에서 생경한 맛이 느껴질 때인데, 그 종류의 '생소함'은 아니었다. 분명 처음 먹어보는 맛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혀에 익숙하지도 않았다. 평양냉면을 검색했을때 가장 많이 등장했던 표현 '슴슴하다'라는 표현이 공감됐다. 먹을수록 고기육수의 맛과 메밀면의 맛이 조금더 느껴지긴 했지만 냉면 한 그릇을 다 먹을때까지 '맛있다'라는 표현이 머리에 떠오르지 않았다. 같은 값이라면 차라리 달큼시큼한 기존의 물냉면이 낫겠다 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틀정도가 지났다.
갑자기 며칠전에 먹었던 평양냉면이 먹고싶어졌다. 달큼시큼한 물냉면말고 무슨 맛인지 모르겠을 바로 그 슴슴한 평양냉면이 먹고싶어졌다. 나는 그 이후로 계절을 가리지 않고 종종 평양냉면집을 찾는다. 유진식당, 을지면옥, 을밀대, 피양옥, 우주옥, 평양면옥, 필동면옥, 봉래면옥, 우래옥, 봉피양, 정인면옥, 청류, 서관면옥........ 내가 가본 평양냉면집을 지금 당장 나열하라고 해도 이렇게 나열할 수 있다.
평양냉면은 2025년인 지금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또 좋아하는 사람들만 좋아하는 매니악한 음식이다. 유튜브에서는 평양냉면이 주제로 올라오면 예전처럼 여전히 맛이 있네 없네 치열하게 댓글들이 달린다.
누구에게 맛이 있건 없건, 평양냉면이야말로 실로 음식의 스타가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