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봉과 정글짐이 사라진 한국.
송길영 박사의 '호명사회'를 읽다가 '과잉 시뮬레이션은 오히려 우리에게 도움 되지 않는다. 오히려 해가 된다' 라는 구절을 읽었다. 기술의 발전으로 많은 것을 직접 해 보지 않아도 시뮬레이션해 볼 수 있는 현대사회에서 오히려 그 시뮬레이션이 해가 될 수 있다는 말이었다.
일례로 최적의 경로를 시뮬레이션하여 찾아주는 내비게이션에만 의존하다 곤란을 겪었다는 소식은 더 이상 생경하지 않다.
사람들은 운전하면서 더 이상 동쪽 남쪽 방향을 찾지 않는다. 또한 목적지로 가는 도중이라면 길이 어느 동네인지 생각하지 않는데 익숙해져 있다. 굳이 '모험'하지 않는다. 내비게이션은 가야 할 길 뿐 아니라, 과속단속 카메라의 위치까지 정확히 알려준다. 비단, 운전할 때뿐 아니라, 사람들은 이제 확정된 길, 확정되어 보이는 길만을 가려고 한다. 의대 진학 열풍은 단적인 예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왜 굳이 모험해야 하는가?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축구 선수에 도전할 때, 한인 숙소에서 수많은 여행객들을 마주쳤다. 그들에겐 공통점이 있었는데, 바로 '여행 루트'였다. '페볼칠아'라든지 '역방향' '순방향' 이라든지, 이런 이야기가 처음엔 무슨 소리인가 했는데 알고 보니 한국 여행객들은 보통 정해진 여행 루트가 있었다. '페볼칠아'는 페루-볼리비아-칠레-아르헨티나로 이어지는 여행순서였고 역방향과 순방향은 그 여행을 시계방향 거꾸로 하느냐 순서대로 하느냐로 결정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 순서대로 교통편을 미리 끊어두었다. 그래서 많은 여행객들은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더 머무르지 못하는 것을 아쉬워했다. "이렇게 좋은 도시인줄 몰랐다"면서. 며칠 더 머무른다면 멋진 모험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를 텐데 말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한국인들은 유럽여행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더 나아가 여행일정을 짜주는 서비스도 성업 중에 있다고 한다. 반면, 유럽친구들을 포함한 다른 나라 친구들에게는 이런 현상을 관찰할 수 없었다. 한국인들은 그저 '관광'하고 있었다. '모험'하는 한국인들은 몇 만나지 못했다.
2023년, 마라도나의 도시 나폴리로 모험을 떠났다. 나폴리에 3~4주 정도 체류하며 나폴리를 온전히 느꼈다. 마침, 김민재가 SC나폴리 팀에서 활약하며 많은 한국인들이 나폴리를 찾고 있었다. 내가 묵었던 게스트하우스에도 꽤 많은 한국인이 찾았다. 여느 게스트하우스와 같이 공용주방에서는 각국에서 온 친구들과 어울려 밥도 먹고 맥주도 마시며 왁자지껄 했다. 여행정보, 자기가 겪었던 에피소드, 맛집에 대한 이야기가 오고 갔다. 혼자 여행하는 한국인들은 우리와 어울리지 않았다. 캐리어에 몇 개가 들었는지 의심스러운 신라면 컵라면에 뜨거운 물을 붓고 말을 걸지 말라는 듯 노이즈캔슬링 이어폰을 끼고 핸드폰으로 유튜브를 틀었다.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 나중에 알았다. 그들은 궁금한 것이 있으면 구글맵으로 해결한다는 것을. 그들은 '모험'에 관심이 없었다. 정확한 말로는 모험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는 것 같았다.
즐겨보는 스케치코미디 유튜브에 '폰중독'이라는 제목으로 영상이 올라왔다. '스마트폰'을 잃어버려 곤란해하는 주인공이 겪는 일들에 대해 영상을 올렸다. 주인공은 스마트폰이 있었다면 하지 않았을 작은 '모험'들을 통해 문제를 해결했다. '행인에게 길 물어보기' '친구 어머니와 통화하기' '시간과 장소 정하고 친구 만나기'와 같이 스마트폰이 없었을 때, 우리가 당연하게 했던 일 들이다.
나는 이 영상을 보며 스마트폰을 쓰는 우리가 아주 작은 '모험'도 못하고 있구나라고 생각했다. 이런 작은 것이 무슨 모험이냐고 할 수 있다. 어학사전에 찾아보면 모험(adventure)이란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어떠한 일을 하는 것"이라고 되어있다. '겸연쩍음'을 무릅쓰고 행인에게 길을 묻고, '민망함'을 안고 친구 어머니와 통화하며, 친구가 정확한 시간과 장소에 나오지 않을 '위험'을 감안하여 약속장소에 나가는 것. 이것 모두 아주 작은 모험들이다. 나는 운 좋게 이런 모험들을 하며 성장했다. 그리고 그 모험들이 모여 '아르헨티나 축구선수 도전' 같은 꽤나 큰 모험을 상상하게, 도전하게 만들어냈다고 생각한다.
학교운동장과 놀이터에 정글짐이 사라졌고, 철봉이 사라졌다. 몸으로 모험하며 다칠 '위험'을 아예 제거해 버리는 것이다. 모험의 가능성을 삭제해 버렸다. 심지어 최근에는 미끄럼틀 마저 규제해 버렸다. 놀이터는 3살만 지나도 지루할 법한 기구들로 대체되었다. 그 마저도 대부분은 '안전'이라는 명목하에 고정되어 움직이지 않는다. 아이들은 모험할 기회를 박탈당했다. 하지만 아이들은 그 사실을 모른다.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으니 박탈감을 느낄 수 없다.
모험하지 않으며 성장하면 모험하는 선택을 할 수가 없다. 그런 선택을 해 보지 않았으니 예측할 수 없는 '모험'은 "잘못된 선택"이라 인식된다. 그러다 보니 '모험'은 제거되고 내비게이션이 안내하는 길을 선택한다. 내비게이션만 쳐다보니 스스로 감각하는 힘도 생각하는 힘도 사라지고 있다.
모험은 자신이 사는 세상의 확장을 위한 유일한 방법이다. 모험하지 않으면 자신의 세계를 확장할 수 없다. 작은 모험은 작은 범위를, 큰 모험은 큰 범위를 확장시킨다. 작든 크든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세계를 확장시키고 싶어 한다. 사람 간의 다툼 대부분은 자신의 세계를 다른 사람에게 확장시키려다 일어난다.
모험하는 사람은 자신의 세계를 확장시킨다. 모험하지 않는 사람은 확장된 다른 사람의 세계에 기생할 수밖에 없다. 같은 이치로 모험하는 사회는 확장된다. 모험하지 않는 사회는 기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