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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엽집 Dec 31. 2019

이야기를 만들어간다는 것_<나이브스 아웃>

스스로 구원하리라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라이언 존슨의 〈나이브스 아웃〉은 ‘추리’ 영화다. 여러 권의 베스트셀러 미스터리 소설을 써낸 작가가 85세 생일에 숨진 채 발견된다. 경찰은 칼로 목을 그은 사인(死因), 흩뿌려진 피의 흔적, 모두의 완벽한 알리바이 등을 들어 작가의 죽음을 ‘자살’이라고 단정하는데 누군가로부터 초대받은 사립 탐정 ‘블랑’은 석연치 않다. 작가의 책은 출판했으나 판권을 갖고 있지 못했던 막내아들, 작가로부터 생활비와 학비를 수년 간 이중으로 받고 있다가 들통난 둘째 딸과 손녀, 생일에 가장 먼저 도착한 첫째 딸과 사위, 생일 전날 크게 다투고 집을 나갔다는 손자, 그리고 간병인과 헬프까지 모두 의심할 만한 범행 동기를 갖고 있다.


〈나이브스 아웃〉은 추리 장르의 몇 가지 공식들을 일부러 어그러뜨린다. 작가가 죽은 곳은 ‘완벽한 밀실’이 아니며, 탐정 블랑은 (결과적으로 여느 탐정들처럼 완벽히 꿰어 맞춰지는 이야기를 완성하긴 하지만) 어딘가 어설프고, 꼼꼼함이나 치밀함과 거리가 (약간) 멀다. (문제를 해결하는 추리의 40% 가량은 얻어 걸린 듯한 인상이다.) 작가가 왜, 누구 때문에 죽었는지는 영화 초반에 밝혀지고, 범인(?)이 들키지 않으려고 하는 몇 가지 행동들은 어쩌다 범인이 된 범인이 안전하게 이 상황에서 탈출하는 것이 이 영화의 목표인가, 하고 유추하게 하지만 범인을 포함한 아무도 그것에 충실하게 집요하지 않다. 영화의 전개 방향은 예측불가능하다.


대신 관객이, 혹은 독자가 ‘완벽히 꿰어 맞춰진다’고 생각한 세계에 (탐정이 얻어 걸린 증거들로 사건을 결국 해결하고, 몇 가지 우연들이 범인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처럼) 얼마나 많은 ‘구멍’들이 존재하는지 보여준다. 이는 〈나이브스 아웃〉이 왜 ‘추리’라는 장르를 선택했는가, 와도 일맥상통한다. 현실에는 세상이 딱딱 맞아 떨어지는 곳이라는, 그래서 내 편과 네 편을, 우리와 너희를 명확히 구분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영화가 시작하면서 보여주는 컵에 새겨진 “내 집, 내 커피, 내 컵”이라는 문구처럼 “유서 깊은” 내 것이 있고, 타인은 그것을 빼앗으려는 존재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간병인 마르타는 외국인 노동자이다. 그녀의 어머니가 불법체류자인 건 분명하나 그녀의 국적은 여러 사람들에 의해 다르게 언급되기 때문에 특정할 수 없다. 때문에 그녀는 트럼프가 장벽을 세우고 미국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전쟁을 통해 미국에게 텍사스를 뺏긴 멕시코 인이기도 하고, CIA의 공작으로 민주정권이 무너지고 독재정부가 들어선 다수의 중남미 국가 사람이기도 하며, 영국으로부터 건너온 청교도 인들에게 호의를 베풀고도 몰살당하고 지금은 ‘보호구역’ 안에 살아야 하는, 주민의 80% 이상이 마약과 알코올 등의 중독자로 살아가는 아메리카 원주민이기도 하다.


작가의 가족들은 평소에 마르타를 따듯하게 대해주고, 그녀가 “가족 같은” 사람이라고 말하지만, 작가가 유서에서 그녀에게 책의 판권을 포함한 모든 재산을 남기겠다고 선언하자 태도가 돌변하여 그녀를 도둑으로 규정하고 상속권을 포기하게 만들기 위한 방법을 궁리한다. 가족들에게 가족이란 “유서 깊은” 재산을 상속받을 수 있는 자격을 뜻하는데, 생전 작가와 맺고 있던 관계나 유대와 상관없이 그건 혈연 같은, 그러니까 좀더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피부색이나 국적 따위가 더 중요한 요소이다. 멕시코와 미국 사이에 분리 장벽을 세우는 대통령을 ‘나치’로 비유하던 사람도 자신의 이익을 두고 다투게 되자 일말의 어떤 질문도 하지 않는다.


제목 〈나이브스 아웃〉이 선언하듯, 영화 속엔 둥근 틀 안에 수많은 칼들이 꽂혀 있는 오브제가 중요한 상징으로 등장한다. 가족들은 각각 한 명씩 ‘용의자’가 되어 이 오브제 앞에서, 수많은 칼날을 온몸으로 받으며 자신의 입장을 진술한다. 영화는 진술과 동시에 그것이 어느 정도의 진실과 거짓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즉각적으로 보여주는데, 그때 이 칼들은 가족들이 서로에게 준 상처임과 동시에 그들이 받고 있는 불안과 압박감을 상징한다. 동시에 미국 역사를 설명하는 중요한 측면인 ‘폭력과 거짓의 역사’를 은유한다. (반대로 ‘외국인’ 마르타는 거짓말을 하면 자동적으로 토를 하고, 영화 속 마지막 토를 랜섬의 ‘하얀’ 얼굴 위에 뿜는다.)


〈나이브스 아웃〉은 ‘추리’라는 장르의 장치들을 미스터리를 풂과 동시에 세계의 이면(裏面)을 드러내는 도구로 활용한다. 사회적인 상징을 놓치지 않으면서 장르적인 (소소한) 쾌감까지 놓치지 않아서 〈나이브스 아웃〉이 더욱 영리하게 느껴진다. 던진 공을 열심히 찾아 입에 물어 던진 이에게 돌아오는 저택의 개들처럼 떡밥은 충실히 회수되고, 그것은 장르적 쾌감을 주는 동시에 세계의 진실을 보여주는 장치로 기능한다. 첫째 사위가 바람을 피웠다는 내용을 적은 (듯한) 편지는 사위에게 백지처럼 보이지만 첫째 딸이 (어릴 적 아버지와 하던 놀이처럼) 열을 가하자 드러나는 글씨처럼.

영화의 마지막 클라이맥스는 단호한 희망의 의지처럼 보이기도 하다. 탐정은 “유서 깊은”이라는 맹목적 믿음을 “작가가 파키스탄 인으로부터 산 것”이라는 진실을 통해 우스꽝스럽게 만들어버리고, 랜섬이 오브제에 꽂힌 칼들 중 하나를 뽑아 들고 마르타를 찌르지만 소품용 칼이라 그녀를 죽이는 데 실패한다. 이러한 설정은 이젠 더 이상 애꿎은 타인에게 해를 끼칠 수 없다는, 분노를 부당하게 풀어낼 수 없다는 의지처럼 보이고, 마르타가 “내 집, 내 커피, 내 컵”이란 문구가 새겨진 컵을 들고 건물 2층에 서서 문 밖에 서 있는 나머지 가족들과 마주 응시하는 장면은 (여전히 불가능하지만 꿈꾸는) 계급의 전복(顚覆)처럼 보인다.


마르타는 여전히 안전하지 않아 보인다. 그녀를 믿고 지지하던 유일한 인물인 작가는 세상을 떠났고, 계급은 뒤집혔을지 모르나 그들을 위선적으로나마 연결하고 있던 선들은 끊어졌다. 하지만 마르타는 숙련된 직업인으로서의 전문성과 이기심을 기본 값으로 생각했던 랜섬의 기대와 다른 선택으로 스스로 자신을 구원했고, 여기에는 집안 내 계층의 가장 낮은 자리에 있던 헬퍼와의 연대가 결정적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진심으로 마르타를 가족으로 대해 준 이는 손녀였으며, 마르타는 어떤 일이 있어도 그녀의 학비는 지원하겠노라고 약속한다. 어쩌면 진실은 만들어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탐정들의 마지막 스토리텔링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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