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엽집 Nov 08. 2019

일단, 쓰자

논리적, 비판적 글쓰기

이번 발제를 맡은 두 친구의 글은 예상(?)보다 일찍 올라왔지만 글쓰기 모임 당일 아침 남은 세 친구 중 두 친구의 글이 올라왔고, 한 친구는 시간이 더 필요하단 메시지를 보냈다. 당일 아침에 올린 두 친구 중 한 명은 “마감”에 닥쳐 글을 쓰니 “쫓기듯” 쓰게 된다면서 자기 자신한테 “실망”하지만 한편으론 “이거 다 변명”이라며 자책과 자괴감, 그리고 분노 사이를 비틀거리는 메시지를 남겼다. 그리고 “논리란 무엇인가요? 논리적 글쓰기는 무엇인가요?”라는 원망과 포기가 3:7 쯤 섞인 문장으로 맺음.    

여행을 다녀와서, 학기를 마무리하면서 에세이를 쓴다. 정리된 정보들이 던져지고 그것을 얼마나 열심히 암기했느냐가 평가의 척도가 아니라서, 그게 전부가 아니라고 생각해서 에세이를 권한다. 에세이를 쓰면서 한 학기 우리의 생활과 경험을 돌아보자 청한다. 무엇을 경험했는지, 그것을 하면서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느낌을 받았는지. 지금 내게 남아 있는 것은 무엇인지. 어떤 의미였는지, 의미인지. 지난 시간의 층(層)들을 찬찬히 쓸어보는 일. 더듬어 보는 일. 배움은 스스로 발견하는 데서 일어나니까.    

 

하지만 대부분의 에세이는 ‘초안’이란 방패를 달고 허술하게 던져진다. 언젠가부터 ‘초안’이라는 이름을 달고 올라오는 글들은 읽지 않는다. 초안이라는 단어는 참 쉬운, 만만한 핑계거리가 된다. 초안이니까 토 달지 마세요. 초안이니까 여러 생각이 들더라도 말하지 마세요. 초안이라고요. 제가 다시 고칠 거라니까요. 글쓰기 모임을 하고 있는 친구들의 표현은 좀더 세련됐다. “완성본이 아니에요.”, “결론이 없어 죄송합니다.” 우리의 다섯 번째 모임은 여기에서 출발해야 했다. 완성은 뭘까.      


완성은 뭘까. 자신의 글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건, 더 잘 쓰고 싶다는 욕구가 밑바탕에 깔려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럼 일단 우리는 그 불만을 감사하게 받아들여도 되지 않을까. 포기하지 않고 있다는 것, 애를 쓰고 있다는 것에 충분히 지지와 격려를 받아도 되지 않을까. 11년째 나름 꾸준히 글을 쓰고 있는 나는 물론이거니와 많은 ‘프로’ 글쟁이들이 할 수 있다면 세상에 있는 자신의 모든 글을 찾아 불살라버리고 싶다고 토로한다. 부끄러워서. 하지만 지우지 않는 건 그런 시간을 딛고 지금 여기 있는 거니까. 우리는 다만 쓸 뿐이다.     

논리적 글쓰기란 뭘까. 에세이와는 무엇이 다를까. 우리의 생각을 펼친다는 점에서 시나 소설 같은 문학 장르가 아니고서야 지금 쓰고 함께 읽는 우리의 모든 글들이 에세이다. 다만 여행을 다녀와서, 학기를 마무리하며 쓰는 ‘에세이’와 논리적 글쓰기가 다른 점은, 후자에는 (가급적) 한 문장으로 정리해낼 수 있는 메시지(혹은 주제)가 담겨 있고, 그것은 텍스트가 품고 있거나 텍스트에서 파생된 맥락 들에 담긴 근거들로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신형철 문학평론가를 빌어 글쓰기를 “건축”에 빗댄다면, 근거는 단단한 기둥이다.    

   

결론을 못 내려 죄송하다던 친구는 그림책이든, 영화든 “눈에 보이는 건 있는데” 그 다음을 모르겠다고, “착즙기로 쥐어짜듯 생각과 느낌을 짜내야” 한단다. 낚시를 해본 적 있느냐고 물으니 낚시를 해본 적도 없단다. 그럼에도 낚시를 해본 동료들의 기억을 빌어 상상을 해보면, 낚싯대를 던져 물에 추를 띄우고 우리가 할 일은 기다리는 것밖에 없다. 단, 기다리면서 추를 가만히 “(지켜) 보아야” 한다. 가만히 지켜보다가 추가 움직이면 그 찰나를 놓치지 않고 낚싯대를 들어 올려야 한다. 추가 움직일 때까지 우리의 최선은 그저 (지켜) 보는 것이다.     


리터러시도 이와 같다. “눈에 보이는 것”이 있으면 된다. 거기에서 출발하면 된다. 가만히 보면서 질문을 던져도 좋고, 눈에 보이는 것을 이리저리 뒤집어 봐도 좋다. 〈주토피아〉에서 내 “눈에 보인” 것은 악당이 ‘양(羊)’이란 설정이었다. 왜 사자나 호랑이나 치타와 같은 육식동물이 아니라 양이었을까. 사자나 치타는 모두 남성인데 왜 양은 여성일까. 양은 왜 그런 음모를 계획하게 되었을까. 나는 세상의 모든 텍스트와 합이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이번 텍스트가 나와 연결되지 않았을 수 있다. 죄송할 것 없다. 약속된 시간은 지켰으니.   

zoo+utopia. 동물원이라는 유토피아는 인간 중심 사고의 폭력 아닌가?

왜 논리적, 비판적 글쓰기일까. 생각보다 사람은 권력 (관계)에 취약하다. 나치는 유대인들을 수형소에 수감하는 순간부터 치밀했다. 모든 개인 물품을 빼앗아 개인성을 박탈하고, 수십 명의 사람들 앞에 옷가지와 신발 들을 쌓아놓고 몇 분 안에 수형복과 신발을 고르게 함으로써, 맞지 않는 옷과 신발에 자신을 맞추도록 함으로써, 덜그럭거리는 신발과 흘러내리는 옷에 자신을 집어넣도록 함으로써, 얼굴을 씻지 못하는 조건을, 면도를 하지 못하는 조건을 만듦으로써 자기를 비하하고 그래서 그래도 되는 존재로 스스로 생각하게 만들었다.   

   

반면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에게는 어떤 공통점이 있었다. (가스실로 들어가는 순서라는 운도 있었겠지만) 그들은 인간으로서의 자신을 끊임없이 시험하고, “이것이 인간인가?”, 그러니까 나는 ‘이것’인지, ‘인간’인지 계속 되물을 수밖에 없는 조건들 속에서 최소한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비눗곽 뚜껑에 물을 받아서라도 얼굴을 씻고, 깨진 유리 조각을 갖고 부서진 거울에 비춰 면도를 하고, 제 발에 맞는 신발을 구하기 위해 물물교환을 시도하고, 옷을 제 몸에 맞추기 위해 고민했던 사람. 그러니까, 질문을 던졌던 사람들이었다.

     

우리는 우리를 향한, 규정짓는, 우리에게 무엇을 강요하는 메시지들에 둘러싸여 살아간다. 여성이라서, 10대라서, 대안학교를 졸업한 학생이라서 어떻다는, 어떠해야 한다는 말들. 무식하다거나 약하다거나 ‘어른’들의 말을 잘 들어야 한다거나 하는 말들을 향해 우리는 질문해야 한다. 반드시 알아야 하는 무엇이 있는지, 그것은 누가 결정하는지, 공부란 무엇인지. 나이란 무엇인지, 내 안에 나도 모르는 권위의식이나 위계 같은 건 없는지, 그건 어떻게 작동하는지, 그것은 정의로운지. 그러니까, 사람이란 무엇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비판적, 논리적/ 글쓰기 모임의 목적은 여기에 있다. 나를 규정짓는, 억압하는 힘과 말들에 질문하는 근육을 기르는 것. 질문을 통해 세계를 탐구하고, 주어지는 세계를 그대로 받아 안는 대신 나누고 가르고 들여다보고 쑤시고 곁눈질도 해보고 부딪쳐보고 연결해보면서 존재할지 모르는 세계의 이면(裏面)을 들여다보고, 확장하는 일. 우리는 그 길 위에 있고 목적지는 있으나 아마 우리는 영원히 마침표를 찍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완성본에 대한 부담은 버리고, 일단, 쓰자.        


다만 잘 쓴 글이든, 미완의 글이든, 숨겨둔 글이든, 파일로 저장하지 않고 날리는 글이든, 그런 과정 하나하나가 자기 생각을 정립하고 문체를 형성하는 노릇이며 ‘삶의 미학’을 실천하는 과정이라고, 못 써도 쓰려고 노력하는 동안 나를 붙들고 늘어진 시간은 글을 쓴 것이나 다름없다고, 자기 한계와 욕망을 마주하는 계기이자 내 삶에 존재하는 무수한 타인과 인사하는 시간이라고, 이제는 나부터 안달과 자책을 내려놓고 빈 말이 아닌 채로 학인들에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세상에 어떤 글도 무의미하지 않다고, 우리 어서 쓰자고.(p.35, 글쓰기의 최전선)       

작가의 이전글 잘 자라라 잘 자라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