텃밭 농사와 기록 농사
첫 장(章)은 쟁기로 밭을 가는 누군가의 맨발이다. 깊게 베인 상처와 주름이 가득한 발. 경험과 시간이 고스란히 새겨진 발. 힘찬 발걸음의 기운은 종이를 뚫고 나와 독자의 심장에 고스란히 전달된다. “수박이 먹고 싶으면 수박씨를 심어야 한다.” 나이든 농부는 수박 농사를 짓는다. “수박만 한 구덩이를 파고 삭은 퇴비와 참한 흙, 까만 수박씨 서너 개 고이 누이”는 것을 시작으로 “뽑아내고 돌아보면 또 돋는 잡풀, 훑어내고 돌아보면 또 생겨난 진딧물 일일이 손으로 뽑고 훑으며 짠 땀이 뚝뚝 떨어지는 고단한 노동을 마다지 않”아야 한다.
수박을 수확한 농부는 그중 잘 익은 한 덩이를 품에 안고 “수박 먹고 싶은 사람이면 그 누구든” 오라며 “커다란 손짓으로” 부른다. 함께 수박을 나눠 먹는 사람들의 면면이 다양하다. “엊그제 다툰 사이”는 물론, “지나가는 길손”도 어서 오라 청한다. 피부색이나 장애 여부, 성 정체성 등 어떤 조건도 농부가 땀 흘려 지은 수박을 나누어 먹는데 상관없다. 인위적인 경계나 구분은 무의미하다는 듯 수박 줄기는 녹슨 철조망을 감싸 안으면서 저 위로 밀어낸다. 수박을 키우고 수박을 나눠 먹는 행위 모두 평화를 상징하는 듯하다.
그런데 ‘텃밭농사와 기록농사(최문호, 민들레 124호)’를 읽고 나니 다른 장면들이 새삼 떠오른다. 철조망을 저 위로 밀어 올릴 듯 물결치던 푸른 수박밭이나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수박을 나눠 먹는 모습보다 수박을 키우기 위해 한여름 “짠 땀”을 뚝뚝 흘렸던 나이든 농부의 모습이 더 선명하다. 수박씨를 심은 후 흙을 다독이며 “잘 자라라, 잘 자라라 조용조용 말해주던” 모습과, “온힘 다해 솟아나 있”는 수박 싹을 보고 “대견해라 기특해라 활짝 웃으며 아이처럼 기뻐”하던 모습들이 다가온다.
오래 보아야 예쁘다는데
학교는 2012년부터 본격적으로 농사 프로젝트를 해오고 있다. 초등 친구들은 상자텃밭, 옥상텃밭을 활용해 농사를 경험하고 있고, 2012년부터 작년까진 1년 동안 농사를 지으며 생활하는 프로젝트도 진행했다. 중등 친구들은 2013년부터 나대지를 인근 주민들과 함께 일구어 농사짓는 프로젝트를 하고 있다. 학교에서 농사를 지으며 꼽았던 키워드는 공동체지원농업(CSA : Community Supported Agriculture), 자립과 자급(율), 푸드 마일리지, 요리 (레시피) 등이었다.
농장 프로젝트를 시작하며 학교는 농장에서 생산한 쌀로 급식 식재료를 자급하는 꿈을 꾸었다. 인턴십을 통해 누군가 농부가 되고, CSA를 통해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는 삶을 꿈꾸었다. 다시 말해 우리에게 농사란 어쩌면 먹을거리를 기르는 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을 지도 모르겠다. 유전자조작식물(GMO)은 먹었을 때 우리 몸을 어떻게 바꿀지 모르기 때문에 문제이고, 쌀을 제외한 모든 작물을 해외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즉 식량이 무기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식량자급률이란 이슈를 중요하게 다뤘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하나 같이 중요한 이슈이다. 그런데 고민의 지점은 이슈에 앞서 우리가 농사짓는 생명들을 찬찬히 살피고, 이들을 하나의 생명으로 존중하며 충분한 시간을 갖고 관계를 맺었느냐에 있다. 관계가 만들어지지 않은 접근은 종종 설익은 당위가 되기 쉽다. 오래 보아야 예쁘다는데, 우리는 충분히 오래 보았을까? 관심을 갖고 관찰하고 관계를 맺기도 전에 토종 종자와 GMO와 자급(율)과 수확을 먼저 이야기하면서 생명이란 본질을 도구로 전락시키진 않았을까. 생태를 공부한다면 농사는 무엇보다 ‘살아 있는 존재’를 만나는 장(場)이어야 하지 않을까.
최문호 님은 “농사를 농업, 그러니까 직업과 산업으로서만 한정하는 것은 빙산의 일각만 보는 것”이라고 단언한다. 농사기술을 잘 익히는 것보다 관심을 갖고, 오랫동안 들여다보고, 서로가 이어진 모습과 방식을 살펴보고, 그 관계를 바탕으로 변화를 만들어내는 배움으로서 교육농(農)을 강조한다. 마을에서 직접 농사지으며 재미난학교에서 교육농 수업을 하고 있는 재미난학교 교장 호랑이 역시 아이들이 “생명을 돌보는 경험”을 하고 생명 자체가 품고 있는 “내적인 힘을 발견”하는 과정으로서 교육농을 강조한다.
최문호 님의 〈텃밭농사와 기록농사〉를 통해 보니 같은 ‘농사’를 짓고 있어도 학교는 중요한 점을 하나 놓치고 있는 것 같다. 생명이 뿌리를 잘 내리고 일생(一生)을 마무리할 때까지 관심을 기울이며 관계를 맺는 농사와 우리가 먹을거리를 잘 길러내는 것이 목표인 농사의 차이. 전자의 일상은 매일 조금씩 보이는 변화에 대한 경탄으로 채워질 가능성이, 후자는 수확하는 순간의 보람과 기쁨만 남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그런데 전자일 때 우리는 밥상 위에 놓인 생명을 존재가 지나온 시간과 함께 내 온몸으로 품을 수 있지 않을까.
너도 그렇다
최문호 님이 정리한 관심과 관찰, 관계와 관여라는 기록농사를 통한 배움의 과정은 비단 장애통합교육뿐만 아니라 대안교육 전반에 중요한 시사점이 있었다. ‘꿈이자라는뜰’을 방문한 적 있다는 호랑이는 텃밭이 어느 정도 땅 위로 솟은 단(壇) 형태로 되어 있었다며, “발달장애 학생들이 허리 굽혀 일을 하면 힘드니까 단을 쌓은 것 같다”고 말씀하셨다. 호랑이의 말씀을 들으며 나는 농사짓는 발달장애 친구들을 ‘관심’ 갖고 조용히 ‘관찰’하다가 ‘단’을 쌓음으로써 학생들의 농사에 ‘관여’하는 최문호 님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최문호 님은 “다양하고 생생한 농적 자극을 내면으로 이어지게 만들고, 온전히 쌓이”도록 하기 위해서 기록농사를 시작했다고 설명한다. 아이들은 박하와 마조람 허브 잎을 자세히 들여다보며 그림을 그리고, “다종, 다양, 다채로운 토마토의 모양과 색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하나씩 먹어보면서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토마토를 찾아보기도” 한다. “자신만의 감각”으로 느끼고, “자신의 언어로 표현”한다. “체험은 기록을 통해”, “이야기하고 들려지는 것을 통해 경험으로 탈바꿈”한다. 최문호 님은 이를 “기록은 기억을 재배한다”는 말로 압축한다.
용사는 다양한 자극에 노출되는 아이들 개개인에게 어떤 것이 의미 있는지, 어느 강도의 자극이 이어져야 하는지 알기 위해서는 충실한 기록이 전제되어야 할 것 같다고 말하였다. 호랑이는 아이들이 자신들의 배움을 충실히 기록하고 스스로 “맥락”을 읽는 것을 강조했다. 경험과 배움의 흐름이 다음을 모색하는 근거가 되고, “배움의 자율성과 주체성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될 것 같다고 답했다. 나는 기록하는 습관이 몸에 익으면 기록을 위해 자연스럽게 온몸의 감각이 열리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학교에서 한 학기를 보내고 에세이를 쓸 때면 정신없이 보내긴 했는데 돌아보니 무엇을 했는지, 어떤 것이 자신에게 남았는지, 무얼 배웠는지 잘 모르겠다고 토로하는 친구들을 종종 만난다. 이들의 에세이에는 대개 한 학기 동안 했던 일들이 맥락이나 의미 없이 쭉 나열되어 있다. 이런 상황이 반복되면 불안과 무기력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스스로 하는 기록이 이들의 시간을 세우는 기둥이 될 수 있겠다. 최문호 님은 “텃밭 일을 일부러 일찍 마치고” 텃밭일지를 쓰게 했단다. 우리도 우선 기록을 위한 시간을 확보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누군가를, 무엇을 “정확히 사랑하는 일”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정확히 사랑하기 위해 자세히 보아야 하고, 오래 보아야 한다. 이를 위해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보고 또 보”았다고 고백한다. 관심과 관찰, 관계와 관여라는 단계를 거쳐 아무리 많은 정보들을 기록한들 한 생명을, 하나의 삶을 완벽히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그 시간과 결은 근육에 오롯이 담길 것이다. 그것이 호랑이가 말한 우리의 “내적인 힘”이 되리라.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최선을 다했다”는 문학평론가 신형철의 단단한 고백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