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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준엽 May 06. 2017

작품 앞에 '얼마나' 서 있어야 할까요?

Art

우리는 흔히 미술관에 가면 인증샷을 남기고 SNS에 올리는 일에만 열중한다. (배우 이제훈씨와 쿠르베의 작품)


우리의 일상이 예술로 가득 차면 좋겠지만 그런 경우는 극히 드물다. 흔히 '특별한' 시간을 만들어서 작품을 만난다. 물론, 이름은 몰라도 팝 아트로 대변되는 현대 작품은 소비 전반에 걸쳐 익숙해지면서 편안하고 이해도 빠르다. 이미 삶 전반에 걸쳐 접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보다 훨씬 이전의 예술은 어색하기만 하다.


많은 작품을 어떻게 보아야 할지... 즐겁기보다 답답하기만 하다.


얼마나 작품 앞에 서 있어야 할까?


같이 간 이성 앞에서 이런 식으로 합리화하면서 핏대 세워봐야 순식간에 '무식한'사람으로 낙인찍히기 십상이다. 그래서 우리는 앞서가는 사람들의 댄스 파트너가 된 듯 탬포를 맞추면서 조심스레 그 뒤를 따르게 된다.


A Street in Sunlight(1863-1864), Giuseppe Abbati


사실, 이런 작품을 보면 순간적으로 멍해진다. '아, 망했다'라는 생각까지 든다.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보라는 것인지... 그저 '난해하다'는 말 밖에는 표현할 길이 없다. 여기서 말하는 난해함이란 '많은 시간과 노력을 통해 굳이 그린 그림이라는 게 고작 이런 풍경이라니...'라는 식의 생각이다.


우선 간단하게 작품(A Street in Sunlight)을 설명하면 넓은 의미에서 자연주의가 시대의 주류였던 근대 풍경화이자 좁은 의미로는 이탈리아의 '마키아 파'에 속한 주세페 아바티의 작품이다. 여기서 마키아라는 단어에 주목해보자.


마키아는 '색의 얼룩'이라는 의미이다. 마키아 파는 자연과의 직접적인 접촉을 중시했다. 윤곽선에서 형태를 데생한 후 물감으로 착색하는 아카데믹한 방식을 거부하고, 밝은 색조와 어두운 색조의 색채의 '반점'을 병치하여 단순화하고 명암을 강조하려 했다.


Poesia di Eugenio MontaleL' Arno a Rovezzano(1899), Odoardo Borrani


복잡한 설명은 각설하고 앞서 마키아 파의 가장 큰 특징은 반점을 병치한다는 것이다. 이는 일종의 점묘법이다. 점묘법이란 쉽게 말해 색맹 검사표를 만드는 것처럼 점을 찍어서 그림을 그리는 방식이다.


어느 사회나 기존 프레임에 비해 너무나 급진적이면 비방과 비난의 대상이 되어 위축되듯이 그들 역시 그 방식을 소심하게(?) 적용한다. 점묘의 특징을 뭉개버리는 방법으로 말이다.


The Rue Mosnier with Flags(1878), Édouard Manet
Impression, soleil levant(1872), Oscar-Claude Monet


인상주의는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다.

위의 두 작품은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하다. 앞서 이야기한 마키아 파의 작품과도 비슷해 보인다. 뭔가 그 '느낌'이 비슷하다. 이는 인상주의 사조에 속한 작가의 작품이다. 인상주의라는 이야기가 공론화되면서 작가들은 현실 세계를 최대한 똑같이 표현하는 것을 넘어 자신이 느낀 감정과 그 순간을 그리는 것이 물감과 종이가 주는 특권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여기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인상주의나 모네, 마네 같은 시대의 천재 작가가 어느 날 갑자기 툭! 나타난 것이 아니라 그들 역시 이전의 작품에서 많은 영향과 영감을 받았다는 것이다.


The Cloister(1862), Giuseppe Abbati


대기는 미술이 지닌 아름다운 특권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자. 그래서 얼마나 서 있어야 한다는 것인가? 정답은 없지만 우선 이런 작품을 볼 때는 대기를 느끼면 된다. 여기서 말하는 대기는 우리가 아는 그 공기가 맞다.


대기를 본다는 것을 얼토당토않은 말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위의 그림 역시 처음 난해함(?)을 주던 주세페 아바티의 작품이다. 두 작품 모두 화려하거나 특별한 풍경을 그린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현실을 있는 그대로 똑같이 그리려고 노력한 것도 아니다. 작가는 당시의 이탈리아가 지니고 있는 빛과 공기를 표현했다. 우리가 스마트 폰으로 풍경을 찍으면 '아, 사진 참 안 나오네'라고 이야기할 때 느꼈던 그 느낌! 바로 그 느낌을 미술은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작품이 주는 느낌과 당시의 감정을
느껴보자


결국 문제는 우리는 미술관에 가도 그저 옷가게에서 행거의 기성품을 스켄을 하듯  작품을 분석하려는데 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나아가 작품을 통해 철학까지 배우면 좋겠지만 다 떠나서 우리는 작품을 보는데 심할 정도로 분석적이다. 여기서 문제는 시작된다.


라면 봉지를 뜯고 하나씩 따로 먹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있을 수도 있지만... (그림 출처:http://blog.naver.com/astalw/220962102438)


아바티의 작품(The Cloister) 앞에 섰다고 가정해보자.(이를 위해 귀찮더라도 '5초만' 다시 올라가보자.) 우선, 작품이 눈에 들어온 순간, 음... 이런 생각이 든다. 그 다음으로 하는 것이 '분류하기'다. '소년이 앉아있고, 돌 같은 것들이 좀 있고, 풀이 별로 없는 것으로 봐서는 더운 지방이고... '이런 식으로 말이다.


우리 뇌가 분석을 시도하는 순간, 미술 작품이 지니고 있던 특권이자 아름다움인 대기는 어느새 사라진다. 이는 마치 라면 봉지에서 양념 수프와 면, 그리고 야채 가루 등을 하나씩 따로 맛보고 라면이 뭐 이런가 하는 것과 동일한 처사다.


무턱대고 도슨트를 따라가면 그림이 귀에만 맴돌게 되어 결국 팔짱끼고 듣게 된다.


작품 설명을 들으면서 끄덕이기보다 입구 앞 설명이나 팸플릿에 '1분'만 투자하자


결론은 작품을 조금 더 편안하게, 그리고 상상하면서 보자는 것이다. 그렇기 위해서는 작은 실마리가 필요하다. 바로 상상을 위한 일종의 '조미료'이다.


무턱대고 도슨트나 모바일 가이드를 듣는 것은 지양하는 것이 좋다. 우리는 그림을 보러 온 것이지, 듣거나 이해하러 온 것이 아니다. 딱 1분 정도만 작가가 어느 시대를 살았는지, 고향은 어디인지, 당시에 상황이 어떠했는지를 생각해보자. 그리고 그 느낌을 즐기면 되는 것이다.


소개팅에서 진상은 상대방은 신경쓰지 않고 자기 말만 하는 사람이다. 작품에게 감정표현이 가능하다면 비슷한 결과가 나올 것이다.
작품을 만나는 시간은 소개팅과 같다.


우리가 흔히 소개팅을 하면 기본적으로 묻는 몇 가지가 있다. 그러한 질문의 의도는 상상을 위한 것이다. 상대방과 내가 얼마나 잘 맞고 호감을 갖을 수 있을지 말이다. 그런 정보를 지니고 상대를 만나면 실제 그 사람 앞에 섰을 때 조금 더 친근해지고 말하는 한 마디 한 마디가 이해가 된다. (물론, 더 싫어지는 부작용도 있다)


작품도 마찬가지이다. 어떤 작품은 하나하나 뜯어보면서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야 하는 경우도 있지만 이렇게 풍경을 그린 작품들은 그 자체가 주는 느낌을 받는 것이 의미가 있다. 이처럼 모든 작품을 볼 때 동일한 눈으로 보는 것은 아니다. 떡볶이를 먹을 때와 스테이크를 먹을 때 우리가 다른 것처럼 말이다. 중요한 것은 내가 상대방의 정보를 알고 보았을 때 좋으면 더 알아가면 되고, 싫으면 또 다른 소개팅을 기다리듯이 넘어가면 그만이다.


짧게는 몇 년, 길게는 몇 백 년 전의 작품을 볼 때 그에 맞는 모드로 우리 눈을 변경하기 위해 시간을 투자한다면 앞으로 작품을 보는데 조금 더 만족스러운 시간이 될 것이다. 소개팅 전의 설렘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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