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태와 마비
오랜만에 쓰는 글입니다. 한동안 아무런 생각도 하기 싫다는 생각이 들었고, 어떤 기분도 느끼고 싶지 않다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냥 그렇게 두었습니다. 읽는 것도, 쓰는 것도, 사람들과 관계를 쌓는 것도, 심지어 음악을 듣는 것도 그냥 다 귀찮아져서 텔레비젼을 보고, 운동을 하고, 잠을 실컷 잤습니다.
2019년의 반은 이미 세 달 전에 지나가 버렸고, 저에게 그 지나간 시간들은 체력적으로 좀 힘에 부치는 날들이었습니다. 출장이 너무 많았고, 늘어지는 일들이 많았고, 또 저 혼자 해결하긴 어려운 문제들이 많이 있었거든요. 작지 않은 목소리로 질문하는 일들이 피로하게 느껴지는 걸 보면 이제 저도 나이가 들긴 했나 봅니다. 마음을 누군가 쉐이커에 넣고 있는 힘껏 흔들어 버린 것 처럼 뒤죽박죽입니다. 단 한 번도 이해할 수 없던, 아니 사실은 이해하고 싶지 않았던 이들을 이해하게 되었지만 언제까지나 존경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이들이 실망스럽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옳다고 생각하는 일 앞에서 물러설 줄 몰랐던 호기로움은 힘을 잃고, 세상에 옳은 게 있기는 할까 라는 물음만 남았습니다.
인생은 끝나지 않았는데 젊음은 끝나버린 것 같고, 청춘 그 다음의 삶은 어떤 색깔이고 형태일지 좀처럼 그려지지가 않습니다. 형편이 나아졌고, 걱정거리도 줄었는데 비 맞은 운동화처럼 질퍽대는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요? 사람들이 바라는 것, 갖고 싶어하는 것이 다 시시하게 느껴집니다. 저 역시 그렇구요. 김지운 감독이 얘기한 예민하고 게으른 족속이 되어버린 기분입니다. 나는 그런 사람이 되고싶지 않거든요. 일을 잘, 많이, 그리고 열심히 할 수 있는 생각보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 동안 나는 조금더 스퍼트를 내고 싶습니다. 그래서 그 시간을 좀더 늘릴 수 있다면 더욱 좋겠고요.
삶의 권태가 나를 집어삼킬 때마다 친구들에게 편지를 쓰는 게 큰 위로가 됐습니다. 어떤 친구에게는 신이 너에게 주는 가장 좋은 것들 중에 내가 있는 것 같아 기쁘다고 했고, 다른 친구에게는 용기의 조각들을 모아 힘을 내겠다고 약속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멸망해라 지구!를 외치며 응석을 부릴 때도 있었어요. 편지를 쓴다는 것은 약속이자, 주문이자, 기도이자, 노래라고 말했던 사람이 있습니다. 그의 말 처럼 나의 약속이자, 주문이자, 기도이자, 노래인 그 편지들이 제 소중한 이들에게도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헬싱키에 온 지 어느덧 한달이 지났고, 두 계절간 매일 번복되는 마음과 생각들을 재 보다가 이제야 희미하게나마 결론을 봅니다. 선의를 가지고 최선을 다 해도 세상에는 안 되는 것이 있고, 나에게 옳다고 생각되는 것이 누군가에게는 고개를 돌릴 만큼 잘못된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을요. 그리고 그럴 때 필요한 건 역시나 어려운 결정을 할 수 있는 용기입니다. 올해 생일 소원으로 빌었던 자유와 용기와 정의 중 아직 그 무엇도 이루지 못했지만, 남은 3개월 동안은 용기라는 것에 집중해 보려 합니다. 옳고 싶은 마음에 늘 겁이 났던 어리숙함이 그럭저럭 용인될 수 있는 젊음은 생각보다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요.
겨울이 오기 직전 한국으로 돌아갈 때 쯤에는, 조금 더 튼튼한 몸과 마음이 준비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냥 그랬으면 좋겠다는 마음만으로 끝나지 않았으면 해서 이렇게 글을 써 둡니다. 권태와 마비에 승복할 수는 없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