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Time Writers - 유년의 사랑
유년 시절 전학이 무척 잦았습니다. 1년 넘게 다닌 학교가 딱 한 군데 뿐이었으니까요. 저는 천성이 겁이 많고, 긴장을 잘 하는 편이었지만 이런 걸 티내는 걸 유난히 더 창피하게 여겨서 티를 안 내려고 엄청 노력하는 아이였습니다. 덕분에 그 당시 제가 받는 스트레스는 저만 아는 스트레스가 되었죠.
3학년 2학기의 어느 적당한 가을날 세번째 전학을 가게 됐었습니다. 이 때쯤엔 나름 전학에 대한 짬바 같은 게 생겨서 자기 소개를 하는 것도 제법 능숙해졌었던 것 같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공간,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집단,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늘상 있었던 교실 내 정치 이런 것들은 어른이 된 지금도 그렇듯 무섭고 어색했습니다.
거기서 처음 사귄 친구가 지연이었습니다(가명). 이름은 가물가물하지만 성이 권씨어서 별명이 권총이었던 게 기억납니다. 반듯하게 자른 단발머리에 청자켓을 자주 입고, 하얀 얼굴에 또랑또랑한 목소리를 가진 여자애. 반장이었어서 저에게 어떤 책임감을 느꼈던 건지 지연이는 밥을 먹거나 집에 갈 때 항상 저를 챙겼습니다. 저희 집은 사실 학교 바로 건너편 아파트였는데도 그 신호등 하나 같이 건너자고 기다려주는 다정한 친구였어요.
아마 가족 외의 누군가에게 ‘사랑’ 비슷한 걸 처음으로 느낀 것도 지연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이 언제인지도 또렷하게 기억이 나요. 저희 아빠는 항상 저와 오빠에게 어디 가서 엄마 없는 애인 걸 티내면 안된다고 이런저런 훈계를 하셨지만 정작 자신은 어떤 면에서는 엄청나게 구멍인 모습을 보여주곤 하셨거든요. 그 중 제일 좋은 예는 도시락이었죠.
그 때 저와 지연이가 같이 다니던 학교는 4학년 부터만 급식을 줘서, 3학년들은 오후 수업이 있는 날 도시락을 싸가야 했습니다. 반 친구들은 보통 형형색색의 보온도시락 통에 예쁜 반찬을 담아와서 나눠 먹었는데, 전 아빠가 아침에 급하게 만들어 준 프렌치 토스트를 비닐 봉지에 담아갔어요. 열 살이었던 그 때의 저는 아빠한테 이런 걸로 투정부리는 것도 유치하다고 생각했지만, 이걸 친구들한테 보여주는 것도 곤란하겠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래도 점심시간은 왔고, 애들이 도시락을 꺼내는 동안 어물쩡대고 있던 저에게 지연이가 다가왔습니다. 밥을 안 싸온 줄 알고 걱정하는 눈치길래 가방에서 꾸깃꾸깃해진 비닐을 꺼냈는데 그때 지연이가 정말 진심이 가득 담긴 함성으로 “우와! 빵이네! 진짜 좋겠다!”라고 해줘서 당당하게 그 프렌치토스트를 책상 위에 꺼내놓을 수 있었어요..
지연이는 제 머쓱함을 알고 그랬던 걸까요, 아님 정말 진짜로 빵을 좋아해서 그랬던 걸까요? 어느 쪽이든 그 날 지연이가 나에게 선물했던 안도감과 으쓱함은 참 커다랗고 따뜻하고 말랑거렸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동성이기 때문에 우정이라고 생각하는 사랑, 그리고 이성이기 때문에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우정이 참 많다고 하죠. 사랑이란 건 드라마에나 나오는 건 줄 알았던 열 살, 정말 얼마 없는 유년의 기억에서 가장 생생한 순간이 그날 그 점심으로 남아있는 건 어쩌면 내가 지연이에게, 그리고 지연이에게서 사랑을 느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