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만난 공황, 그리고 요가.
오랜만에 만난 지인과 안부를 나누던 중 불현듯 올해 참 많은 일이 있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막상 그 상황들을 만났을 때는 감각하지 못하고 '별일 없이 지냈다.'라고 말했는데, 얘기하다보니 굵직한 사건들이 생각보다 많았거든요. 퇴사, 이직, 반년만의 휴직, 반려동물과의 이별, 여행, 그리고 공황의 재발.
완치 판정 1년만에 병원을 다시 찾았을 땐 사실 꽤 절망적이었습니다. 저는 기본적으로 삶에 어떤 일이 생겨도 나는 이겨낼 수 있다고 믿는 편이었는데, 이번에는 정말이지 완벽하고 철저하게 두려움에 압도당해 있었거든요. 평생 꿈꿨던 여행지에 도착해서 공황에 잡아먹힌 스스로가 미웠고, 출장이 많았을 때 그랬던 것 처럼 낯선 환경과 비행에 대한 불안이 이유일 것이라 생각했지만 집에와서도 좀처럼 숨이 길어지지 않아 겁이 났습니다. 명치 안 쪽이 땡땡하게 묶여서 2주 정도 식사를 거의 못했고, 잠들 때에도 아침에 일어날 때에도 가쁜 숨을 몰아쉬다 병원에 갔습니다.
삶에 일어날 수 있는 커다란 사건들이 나를 덮쳤을 때도 끄떡없던 스스로가 그리웠고, 스스로가 싫은 나의 모습 그 자체가 너무 무서웠습니다. 이렇게 못 먹다가 죽는 건 아닐까, 이렇게 회복을 못 하다가 정말로 미쳐버리는 건 아닐까, 다시 괜찮아질 수 있을까. 온갖 생각이 머리와 마음을 어지럽히며 힘들게 가라앉힌 심장을 다시 달려다니게 만들 때 마다 엉엉 울었어요. 그리고 나면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했고, 사채업자에게 밀린 빚을 갚듯이 잠을 아주 많이 잤고, 온 힘을 끌어모아서 산책을 갔고, 숨소리를 들으며 마음 속을 한겹한겹 들춰보았습니다.
상담과 요가, 명상, 글쓰기를 계속하며 오답과 힌트를 오갔고, 그 과정 안에서 찾아가는 중인 방향들이 있습니다. 올해 일어났던 일들 중 어떤 것들은 나에게 아주 큰 상실이었고, 나는 그 감정의 인식 자체를 회피했다는 것. 무언가 혹은 누군가를 진심으로 좋아하게 될 때의 나는 스스로를 두고갈 수 있는 존재라고 생각한다는 것. 혼자서 스스로 해내는 것에 긍지를 가졌던 것은 내가 그것을 원해서가 아니라 나에게는 그 방법 밖에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는 것. 나에게 있는 여러 모습 중에서 나는 스스로가 좋아하는 모습만을 나로 인식하고 그렇지 않은 모습들을 의식하든 못하든 간에 외면하고 부정했다는 것을.
스스로에 대한 믿음과, 새로운 것들을 만나는 것에 대한 용기가 많이 약해졌던 시간이었습니다. 그 시간에서 날 벗어나게 하는데 가장 큰 도움을 줬던 건 요가였어요. 필연처럼 집 아랫층에 요가원이 생겼고, 간간히 가던 그 곳에 시간이 날 때마다 내려가 수련을 하며 몸과 숨과 마음을 느끼는데 시간을 많이 썼습니다. 용기를 내며 매번 조금 더 시도해보는 빈야사, 그리고 반드시 괜찮아질 거라는 믿음의 숨을 선물하는 인요가를 수련하며 땀을 흘리고, 숨을 깊게 쉬고, 고통의 오고 감을 관찰하는 시간과 정성이 쌓여가면서 회복되는 몸과 마음을 느끼고 있습니다.
무력감에 절대 삶을 내어주지 않겠다고 오기로 버티던 날들을 지나, 이제는 그러한 오고감을 침착하게 바라보자며 숨을 쉽니다. 매번 뜻대로 되는 건 아니고, 그 안에서도 파장은 또 높고 낮음을 반복하겠지만, 그럼에도 음식을 삼키는 것, 편안한 숨을 쉬는 것, 심장이 제 속도로 뛰는 것 만으로 고마움을 느끼는 요즘입니다. 수련 중 선생님의 이야기를 듣다가, 아 이렇게 아팠던 건 어쩌면 그동안 너무 자연스러워 인식하지도 못 할 만큼 당연했던 것들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배우라고 삶이 나에게 준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마땅히 느낄 수 있는 감정들을 있는 그대로 마주하고, 이를 어떻게 해보려고 애쓰지 않고, 오고가는 감각과 감정을 고요하게 지켜보며 단단해도 유연한 몸과 마음을 가진 어른으로 머물고 싶습니다. 아직은 서투른게 훨씬 많지만, 이 또한 무언가의 과정이겠지요. 겨울이 지나면 반드시 오는 봄을 생각하며 오늘도 모두의 평안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