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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선비 Oct 10. 2018

오선비의 철학사 탐방 25

중세철학 편 - 1. 공자왈 맹자왈 a

* 여러분의 철학 입문을 위해, 중요한 것을 담으면서도 최대한 쉽게 쓴 철학사입니다. 차분히 읽으시면 반드시 도움이 될 것을 약속드립니다:)



 오늘은 수경낭자가 아버님과 함께 이야기를 했는데, 아버님께서는 항상 공자왈~, 맹자왈~ 하셨다. 사실 수경낭자는 공자에 대해서도, 맹자에 대해서도 잘 아는 바가 없었다. 다만 아버지께서 항상 논어와 맹자를 읽고 계셔서 이름만 대충 알 뿐이었다. 수경낭자는 항상 이상하게 생각했다. 그냥 말씀하시면 되는 것을, 항상 누가 말하기를~ 하면서 책을 읽듯이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분들이 말씀하신 것이 뭐가 그렇게 중요하길래 항상 이름을 말씀하시는지 아버님께 여쭈어보면, 아버님께서는 항상 "그것이 선인들에 대한 예의이니라"하고 말씀하실 뿐이었다. 아버님과의 대화가 끝나고 나면 수경낭자의 머리 속에는 공자왈~ 맹자왈~ 이 맴돌았다. 수경낭자는 이 듣기도 싫은 메아리에서 도망치고 싶어서 저잣거리로 향했다. 저잣거리에는 역시 오선비가 드러누워 잠을 자고 있었다.






수경낭자 오선비님은 오늘도 잠을 자고 계신가요? 지겹지도 않으신가요?


오선비 오 이게 누구요 참 오랜만에 오셨구려? 그리고 묻는다는 것이, 잠이 지겹지도 않냐는 것이오? 껄껄


수경낭자 그래요, 오선비님은 항상 잠만 주무시고, 갑자기 궁금해져서 그래요.


오선비 껄껄 거 누가 말하더구려, 잠이 보약이라고, 그래서 보약을 사 먹을 돈이 없어서 잠을 잤소만?


수경낭자 호호 그런가요? 그런데 오선비님도 말씀하실 때, 누가 말하기를~ 하고 말씀하시네요? 꼭 우리 아버님 같아요. 


오선비 껄껄 아버님께서 공자왈~ 맹자왈~이라도 하셨소?


수경낭자 네 맞아요! 어떻게 아셨어요? 전 공자왈~ 맹자왈~ 만 들으면 머리가 어지러워요. 도대체 그게 뭐가 그렇게 중요한 건가요?


오선비 껄껄 중요 하다마다! 공자와 맹자는 위대한 우리의 스승들이 아니겠소? 그러니 그분들의 말을 곱씹을 때면, 그분들의 생각을 존경하는 의미로 이름을 말해줘야 하지 않겠소?


수경낭자 그렇긴 하지만... 꼭 그분들의 책을 읽지 않으면, 한 마디도 할 수 없는 것처럼 느껴진단 말이에요!


오선비 그 말도 일리가 있는 것 같소이다. 뭐 알면 말하는 것이고, 모르면 말하지 않고, 그런 것은 아니니 맘 껏 말해도 되오. 다만 공자왈~ 맹자왈~ 하면, 책 꽤나 읽은 사람처럼 보이지 않겠소? 껄껄


수경낭자 호호 그것도 그렇네요. 그러면 오선비님은 좋아하는 구절이라도 있으신가요?


오선비 껄껄 나도 있다마다! 저 건너 마을에 개똥이가 나한테 해준 말이 있소.


수경낭자 개똥이요? 유명한 사람인가요?


오선비 나에게는 아주 유명한 사람이지! 개똥이가 말하기를, 맘에 드는 낭자가 있다면, 한 번쯤은 안아봐야 한다고 말했소. 그러니 수경낭자를 한 번 안아봐도 되겠소?


수경낭자  어멋!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무례하시군요! 저는 이만 아버님께 돌아가 봐야겠어요!


오선비  껄껄껄






 성(聖) 아우구스티누스가 죽은 뒤부터, 찰스 대제의 통치에 이르는 시기는 철학적인 방면에서 다른 시기보다 덜 생산적이었다. 하지만 두 명의 뛰어난 사람이 있었는데, '위(僞) 디오니소스'와 '보에티우스'이다. 이들은 각각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전통을 대표하며, 이 전통을 중세에 전달하는 다리의 역할을 한다는 점이 특히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을 빼놓는 다면, 말 그대로 이 시기는 철학적으로 암흑시대였다. 로마는 이미 야만족들의 침임으로 무너져 내렸고, 학문, 문화, 예술 모든 것이 함께 무너져내려 갔다. 즉, 헬레니즘시대가 막을 내리고 있었다.


보에티우스


 과거 로마가 희랍을 지배하면서, 로마는 희랍의 찬란한 문명을 받아들이고 헬레니즘 문화를 이룩했다. 그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는 야만족이 로마의 문화를 받아들여갔다. 하지만 과거처럼 어떤 문화가 새로 이룩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야만 민족은 문화적으로 어떤 지경에 이르기도 전에 로마의 문화를 받아들였고(특히 기독교 문화를), 명목적으로 기독교화가 되었다. 그들은 대부분의 문화를 기독교적으로 해석을 해나갔으며, 어떤 완전히 새로운 시대, 즉 중세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과연 언제부터를 중세로, 언제까지를 중세로 해야 하는가는 의견이 분분하다. 하지만 중세시대의 이행은 여러 학원들의 이정표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 정도 길이 잡힌다. 787년에 찰스 대제가 영토 안에 있는 여러 수도원들에다 학원을 부설하고(병설 유치원처럼) 지원하는 칙령을 내렸다. 다행히 교사들이 넉넉하여 학원은 점차 발전해갔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이 학원들은 변방의 여러 곳에서부터 지적인 원조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즉, 외부로부터 훌륭한 교사들은 학원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어떤 프랑스인 수도사가 쓴 연대기가 있는데, 사실이고 아니고를 떠나 당시의 분위기를 충분히 엿볼 수 있다.


찰스 대제의 시대에, 두 명의 스코틀랜드 사람이 지방 해안에 상륙하였다. 이 두 사람은 성경과 여타 학문에 대해서 학식이 매우 풍부하였다. 이 두 사람은 물건을 팔지 않고, 자신들의 지혜를 팔았다. "지혜를 원한다면, 우리에게 와서 지혜를 받으시오. 우리는 지혜를 팝니다." 이 두 사람의 소식을 들은 찰스 대제는 이들을 궁정으로 불러 묻기를, "너희들이 정말로 지혜가 풍부하다면, 좋다 내가 그 지혜를 사겠다. 무엇을 원하느냐?" 하니, 두 사람이 말하기를, "적당한 처소와 고귀한 영혼, 그리고 우리가 여행하는 데 필요한 물건, 즉 음식과 입을 옷이 필요합니다." 하니 찰스 대제는 매우 기뻐하며, 궁중에 머물게 하였다. 후에는 나라의 지방으로 보내 여러 사람들을 가르치도록 하였다.


 어쨌든 이 시기에는 이처럼 여러 학원들이 설립되었고, 이 학원들 중 어떤 학원은 흥하고, 어떤 학원은 사라지기도 했다. 이 학원들 가운데 몇 개는 대학으로 발전하였으며, 여러 학부로도 나누어졌으며, 학원에서 수료하게 되면 학위가 수여되었다.


학원에서의 교육


 학원에서 가르친 교과 내용은, 어떤 표준을 따랐는데, 그 표준은 이렇다. 우선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었다. 3 학과(trivium)와 4 학과(quadrivium)이었는데, 3 학과는 가장 기본적인 예비 과목인 문법, 수사학, 이론학이었고, 4 학과는 좀 더 수준이 높은 네 과목, 산술, 기하학, 물리학, 음악으로 되어 있었다. 그리고 '모든 학문의 여왕'이라고 일컬어지게 된 철학은 모든 학문이 종합적으로 절정에 도달할 때 이룩되는 어떤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철학은 예배당, 사원, 학의 전면에 보통 '아름다운 처녀'로 묘사되었다. 그 처녀의 머리는 구름들 사이에 있었고, 손에는 사다리를 들고 있었다. 이 처녀는 사다리를 통해서 하늘로 높이 올라가는 모습이었다. 즉 철학은 신학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게 되었다.


3학과와 4학과


 흔히 이 시기의 철학을 '스콜라 철학'이라고 말하는데, 이 말의 뜻은, 중세의 여러 학원에서 생활하고 일하는 모든 사람들의 철학적인 성찰을 말한다. 물론 이 스콜라 철학이 통일된 하나의 노선을 따라 발전하지는 않았다. 이들의 철학은 서로 대립되는 입장도 있었고, 전제가 다른 철학들, 여러 가지 방법론들이 있었다. 다만 스콜라(학원) 철학이라고 통틀어 말하는 이유는, 그들의 모든 철학적인 성찰이 학원과 긴밀한 연관성을 지녔기 때문이다.


 여담으로, 이 스콜라 철학이라는 말은 근대 이후엔 약간 불명예스럽게 사용되었다. 마치 플라톤에 의해서 소피스트라는 말이 말재간만 부리는 부정적인 이미지로 낙인찍힌 것처럼 말이다(물론 플라톤의 말도 일면 타당함이 있다). 스콜라 철학이 근대 이후, 이론만 캐묻는 것, 말재간만 부리는 것, 백성을 어리석게 만드는 몽매주의로 매도당한 것에는, 근대 철학자인 '프란시스 베이컨'이 크게 기인한다. 근대는 과학의 시대이며, 완벽하게 새로운 철학이 시작되는 시기였으므로, 그의 눈에 볼 때 스콜라 철학은 말 그대로 비과학적인 어떤 것으로 비추어져 보일 수 밖에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철학에는 여러 방법론이 있고, 여러 전제들이 있다. 그러므로, '스콜라 철학'이 본래 어떤 것을 뜻하는지, 그리고 그들도 충분히 철학적으로 훌륭했다는 것 역시 알아야 한다고 본다.


 중세의 다양한 철학을 일관하는 변함없는 태도가 있는데, 그것은 권위에 대한 깊은 존경, 그리고 이 존경에서 당연하게 따라오는, 희랍의 사상가들과 교부들 그리고 성경의 구절들을 끌어오는 태도였다. 이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은(특히 근세 초기) 이를 지적 노예성, 혹은 맹종으로 보기도 했다. 하지만 이렇게 여러 구절들을 끌어오는 데에는 사실 이유가 있었다. 당대 사람들이 생각하기로, 권위자의 말을 인용할 수 없는 사람은, 바로 이 주제에 관한 역사를 모르고 있는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그리고 반대로 권위자의 말을 인용할 수 있는 사람은, 이 말들을 기반으로 자신의 의견을 새롭게 형성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본 것이다. 이처럼 단순히 권위에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이 권위를 안다는 것은, 그만큼 주제에 대한 기반이 충실함을 뜻하는 것이었다. 





철학자 소개


* 위(僞) 디오니시오스

서기 500년경에 많은 저작을 내놓은 어떤 기독교 저술가이다. 위(僞)라는 것을 붙이는 이유는 이 사람이 누구인지 정확하지가 않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위는 거짓이라는 뜻이다. 일종의 가명 정도로 생각하면 된다. 이 사람은 신플라톤주의를 기반으로 저술을 했다.


* 보에티우스

정치계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던 로마 사람이다. 그리고 박식한 학자였지만, 고트족의 왕에게 붙잡혀 옥에 갇혀있다가 처형되었다. 옥에 있을 때 쓴 '철학의 위안'이라는 책이 유명하며, 이 책은 중세와 근대에 거의 기도서로 사용되었다. 이 사람을 기독교도로 보느냐, 아니면 이교도로 보아야 하느냐는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다.



 다음 내용은 공자왈 맹자왈 b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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