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선비 Oct 16. 2018

오선비의 철학사 탐방 26

중세철학 편 - 1. 공자왈 맹자왈 b


* 여러분의 철학 입문을 위해, 중요한 것을 담으면서도 최대한 쉽게 쓴 철학사입니다. 차분히 읽으시면 반드시 도움이 될 것을 약속드립니다:)




 보편자(普遍者)의 문제는 철학의 역사상 그 어느 다른 시기보다도 중세 초기에 가장 많이 논의된 문제다. 물론 이 보편자에 관한 논의는 이금도 이루어지고 있다. 생각해보면, 이는 굉장히 자연스러운 인간의 사고이다. 우리는 여러 가지 개별적인 사실이나 사물들을 지각하고 이것에 관해서 말을 하는데, 이때 보편자의 문제가 생겨난다. 문제라기보다는, 자연스럽게 보편자를 끌어오게 된다. 가령, 이것은 나무다, 이것은 바위다라고 말한다. 쉽게 말해서, 서로 다른 모양의 바위가 두 개 있다고 가정하면, 우리는 이것들을 전부 바위라고 말하지, 특정한 경우가 아니라면 바위 1, 바위 2라고 딱히 구분해서 말하지 않는다. 이렇게 되면, 플라톤적인 문제가 또 따라오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가 바위라고 말하는 이 '바위'라는 개념은 어디에 존재하는가? 실재 하는 것인가? 아니면 인간들의 대화 편의를 위해서 약속한 것뿐인가? 하는 등의 문제다. 물론 우리가 바위라고 부를 수 있는 것들을 바위라고 통틀어서 말하는 것이 왜 문제가 되는가? 하고 반문할 수도 있지만, 언제나 그렇듯 통틀어서 말하게 되면, 각각의 것이 가진 독특한 특성이 무시될 수 있다는 문제가 생겨난다. 이렇게 된다면, 우리의 생각이 개별적인 사물들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지게 될 수도 있다는 문제 역시 생긴다. 아무튼 이 통틀어서 말하고, 정의하는 것이 바로 보편자이다. 이 보편자는 가지적(可知的) 일 수는 있어도, 물리적인 대상은 아니다. 쉬운 예로 우리는 철수와 영희는 알고, 그 친구들을 '인간'이라고 부를 수 있지만, 우리는 세상 어디에서도 '인간' 그 자체를 볼 수는 없다.


 보편자의 문제를 정리해보면 이렇다. 보편자들이 어떤 특수한 것들의 존재를 가지고 있는가? 그것들이 자연 안에 현실적으로 존재하는가? 그렇지 않으면 그저 인간들의 정신 속에만 존재하는가? 혹은 보편자와 특수한 개별자들이 어떠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들을 문제 삼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하필 중세 초기에 이 문제가 특히 거론됐는가 하고 묻는다면, 이유는 이렇다. 헬레니즘 시간에 알아본 성(聖) 아우구스티누스가 그리스도교의 기반을 잡아두었고, 그 기반은 신(新) 플라톤주의에 기반이 있었으며, 신 플라톤주의는 당연히 플라톤에 기반이 있고, 플라톤은 가지적인 대상인 즉 이데아에(이를 보편자와 연관 지을 수 있다) 관한 물음의 답을 찾고자 했기 때문이다.


성(聖) 아우구스티누스


 여기서 잠시 '실재론(實在論)'과 '유명론(唯名論)'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좋겠다. 


 플라톤은 도덕적인 판단의 기준을 찾다가, 형상(이데아)의 실재성을 주장하게 되었고, 플라톤은 이 이데아란 반드시 존재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 생각을 신플라톤주의자들이 발전시켜, 이 이데아는 그 밑에 포섭되는 개별자들보다 더욱 선행하고, 본질적인 것으로 생각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과는 사뭇 달랐다. 개별과 보편은 존재적으로 분리될 수 없는 두 가지의 측면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이 형상(이데아)은 결코 독립적으로 실재할 수는 없으며, 우리가 어떤 지식을 가지게 될 때에 생겨나는 마음속의 관념, 즉 어떤 추상된 결과로 보았다.


 정말 단순히 말해보면, 플라톤주의는 보편자는 '그 자체로' 혹은 '절대적으로' 존재한다는 입장이고, 아리스토텔레스주의는 보편자는 '그 자체로'는 존재하지 않으며 '절대로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그래서 플라톤주의의 입장을 실재론,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을 유명론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 실재론과 유명론이라는 말은 주의해서 사용해야 한다. 극단적으로 주장이 갈리는 경우가 있는 반면, 온건하게 주장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유명론자들은 보편자가 절대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거부했을 뿐, 보편적인 개념들이 각각 사물들의 본성을 반영하고 있다는 것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결국 본질적인 문제는, 보편자가 정말로 존재하느냐 안 하느냐 하는 것이다.


 자 그렇다면 왜 중세의 사람들 특히 그리스도교 내에서 이 보편자의 문제가 가장 큰 논란이었는가에 대해 알아보자. 결론부터 말해면, 만일 보편자가 실재하지 않는다고 하면, 그리스도교의 기반 자체가 무너지기 때문이다.


 성(聖)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하기를, 하나님은 영원한 진리와 동일하거나, 이보다 더 우월하다고 하였다. 하지만 이 영원한 진리는 변화하는 세계 안에 있는 개별 물들을 다룸으로써는 발견할 수 없으며, 불변의 보편자들을 직관함으로써만 찾을 수 있다. 이처럼 보편자의 실재는 부정하면서, 하나님의 존재는 긍정한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았다. 그래서 하나님을 긍정한다면, 반드시 보편자의 절대적인 실재를 긍정해야 하고, 긍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실재론이 아닌 유명론적인 입장을 따른다는 것은 곧, 하나님은 실재로는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그저 내 마음속에만 있는 어떤 관념적인 어떤 것으로 되어버린다. 그렇기에 보편자의 문제는 아주 중요한 논의 거리였던 것이다.



* 다음 내용은 공자왈 맹자왈 c로 이어집니다.






가지적에 대해서 좀 더 알아보고 싶으시면 아래의 링크를 참고하시면 됩니다:)

오선비의 철학 용어 사전 - 가지적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