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원영 Dec 24. 2022

애착외상의 발달과 치료

북리뷰

 애착의 개념과 유형, 특징 등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으나 불안정애착이 ‘정신화’ 과정을 방해하므로 보다 건강하고 적응적인 정신화를 촉진하는 방법으로 치료하고 마음챙김이나 명상 등을 활용한다는 접근이 인상적이었다.

상담자가 애착 대상이 되어 공감어린 태도로 지지를 하는 방식이 흔히 사용되지만, 한켠으로는 이 접근이 어디까지 유효할지가 의문이었다. 애초에 절대적인 존재인 부모와 어긋난 허함이 타인을 통해 채워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곤 했다. 어떤 책에서는 ‘엄마가 주양육자가 아니더라도 엄마의 영향을 더 많이 받는 이유’를 임신 기간 태내에서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이라는 다소 감성적인 근거를 언급한다. 신생아 시기에 버려져 해외로 입양된 아이들이 생모를 찾고 싶어하고, 아무리 양부모가 잘해주어도 마음에 공허를 품고 있는 것도 ‘탯줄로 연결된 힘’이 그만큼 강력하다는 증거로 사용되곤 한다. 과학적으로 증명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사람들은 직관적으로 ‘엄마’의 절대적인 영향력을 알고 있다. 그것이 볼비가 말하는 진화생물학적인 측면에서 자기생존을 위한 이기적인 이유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하더라도, 한 인간에게 전 생애에 걸쳐 지대한 영향을 줄만큼 ‘절실한 문제’임은 분명하다. 그런데 이것이 단기간동안 만난 지지적인 상담자를 통해 치유된다는 것이 나로서는 판타지에 가깝게 들렸다. 아마도 내가 애착 대상에 대한 애착 기능을 비활성화시키는 전략으로 살아남은 회피형 애착에 가까운 사람이어서 이렇게 생각하는 것일게다. 그리고 이 사고 자체가 정신화 과정임을 안다.


 


 심리학 이론이나 상담 이론에도 시대별 유행이 있다. wounded healer가 유행이던 때도 있었다. 상처 받은 상담자만이 내담자를 이해하고 치유할 수 있다는 관점이다. 상담자들의 구원자 환상이 공감과 수용을 과하게 부풀리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했던 것도 사실이다. 애착 문제를 가진 이들이 절대적인 지지를 필요로 하는 상담 초기 기간이 분명 있지만, 어느 정도 선까지만 유효할 뿐 그 이후에는 자기 힘으로 성찰하고 자신의 부적응적인 패턴을 바꿔내려는 용기와 실천력이 요구된다. 육아의 목표가 독립이듯, 상담의 목표 또한 치료실 안에서 주어지는 지지가 끊어지는 외부에서도 적응할 수 있는 독립이다. 여기에는 개인차가 분명 존재한다. 책에서도 정신화는 고도의 정신 기능이고 마치 지능처럼 개인차가 있음을 명시하고 있다. 자기의 경험을 반추하고, 재조직하는 내적활동을 위해 내 사고와 감정을 들여다보는 정신화를 촉진하는 구체적인 방안이 궁금했다. 상담사가 아무리 통찰적인 질문이나 반영을 쉬운 언어로 해도 내담자가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 정신화 과정에 들어가기 이전에 자기의 감정과 감정으로 인한 신체반응에 압도되어 전전두엽 기능을 도저히 쓸 수 없는 상태가 되기도 한다. 애착 트라우마 세미나에서는 이같은 상태에 빠진 내담자에게 심호흡이나 숫자세기 등을 통해 내담자가 스스로 조절 가능한 상태로 돌아가는 과정을 반복하여 조심스럽게 끌고 가는 장면을 보여 주었다. 뿌리 깊은 애착 외상을 가진 내담자가 트라우마로 인한 압도되는 상태를 넘어서 정신화의 전과정을 소화하게끔 도우려면 다른 보조적인 방식이 많이 필요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실질적인 사례를 보고 싶었다. 저자의 클리닉에서는 명상을 위시한 마음챙김 훈련을 통해 떠오른 감정에 압도되지 않는 연습을 병행하는 것으로 추측되는데, 우리나라는 이같은 접근을 거의 하지 않고 있어 보다 유연한 세팅에 열려 있는 치료사가 많아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Fonagy는 정신화를 통해 타인의 행동을 의미있고 이해할만한 것으로 만드는 동시에, 자기 안의 여러 가지 자기와 타인과의 관계에 대한 표상에서 가장 적절한 것을 유연하게 쓸 수 있다고 하였다. 단순한 예로 A는 말하기를 좋아하여 나에게 온갖 질문을 하고, B는 과묵하고 이야기를 하기보다 듣는 것을 좋아하여 내가 가만 있으면 침묵이 유지된다는 이해가 있을 때 A와 B를 대할 때의 나의 배경지식과 대처가 달라질 수 있다. 하지만 애착 외상 등으로 인해 정신화가 어려운 사람은 상대가 악의가 있다거나 나에게 문제가 있다고 여겨 A를 나를 불편하게 하는 가해자로, B는 나를 싫어해서 말을 하지 않는 사람으로 해석해버릴 수 있다. 실제로 확인된 것이 아님에도 나만의 세계관에 사로 잡혀 내가 해석한대로 세상을 받아들이니 과한 감정적 반응이나 충동적인 행동이 나올 수 있고, 스스로를 돌아보는 일이 어렵다. 타인의 반응에 반사적으로 부정적인 반응을 하게 되기에 타인을 통해 자신을 경험하고 ‘자기주체적인 경험’을 하기 어렵다. 이 부분을 보고 나를 돌아보게 되었다. 나 역시 내 지레짐작으로 상대의 의도를 멋대로 해석하여 불필요한 긴장을 할 때가 있다. 나의 회피형 애착이 좀 더 선명하게 보이는 느낌이었다.


 


 애착에 있어 중요한 것이 근접성 뿐 아니라 ‘가용성’이라는 정리도 새롭게 다가왔다. 유아에게 부모는 절대적인 리소스다. 실제로 트라우마 치료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것 중 하나가 리소스다. 자신의 안위를 위해 내적, 외적인 자원을 얼마나 잘 사용할 수 있는지가 중요하기 때문에, 이 자원(리소스)을 상상하고, 감정이 몰아칠 때 이를 떠올리는 심상화 작업을 하기도 한다. 애착 외상자들은 애초에 주양육자가 적절한 리소스로 있어준 경험이 없기 때문에 리소스가 있어도 이를 알아보지 못하거나 알아본다 해도 자기를 위해 적절히 사용하지 못한다. 그래서 트라우마 치료시에 리소스를 찾고, 이를 편하게 대하면서 사용할 수 있게끔 하는 훈련을 하는구나 싶었다. 꼭 애착 외상같은 트라우마 경험자가 아니더라도, 일반적으로 새로운 도전이나 기회 앞에서 과도한 두려움을 가지고 부정적인 예견부터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것 또한 내가 활용 가능한 리소스를 쓸 줄 모르는 상태와 관련이 있지 않을까 했다.


 


 마음챙김과 정신화, 비애착과 애착을 언급하는 부분에서는 내가 이해를 하지 못한 것인지 저자가 서양인이고 불교의 동양적 언어를 적절히 의미를 담아 번역하지 못하여 개념을 정립하지 못한 탓인지 다소 헷갈리기도 했다. 볼비가 말한 애착과 불교에서 말하는 집착을 동일선상에 놓은 것부터 이해가 가지 않았다. 물론 인연을 아끼는 마음도 불교 관점에서는 집착이나, 애착이라는 용어는 인간이 타인에게 갖는 마음을 아우르기 보다는 유아가 태어나서 살아가기 위해 자기를 돌볼 대상에게 갖는 ‘안전을 확인하려는 상태’를 의미하는 쪽에 더 가깝다고 여기기 때문에 비교 대상이 맞는지가 의문이었다. 예로, 불교가 지향한다고 여기는 ‘비애착’ 상태라는 것이 세상에 집착을 놓아내어 공을 깨닫는 것이라면, 애착이론에서 말하는 비애착, 애착을 철회한, 애착 기능을 비활성화한 등에 등장하는 ‘비애착’은 깨달음이 아니라 포기에 가깝다. 그래서 안정애착이 비애착에 상호 기여한다는 것이 성립하는 말인지 잘 모르겠다. 안정 애착일수록 대상에 과한 집착을 하지 않는다는 뉘앙스라면 맞지만, 이는 불교적 관점에서 집착을 내려놓고 마음을 비우는 상태와 내용적으로 관련이 없고, 불안정 애착을 가진 사람보다 상대적으로 건강한 사고패턴을 가지고 있다는 수준으로 이해할 일이 아닌가 한다.  


 


 아이에게 엄마의 정서적인 거울 반응이 직접적으로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유아의 정서 상태에 대한 엄마의 정서 표현이 어떻게 드러나느냐를 보고 아이가 자기의 내적 표상을 만들어낸다. 애착 손상자의 해리 반응도 양육자의 빈약한 반응이 애착 손상을 일으키는 학대적 사건 자체보다 해리 반응에 더 영향을 끼친다고 한다. 즉 사건이나 상황 자체보다 애착 대상이 보이는 ‘정서 반응’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우리는 흔히 좋은 애착 관계라고 하면 늘 수용적이고 아이가 긍정적인 감정 위주로 느끼게 하는 ‘맞춰주는 양육’을 떠올리곤 한다. 하지만 Allen Shores는 양육에 있어 긍정적 경험 20와 부정적 경험에서 회복하는 80의 경험이 안정적인 애착을 만들어낸다고 하였다. 아이가 느끼는 감정에 대해 명명하고, 반영하고, 괜찮다고 정당성을 인정해주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는 뜻이다. 흔히 말하는 ‘수용한다’는 것이 무엇일까 생각해보았다. 아이를 수용한다는 것은 뭐든 다 받아주는 일이 아니다. 아이가 느끼고 생각하는 것이 어떻든간에 ‘괜찮은 것이고, 그럴 수 있는 것’이라 느껴지도록 반응해주는 일이 수용인 것 같다. 아이에게 정서적인 ‘비빌 언덕’이 되어준다는 것은 아이가 자기 감정을 괜찮은 것으로 여기고 이를 충분히 소화하여 조절하도록 심리적인 쿠션 역할을 해주는 일이다. 아이를 키우면 부딪히는 순간이 많이 온다. 이 과정에서 죄책감을 느끼기 쉽다. 심리적 쿠션은 고사하고 아이에게 상처를 준 것이 미안해지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결국 그 순간 내 감정에 대한 정신화가 엄마부터 되지 않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다. 이것이 되지 않는데 교과서적인 ‘공감하는 대화’, ‘마음 읽어주기’ 같은 매뉴얼은 자기계발서의 공허한 말처럼 다가와 ‘나는 왜 안되지?’하는 자책만 키우기 쉽다. 결국 정신화건 마음챙김이건 뭐건 어른부터 해야한다. 어른을 치유하면 아이들은 잘 클 수 있다고 믿는다.


 


 개인적으로 융분석을 받으며 내가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면을 마주하고 이를 통해 성장해나가는 길을 걷고 있다. 아이를 통해서도 나의 어긋난 부분을 발견하며 정신을 버쩍 차리기도 한다. 아이는 안정 애착으로 자라고 있는데, 아이의 사고방식을 통해 내 사고 패턴 속에 숨은 나의 두려움을 만나기도 한다. 이 책을 읽으며 나의 애착 유형으로 인해 어그러진 부분을 확인할 수 있어 감사했다. 특히 정신화 과정의 어디에서 이가 빠져있는지 알 수 있어 좋았다. 분석받는 과정은 물론 아이와 함께 하는 일상 면면에서 도움이 되리라 믿는다.

매거진의 이전글 공감의 위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