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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원영 Apr 20. 2022

공감의 위계

공감의 깊이를 가늠할 수 있을까

공감이나 연민 등을 나타내는 여러 영어 단어가 있다. 심리학자들은 그 정도와 범위에 따라 위계를 나눈다고 한다.


pity : 너 힘든 것 알아 (인식과 이해)

sympathy : 네가 힘들어서 걱정이 돼 (내가 신경쓰임. 내 괴로움으로도 닿음)

empathy : 네가 힘든게 느껴져 (너처럼 나도 느끼는 괴로움)

compassion : 네가 덜 힘들었으면 좋겠어 (네 고통에 나도 괴로우므로 고통을 덜어주고 싶은 욕구가 생김)


멘트의 차이가 아니다. 인식에서 나의 반응, 내 느낌으로 어느 정도 수준까지 공명하는지, 실천적인 공감으로 이어져 친절한 마음씀과 행위가 동반되는지 등의 단계가 있다.


무 자르듯 자를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때로는 pity 수준에서도 compassion에서 요구되는 실천적 공감 행위가 나올 수 있고 반대로 실제적으로 행위가 나오더라도 내가 가슴으로 느끼는 공감없이 머리로 인식하는 수준의 이해에 머무를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상위 단계가 하위를 포함하는 개념이라는데 그렇다면 compassion까지 가는 경우가 많지는 않을지도 모르겠다. 배우자나 애인이 문제해결을 위해 노력을 해도 '도무지 공감할 줄을 모른다'는 말이 나오는 것을 보면 앞단계가 없다는 뜻이 아니겠나. 즉 나처럼 너도 힘들게 느끼지는 않잖아, 알아주지 않잖아-가 깔려 있는게다. 그렇다고 '그럼 당연히 싫지. 나라도 싫고 힘들겠어.'라는 공감적이고 친절한 말이 붙어 있다고 이것이 정말 상대처럼 느끼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사교적 차원에서도 충분히 인식만을 바탕으로 할 수 있는 멘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정한 공감은 내가 공명하는 수준 혹은 스킬과 상대 역시 느끼고 만족해하는 수준에 따라 상대적으로 결정되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프로공감러같이 따스한 사람들이 있지만 가만히 관찰하고 느끼다보면 미묘한 균열이 있기도 하다. 때로는 오지랖과 무경계로 넘어서기도 한다. 단순한 일은 아닌 듯 하다. 가슴으로 만나는 일이 그래서 중요한가보다. 물론 이 모든 것이 진정으로 가능하려면 자기 자신과 가슴으로 만날 수 있어야 할게다. 개인적으로는 이 단계를 밟지 않고서는 함부로 공감이나 연민, 연대 등의 말이 내 것인양 쓰고 싶지 않다. 물론 일상에서야 여러 스펙트럼을 넘나들며 느끼고 또 쓰면서 살겠지만 말이다.



자폐는 흔히 공감능력이 없다고 묘사된다. 눈맞춤도 잘 되지 않고 타인의 감정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 연구에 의하면 자폐아동이 상대 감정을 인식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지만 상대의 감정을 지나치게 자기 것으로 느끼고 압도되어 닫아버리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자폐 아동들이 동물에게 과도하게 공감하거나 신비로울 정도로 서로 교감하는 모습도 흔히 관찰된다고 한다. 공감능력이 없다고 함부로 말할 수 있을까? 아직 우리는 모르는게 많다.

일반 아동도 여러 스펙트럼 내에서 보이는 행동 양상이 다르다. 어른도 마찬가지다. 어린 시절의 나는 키우는 강아지가 예방주사를 맞으러 갔을 때 문밖에서 통곡을 했다. 내가 가진 주사 공포가 덧씌워져 강아지가 너무너무 아플 것 같았고, 그 강아지가 마침 몸이 약해 무슨 주사를 맞으면서 아파하는 것을 본 후로 내가 끌려가서 주사를 맞기라도 하는 것처럼 무섭기도 하고 또 불쌍해서 펑펑 울었다. 당시 수의사가 어이없어하며 정작 얘는 잘 있는데 네가 왜 그러냐고 했던 기억이 난다. 나는 공감력이 뛰어났을까? 그래서 압도된걸까? 그냥 내 공포증의 연장이었을까? 알 수 없다.

얼마 전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하나 봤는데 주인공의 아빠가 돌로 변하는 장면에서 딸이 울먹였다. 그리고 나중에 재회하는 감동적인 장면에서도 코가 발개져서 안 우는 척 애를 썼다. 하품하는거라며 딴청까지 피운다.  이 녀석은 공감력이 뛰어날까? 그럴지도 모른다. 아주 섬세한 부분에서 슬퍼한다. 그런데 친구들과 놀 때 보면 순간 너무 좋아서 자기가 좋으면 남도 좋은 줄 알고 앞서 나가는 면이 있어 그 현상만 보면 공감이나 배려 부족 등으로 보일 수 있다.

우리는 겉으로 보이는 언행만으로 공감이니 뭐니 운운할 수 없다. 연기하기 쉽기도 하고 실제와 달리 오해받기 쉽기도 하다.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르지 않나. 좋은 말이 가볍게 소비되는 시대일수록 깊은 물길을 쳐다볼 줄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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