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원영 Jan 25. 2023

감정을 돌본다는 것

나 자신의 양육자 되기

 <감정을 돌본다>고 하면
무엇이 생각나는가?


나는 한때 감정돌봄이나 자기돌봄, 자기사랑 등이 편하고 좋은 감정이 들도록 기분 좋아지는 일을 하는 것인 줄 알았다.


아이를 돌본다고 할 때 흔히 떠오르는 모습이 기분 좋게 먹이고 놀아주는 일이듯이 감정을 돌본다고 하면 자연스레 음악을 듣고 따스한 차를 마시면서 편안한 시간을 보내는 등 스트레스를 푸는 소위 '힐링타임'을 연상했더랬다.


아이를 키우다보면 돌봄이 그리 녹록치 않음을 알게 된다. 놀이치료를 하게 된 지금은 더더욱 돌봄은 단순히 아이의 기분 좋게 해주는 일이 아님을 안다. 육체의 안녕을 포함해 아이가 느끼는 정서를 알아차리고 이에 이름을 붙여 되돌려주어 아이가 스스로 감정을 조절할 수 있도록 담아내는 역할을 포함하는 쉽지 않은 일이다.


감정 돌봄도 마찬가지다. 나를 편하고 좋은 상태로 만드는 일이 돌봄의 전부가 아니다. 내가 무엇을 느끼는지, 그 정서의 가장 밑바탕에 있는 감정은 또 무엇인지, 그 아래 깔린 나의 욕구가 무엇인지를 살펴보아 스스로 감정을 조절할 수 있게 돕는 일이 다 포함된다.


가장 기본이 되는 감정을 핵심감정, 바탕감정이라 부른다. 내가 지금 느끼는 감정은 2차 감정일 수 있다. 핵심감정으로 인해 촉발된 2차적인 감정이거나 상황을 받아들이고 해석하는데에서 부차적으로 발생한 감정일 수 있다. 이것이 커드래서 핵심 감정을 가리기도 하고, 핵심 감정을 느끼기 두려워서 방어하느라 2차감정을 키우기도 한다.


요즘의 나는 주말부부 등의 상황이 다시 닥친 것에 대해 분노하고 있다. 이 분노를 다루려고 해도 영 마뜩치가 않다. 이것이 전부란 말인가? 나는 정말 무엇에 분노하는가? 인생을 뒤흔들고 내 발목을 잡아 끌어 앉히는 이 상황 자체인가? 남편인가? 가만 들여다보면 분노 이면에 진짜 다른 감정이 있음을 알게 된다. 사실 나는 외롭고, 혼자서 또 여러 일을 해내야한다는 점에서 버겁다고 느낀다. 마치 나의 아버지가 혼자 애쓰며 지치고 외로워 가족에게 화를 냈듯이 나도 그러고 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힘겹게 겨우 뭘 해놓았더니 멋 쓰게 된 것에는 화가 나는게 맞다. 하지만 이게 전부는 아니다. 앞으로 양육 포함한 여러 과정을 혼자 고군분투하며 헤쳐나가야 해서 괴롭다. 이 상황에 화가 나니 분노가 핵심감정이라 착각하기 쉽지만 그 이면에는 외로움, 힘겨움이 있다. 분노는 외로움에 대한 2차 감정이다. 외로운 상황을 벗어나기 어려운데에서 오는 짜증이다. 외부의 얼토당토 않은 이유로 벌어진 상황이라  슬픔보다는 분노를 느끼는 것 같다.


아무튼 분노는 분노고, 혼자 아이들을 키우면서 내가 하고픈 일을 하기 힘들어진 상황에서 좌절감을 느낀다. 좌절과 우울, 고독감 등이 스며 있는 상태를 바라보며 '그래서 어떻게 해야하지?'로 흐르는 사고를 잠시 꺼둔다. 일단 그런 내 마음을 바라보고 적당한 이름을 찾아주려 한다.


외롭니? 좌절스럽니? 슬프니? 화가 나니?


보다 명료하게 나 자신에게 되돌려주기 위해 시간을 갖고 꿈에 나온 이미지를 묵상한다. 이렇게 해서 내 방식으로 감정을 돌봐준다. 일시적인 달램으로 덮지 않고 괴롭더라도 지켜본다. 이것이 내가 아는 감정돌봄이다.


아이를 돌볼 때에도 보기 괴롭거나 거슬린다고 빨리 그 상황을 없애려고만 하면 아이는 자기 마음이 어떤지 알 기회를 박탈 당한다. 자기 감정을 돌볼 줄 모르는 어른이 아이의 감정도 얼른 지워버리고 자기 맘 편한 쪽으로 바꾸려고 한다. 일방적인 양육도 부부간의 갈등도 감정을 돌볼 줄 몰라 일어나는 일인지도 모른다. 대화 스킬만으로는 되지 않는 부분이다. 나 자신을 돌보지 못하면 타인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돌볼 수 없다.


감정을 돌보는 일은 감정을 바라보고 바탕에 깔려 있는 핵심감정을 알아봐주는 일이다. 정말 무엇을 느끼고 바라고 있는지를 알아주고 이름 붙여 불러주는 일이다. 그래도 괜찮다고 해주는 일이다. 충분히 알아준 후에 '그럼 어떻게 할까?'라고 자문해도 늦지 않으며, 그 답변에도 힘이 생긴다. 당장 괴로움을 쳐내기 위해 뭔가를 선택하면 잠깐 잊거나 기분전환이 되더라도 그 감정은 또 올라온다. 이 상태가 지속되면 지배적인 정서로 굳어져 마치 성격처럼 보일 수 있다. 좌절을 받아주지 않아 매번 짜증으로 올라오지만 부모가 이를 전혀 반영해주지 못해 마치 짜증스러운 성격을 가진양 오해 받는 아이가 있다면 누구나 아이의 좌절 포인트를 알아주고 공감해주라는 솔루션에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나 자신에게도 마찬가지다.


내 마음을 관찰하고 진짜배기를 알아주고 이름 붙이기. 나를 가장 잘 알아주는 제1친구를 나 자신에게서 발견하기. 엄마가 해주지 못한 것(대개 우리는 양육자로부터 어떤 식으로건 결핍을 물려 받는다. 그리고 나에게 가장 필요한 요소로 남는다.)을 내가 나에게 해주기.


감정을 돌본다는 것은 내가 나의 양육자가 되어주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