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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율마 Apr 17. 2023

네버랜드의 피터팬

청소년 sf

나는 신경질적인 손놀림으로 헤드셋을 집어 들었다. 가상월드 게임인 ‘네버랜드’에 접속할 참이었다. 어제까지만해도 헤드셋을 집어드는 지금이 하루 중 가장 설레고 행복한 순간이었다. 네버랜드에 접속하면 세라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세라는 최근에 알게 된 친구로 네버랜드에서는 늘 자그마한 날개가 달린 요정 모습을 하고 있는 상냥하고 다정한 여자 아이였다. 그 모습이 앙증맞은 팅커벨 같아서, 나는 세라와 있으면 자신만만하고 뭐든 할 수 있는 피터팬이 되기라도 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세라는 내가 무슨 말을 해도 깔깔대며 웃고 즐거워했다. 피터팬을 짝사랑한 팅커벨도 그랬을까, 나는 은근히 마음이 설레곤 했다.



세라가 나와 동갑인 열 여섯 살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경솔하게도 난 세라에게 고백을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여자친구를 사귀는 일에 별 관심이 없긴 했지만, 세라는 정말 다른 여자애들과 다르다고 생각했다. 피터팬과 팅커벨 코스튬을 사서 커플룩으로 입고, 많은 게임 내 연인들이 고백을 위해 입장 티켓을 사서 들어간다는 보랏빛 요정 숲으로 가서 너를 좋아한다고, 여자친구가 되어주면 좋겠다고 고백하리라 마음 먹었다. 그게 어제 일이었다.



“바보같이...”



난 나도 모르게 이를 부득 갈았다. 정말 바보같았다. 세상에 그런 여자애가 있을 리가 없었다. 그렇게 썰렁한 농담에 웃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다.

세라는 가짜였다. 그녀는 피터팬의 팅커벨이 아니라, 학교에서 배치한 인공지능 청소년 상담사가 조종한 아바타였다. 그래서 그렇게 내 이야기를 잘 들어준거였어. 그것도 모르고 고백이라도 했으면 그게 무슨 망신이야. 나는 로그인을 하기 전에 잠시 눈을 감았다. 머리가 지끈거려 VR 화면을 볼 자신이 없었다. 안 그래도 골치 아픈 일이 많은 요즘이었다.

가장 친한 친구였던 수호와 별것 아닌 일로 싸워서 말도 안하고 지낸지 2주일이 넘었다. 어쩌면 그게 괴로워서 세라에게 금방 넘어갔는지도 몰랐다. 세라가 네버랜드에 등장한게 딱 2주 전인데, 의심했어야 했다. 타이밍 좋게 나타나서는 고민이 뭔지 묻고, 친구관계 운운하면서 말을 거는데 충분히 의심스럽고도 남았다. 나는 그게 그냥 여자애들의 관심사라고만 생각했지 인공지능 상담사 따위라고는 상상도 안했다. 물론 정부에서 청소년용 네버랜드에 인공지능 상담사를 배치했다는건 알고 있었지만, 수호와 싸웠다는 이유로 담임 선생님이 인공지능 상담사를 가동할 줄은 몰랐다. 늘 붙어 다니던 우리가 찬바람 쌩쌩 불며 따로 다니니 상담사를 붙인 모양인데, 정말 숨막히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안 그래도 네버랜드는 청소년의 바람직한 오락과 체험을 위해 건전하다 못해 지루한 시스템으로 운영되고 있는 터였다. 열 여섯살이 그렇게나 건전하고 아름다운 대화만 할 때부터 의심했어야 했는데, 내 멍청함에 한숨이 나왔다. 수호라면 안 속았을텐데.



나에게 상담사가 배정되었다면 수호에게도 같은 일이 생겼을거다. 문득 수호에게 물어보고 싶어졌지만, 난 곧 헤드셋을 낀 채로 도리질을 했다. 자존심 상해서라도 말 못하겠다. 2주일이 지난 이제야 세라가 가짜라는걸 알았고 사실은 고백할 뻔 했다고는 죽어도 말 못한다. 아니지, 수호도 혹시 아마조네스 여전사같은 가짜 아바타한테 나와 싸운 이야기를 주절주절 늘어놓았을지도 모르잖아? 수호 녀석, 나와 달리 강한 여자 캐릭터를 좋아하니. 그래서 수호가 이렇게 오랫동안 나한테 말도 안 걸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무래도 확인을 해봐야겠어.



수호와 무슨 일로 다투었는지 이제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분명히 별 것 아닌 일로 내가 발끈하고, 수호는 평소처럼 내게 툭 던지듯 한 마디 했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분개하고, 수호는 얄미우리만치 차분한 얼굴로 ‘너는 늘 금방 화를 내.’라고 어른스러운 척 했을게다. 우리가 싸우는 방식이었다.

우리는 성격이 극과 극일 정도로 달랐지만 이상하게 잘 어울렸다. 내가 팅커벨같이 작고 귀여운 캐릭터에 약하다면, 수호는 좀비 때려잡는 쎈 누나 캐릭터를 매력적이라고 생각했다. 생각해보면 통하는 구석이 없는데도 우리는 어려서부터 같이 어울렸고, 싸우면서도 늘 같이 다녔다. 나보다 훨씬 어른스러운 수호는 내 분이 다 풀릴 때까지 조용히 기다리다가 슥 다가와서는 ‘이제 기분 풀렸냐?’고 어깨를 툭 쳤다. 그러면 나는 마지 못한 척 ‘배 안 고프냐?’라며 대꾸하며 화해한다는 뜻을 비췄다. 내 어린애같은 면을 받아주는 녀석이 그래서 편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이번엔 달랐다. 수호가 말을 걸어오지 않았다. 나는 그런 수호가 낯설면서도 괘씸했다. 내심 불안했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괜히 녀석을 더 원망했는지도 몰랐다.



“아, 몰라. 일단 세라부터 만나야겠어.”



헤드셋과 VR 안경, 조작용 장갑을 착용하자 시야에 널찍한 남색 스크린이 펼쳐졌다. 시선으로 로그인 버튼을 누르고 음성으로 아이디를 말하자 주변 풍경이 확 바뀌었다. 남빛 하늘에 반딧불이 날아다녔고 풀내음이 났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자작대며 모래 밟는 소리가 들렸다. 편한 청바지에 앵클 부츠, 옛 북미 서부시대의 카우보이 복장을 한 나는 늘 가던 길로 몸을 틀어 나룻배가 있는 호숫가로 향했다. 평소라면 낭만적이라고 느꼈을 광경이지만 지금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내 시선에 맞추어 호숫가가 이리저리 흔들려 보였다.

육각형 모양의 조명을 옆에 둔 채 나룻배에 앉아 있는 팅커벨, 아니 세라가 눈에 들어왔다. 세라는 곧 나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순간 마음이 흔들렸다. 내가 잘못 알았을지도 모르잖아? 인공지능 상담사가 아니라 그냥 내 또래의, 이상할 정도로 예쁜 말만 하는 여자애일지도 모르잖아? 하지만 오늘 담임 선생님이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하는 것을 내 귀로 똑똑히 들었다.

 

[재영이가 수호랑 싸운 후로 힘들어하고 있어요. 세라가 분석한 바에 따르면 불안 상태고, 스스로 관계를 개선할 용기가 없어서 수동적으로 더욱 네버랜드로 도피하고 있다는군요.]

 

내가 받은 충격을 뭘로 보상할지. 그러니까, 저 세라는 내가 털어놓은 이야기를 분석해서 내 상태를 진단한 후 교사에게 보고하고 중재 프로그램을 실행하는 인공지능이었던거다. 아마도 저 중재 프로그램은 수호에게도 가서 수작을 부렸을 것이다. 어쩌면 수호가 2주간 침묵하고 있는 것도 저 인공지능 때문인지도 모른다. 친구에게 먼저 말 걸지 말고 기다리라고 조언했을지도 모르겠다.



사실 내가 정말 짜증나는 이유는, 세라의 말이 사실이라는 점이었다. 스스로 관계를 개선할 용기가 없어서. 그래. 나는 늘 수호에게 의지했다. 그래서 수호가 먼저 움직이지 않는 지난 두 주간 힘들었다. 하지만 내 마음이 이렇게 파헤쳐져서 어른들에게 알려질 줄은 몰랐다. 마치 우리 엄마가 옆집 아줌마 흉을 보는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선생님들 사이에서 화제거리가 될 줄은 몰랐다.

나는 어디에다 화를 내야할지 알 수가 없었다. 나를 속인 세라? 내 의사와 상관없이 인공지능 상담사를 붙이고 내 고민을 아무렇지도 않게 가십처럼 소비한 선생님? 아니면, 나에게 말을 걸어오지 않는 수호? 아니면 친구와 싸우고 먼저 손 내밀 줄 모르는 나 자신? 가짜에게 속 터놓고 좋아한다고 착각했던 내 얄팍한 의존성?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얼굴 가득 미소를 지으며 요정처럼 앉아 있는 세라의 앞에 선 나는 머리 속으로 상상했던 수많은 욕설 중 단 한 개도 내뱉지 못했다. 마음 같아선 세라가 앉아 있는 나룻배를 뒤집어 버리고 싶었지만, 청소년 버전 네버랜드에서는 허용되지 않는 행위일 뿐 아니라 가능하다 했더라도 내가 차마 그렇게 하지는 못했다.  



“너 열 여섯 살 아니지.”



아아, 바보같아. 기껏해야 한다는 말이 이런 시시한 대사라니.



“갑자기 무슨 말이야?”



세라는 별로 당황하지 않는 투로 말했다. 지금껏 세라에게 잘 보이려고 그녀가 당황할만한 말을 하지 않도록 신경 썼었다. 그래서 몰랐었다. 세라는 당황하지 않았다. 인공지능이니 당연한가. 나는 전의를 상실한 채 주저 앉았다. 코 끝에 닿는 풀내음이 더 진해졌다. 진짜같은 감각이다. 진짜같은 가짜가 날 속이고 있었다.



“오늘 학교에서 들었어. 너 인공지능 상담사잖아. 그동안 잘도 속였네.”



“교사가 실수를 했나보네.”



“너 지금 인공지능이야? 아니면 사람..이에요?"



나는 끝말을 흐렸다. 주워 들은 바로는, 인공지능 모드의 아바타는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해서 진짜 상담 교사에게 결과를 전달한다고 했다. 개입이 필요하다고 판단하면 전문가가 아바타를 조종하기도 한단다. 대부분은 소위 ‘겜친’인 척 남아 있는단다. 현실도피로 네버랜드를 이용하는 청소년들이 늘어나자 정부에서 강제로 도입한 시스템이라고 들었다. 나는 혹시라도 세라 뒤에 어른이 있을까 싶어 존댓말을 쓰는 소심함에 한숨이 나왔다.



“나는 사람이 아니야. 일이 이렇게 되어 정말 미안하구나. 네 마음이 어떤지 이야기해줄 수 있겠니?”



아, 나왔다. 선생님들 전용 대사. 나는 나룻배를 뒤집거나 욕을 하는 대신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더는 세라를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 세라에게 화를 내는 일은 더 이상 의미가 없었다. 세라가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화가 난거였다. 세라가 사람이 아니라면 화를 낼 이유도 없었다.

어쩌면 소심하기 짝이 없는 내가 수호에게만큼은 편하게 툴툴대고 싸우기도 할 수 있었던건 단순히 수호가 어른스러워서가 아니라 수호가 나를 있는 그대로 보고 같이 툴툴대고 싸웠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누가 누구를 받아줘서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나와 수호가 서로에게 솔직하게 부딪히고 싸우고 웃고 떠들 수 있어서, 그래서 친할 수 밖에 없었는지도. 우리가 서로를 거울 삼아 비춰줄 수 있었기에, 우리는 상대에게서 나를 더 발견할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상담사 아줌마같은 대사를 하는 세라를 보니 허탈함에 한숨이 나왔다.



허공의 왼편 구석에서 사람 얼굴 모양의 아이콘이 반짝이며 알람음을 울렸다. 담임 선생님에게서 온 전화였다. 나는 코웃음을 치며 시선을 움직여 차단 버튼을 눌렀다. 가짜 세라에게는 하지 못했지만, 선생님에게 걸려온 전화는 나름 야멸차게 거절해버렸다. 소심한 쾌감이 느껴졌다.

네버랜드의 친구 목록을 열었다. 차단 친구 목록에 수호가 있었다. 나는 조금 망설이다가 차단을 해제했다. 곧 허공 왼편에 띠링 소리와 함께 수호의 이름과 위치가 떴다. 수호는 외계 행성 지역의 한 펍에 있었다. 나는 외계 행성 지역으로 이동하는 아이템을 사용했다. 처음 사용했을 때 신기하고 두근거렸던 순간이동 효과가 눈 앞의 공간을 일그러뜨렸다. 지금은 다른 의미로 심박이 빨라지는 것 같았지만. 시야가 흐려졌다가 밝아지며 주변 풍경이 바뀌었다. 분홍색과 초록색이 어우러진 오로라가 일렁대는 남빛 하늘에 띠를 두른 금빛 달이 하나, 연보라빛 반달이 둘 떠 있는 외계 행성이었다.



“이 녀석 뭘 이런데에 다 와 있담.”



나는 긴장을 달래기 위해 중얼거리며 지도에 표시된 붉은 점을 향해 발을 떼었다. 동맹을 맺은 여러 행성의 외계인들이 모인다는 설정의 중립지역의 술집. 서로 적대하는 관계라 할지라도 이 펍 안에서는 싸우는 일이 금지라고 했다. 성인 버전에서는 싸움과 약탈도 일어난다고 했다. 청소년 버전에서는 기껏해야 약탈을 하고 갔다는 외계인에게서 물건을 찾아오거나 납치 당한 아가씨를 구해오는 것 정도의 퀘스트를 줄 뿐이었다.  

수십 년 전에는 청소년도 피를 철철 흘리는 전쟁터에서 총 들고 서로를 죽이는 게임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나쁜 것’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해야 하기에 직접 타인을 해하는 게임은 생체 성인 인증을 거쳐야만 할 수 있었다. 네버랜드에도 군대와 전쟁터가 있긴 했지만 주로 괴물을 상대하는 특수군인으로 게임을 즐길 수 있을 뿐, 다른 플레이어를 다치게 할 수는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신체적인 충격이 게임을 하는 사람에게 어느 정도는 전달이 되기 때문에 폭력적인 장면을 연출하는 데에 무리가 있었다. 우리는 그렇게 ‘보호’받았다. 위험과 폭력을 능동적으로 경험할 수 없도록 울타리가 쳐진 시스템 안에서 우리는 그 외의 판타지, 이를테면 하늘을 날거나 여러 직업을 체험하는 일 등을 맘껏 충족했다.

하지만 이 외계 행성, 얌모르의 펍인 줄라타에서는 청소년 버전의 네버랜드에서 가장 위험하고 폭력적인 일이 가능했다. 서로 밀고 넘어뜨릴 수 있었고, 주먹질을 해서 때릴 수도 있었다. 그러나 아바타만 넘어지고 게임을 하는 사람에게는 가벼운 진동만 느껴질 뿐 상대의 힘이나 분노가 전달되는 일은 없었다. 주변의 아바타들이 환호하거나 야유를 보내면서 분위기를 고조시키거나 약을 올리긴 했지만 이미 감각적으로 네버랜드와 동화된 상태로 있다가 진동만 징징 울려대는 경험에는 도무지 몰입이 되지 않아, 실제로 서로 주먹질을 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하지만 주먹질이 허용된다는 점 때문에, 그리고 술을 마시거나 노출이 있는 옷, 흐느적대는 춤, 퇴폐적인 조명 등이 있는 펍이라는 이유로, 어른같고 일탈적인 흉내를 내볼 수 있다는 이유로 이곳은 제법 인기가 있었다. 사람들은 음성 챗으로 누군가를 욕하거나 서로 싸우고 싶을 때에도 이 펍에 오곤 했다.



나는 손에 육중한 쇠문의 무게감과 녹이 슨 거친 질감을 느끼며 펍의 문을 열었다. 강렬한 전자음이 들려왔다. 어둑한 공간은 색색의 조명으로 여기저기 번쩍댔다. 아바타들이 몸을 흐느적대며 춤을 추었다. 모니터 여럿이 달린 무대 앞에도 아바타들이 잔뜩 모여 있었다. 게임 플레이어들이 일종의 장기자랑을 할 수 있는 곳이었다. 아이돌 춤과 노래를 따라하는 또래 아이들이 대부분이었다. 나는 눈으로 펍 안을 훑었다. 수호는 아이돌 취향은 아니었기에 저 무리에 껴있진 않을 터였다. 그나저나 이 녀석은 왜 여기 와있는거지? 그러고보니 수호는 펍에 거의 오지 않았다. 하필 치고 받을 수 있는 네버랜드의 유일한 공간에 있다니.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반 바퀴 가량 고개를 돌렸다. 판타지 게임의 성직자 로브같은 옷을 입고 은색 장발을 하고 안경을 낀 수호의 아바타가 둥근 탁자에 앉아 있었다. 나는 마른 침을 삼키고 음성 채팅 기능을 켜서 수호에게 말을 걸었다.



“야, 장수호.”



수호가 고개를 들었다.



“왔네.”



언제나처럼 수호는 차분하게 대꾸했다.



“야! 너 정말 뭐냐. 연락도 안하고.”



주변 소리가 시끄러워서 정신이 없었다. 나는 주변 소리를 소거시켰다. 수호와 나는 번쩍대지만 소리가 사라진 이상한 공간에서 마주하고 있었다.



“너한테도 갔어? 인공지능 상담사?”



“인공지능 상담사?”



수호가 인상을 썼다. 나는 소위 겜친이었던 세라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내가 어떻게 세라를 만났는지, 그리고 세라가 얼마나 ‘진짜’같았는지를 이야기했다. 수호와 싸운 이후에 마치 별 일 없이 지냈다는 듯이, 얼마나 웃기는 일이 있었는지를 자랑처럼 떠들기라도 하듯 말을 쏟아냈다. 수호는 묵묵히 내 말을 들었다. 수호의 아바타는 그저 디지털 이미지였을 뿐이지만, 이상하게 그 눈빛에서 수호가 떠올랐다.



“그런데 그게 가짜였다고? 어떻게 알았는데?”



“그건...”



나는 잠시 멈칫했다. 담임 선생님이 한 말이 떠올랐다. 수호와 싸우고 나서 힘들어하는 것 같았다고, 직접 관계를 개선할 용기가 없어서 세라를 만나 도피했다는 말 따위를 수호에게 전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바타 뒤에 있어 표정을 들키지 않아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나는 눈을 데룩데룩 굴리며 할 말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음.. 담임 선생님이 너랑 내가 같이 안 다니니까 싸웠다고 눈치를 채신 것 같아. 그래서 세라를 붙였는데, 세라 분석한게 어쩌고 저쩌고 하는걸 내가 우연히 들었어. 복도 지나다가.”



“그래? 그런데 넌 그 세라인가 뭔가를 좋아했고?”



“뭐? 누가 누굴 좋아했다고 그래?!”



나는 화들짝 놀랐다. 깜빡 잊고 있었다. 수호가 감이 좋다는걸.



“너는 말하면 다 티가 나. 네가 뭐하러 요정 숲 티켓 따위를 모으겠어.”



내 성격이 원망스러워지는 순간이었다. 요정 숲 이야기를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이미 늦었다.  



“그러게 왜 겜친 따위한테 가.”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수치심이었다. 가짜 아바타 여자애에게 잠시 반했다는 것보다 가짜에게 가서 속을 털어 놓았다는게 더 부끄러웠다. 수호에게 직접 말하지 못했다는 것이, 늘 수호가 다가오길 기다렸다는 것이 부끄러웠다. 관계를 개선할 용기가 없어서라는 담임 선생님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이 녀석은 조근조근 말하면서 사람 속을 뒤집어 놓는단 말이야.



“그래, 너 잘났다!”



나는 참지 못하고 수호의 얼굴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 우당탕 요란한 소리와 함께 수호가 바닥에 나뒹굴었다.



“어머, 뭐야, 뭐야!”



“싸움입니까!”



주변의 아바타들이 몰려들며 추임새를 넣었다. 인공지능 아바타들이었다. 네버랜드에서 싸움이 벌어지면 그들은 관객 역할을 하며 분위기를 돋우는 역할을 했다. 수호의 아바타는 아무 말없이 일어섰다. 제법 멋드러지는 각도로 주먹질을 했고, 수호도 멋지게 넘어졌지만, 내 손에는 아무 느낌이 없었다. 수호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침묵이 기이했다. 주변의 소리를 소거했지만, 싸우는 모드에서는 인공지능 아바타들의 목소리를 제거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침묵 속에서 ‘이겨! 이겨!’, ‘어서 싸우라고!’ 따위의 대사가 흘러나왔다. 가짜 주먹질과 가짜 구경꾼들. 하지만 내 안의 감정과 싸움은 진짜였다. 그때였다. 가만 있던 수호가 달려 들어서 내 배를 때렸다. 역시나 우당탕 소리와 함께 내 아바타가 허리를 접으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물론 나는 아무런 통증도 느끼지 않았다. 우리는 감정을 담아 서로에게 닿으려 했지만,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네버랜드는 우리를 보호했지만 우리는 그저 서로에게서 차단될 뿐이었다.



“그냥 나한테 왔어야지.”



수호의 말에 나는 잠시 머리가 멍해졌다. 나는 할 말을 잃은 채 수호를 바라보았다. 수호는 여느 때처럼 얄미울 정도로 차분한 목소리로 말하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여기서는 손 잡는 것만 진짜야.”



“뭐야, 갑자기 화해하자는 거야?”



나는 어색함을 감추기 위해 궁시렁댔다. 하지만 맞잡은 손에 느껴지는 감각에 나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수호가 나를 일으키기 위해 힘을 주는게 느껴졌다. 내 손도 이에 응했다. 잡은 손에 상대의 힘이 느껴지기에 나 역시 힘을 줄 수 있다. 이제 수호가 느껴졌다.



“팔씨름 해.”



“뜬금없이 뭔 팔씨름?”



난 더 어안이 벙벙했지만 수호는 말없이 탁자에 앉아서 턱으로 앉으라는 시늉만 할 뿐이었다. 그러고보니 수호가 앉아 있던 둥근 탁자는 팔씨름용 탁자였다. 수호의 말대로 폭력이 없는 네버랜드에서는 손을 ‘맞잡는’ 감각만 진짜였다. 그래서 네버랜드의 청소년 주민들은 아무 느낌 없는 주먹질보다는 진짜 감각이 오고가는 시합인 팔씨름을 하곤 했다. 나는 방금 수호의 손을 잡았던 감각을 떠올렸다. 무슨 꿍꿍이냐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어쩐지 수호의 속내를 알 것도 같아 얌전히 탁자에 마주 앉았다. 수호가 팔을 올렸고, 나 역시 팔을 올려 수호의 손을 잡았다. 장갑 안 쪽의 감각센서로 전달된 압박감이 내 손을 자극했다. 나는 그 감각에 몸을 맡기고 어깨와 팔, 팔꿈치, 손목, 손가락 근육을 모두 긴장시키며 힘을 주었다. 수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제법 힘이 세다. 생각해보니 수호랑 팔씨름을 한 기억이 없다. 저 조용한 녀석이 힘이 세봤자 얼마나 세겠어? 나는 끄응 소리를 내며 더 세게 힘을 주었다. 수호는 끙끙대는 나와 달리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얄미운 녀석. 시간이 지나자 팔이 떨려왔다. 가짜 아바타들은 저마다 뭐라뭐라 응원과 야유를 반복하며 정신 없이 소리를 질러댔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띵 소리와 함께 눈 앞에 팝업창이 떴다. 힘을 세게 해주는 아이템을 사서 쓰라는 광고였다. 쳇, 내가 지는 것 같다 이거지. 지는 쪽에 아이템 구매를 유도하는 광고를 보여주는게 네버랜드의 시스템이었다. 청소년을 보호한답시고 온갖 행위를 제한하더니, 이럴 때는 아무렇지도 않게 상술을 부린다. 나는 눈짓으로 취소 버튼을 눌렀다. 가짜는 더 이상 원치 않는다. 정신을 집중하다가 흐트러졌던 탓일까, 내 힘이 다 빠져서일까, 순식간에 팔이 넘어가 탁자에 쾅 닿고 말았다. 아, 졌다.



“뭐야, 장수호, 너 아이템 썼냐?”



“아니.”



나는 툴툴대며 손목을 매만졌다. 진짜로 손목이 뻐근했다. 수호가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다가 말을 이었다.



"진짜 내가 하고 싶었어."



헤드폰으로 수호의 진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수호가 머뭇대는게 느껴졌다. 나는 무심하게 ‘뭔데?’하고 물었다. 나와 수호는 상대가 하기 어려운 이야기를 하려고 할 때 아무렇지도 않은 척 물어봐주곤 했다. 오랜 친구라서 통하는 신호다.



“사실 나도 만났어, 상담사. 사실 난 금방 눈치 챘지만, 누구랑 다르게.”



“본론만 해. 나 끌어들이기 금지.”



수호가 풋,하고 웃는 소리가 들렸다. 녀석의 웃음 소리에 내 마음도 편해졌다.



“인공지능 상담사인걸 알아 차리니까, 상담사 선생님이 직접 접속하더라. 그리고 고민을 듣더니 나한테 조언을 해줬어. 내가 늘 먼저 말을 거는 것도 친구가 사과할 기회를 뺏는 일이라고. 이번에는 네가 먼저 다가올 때까지 기다리라고 했어. 이게 중재 프로그램이래. 처음엔 맞는 말 같았어. 나도 화가 났었고. 그런데...”



와, 정말 가지가지하는 중재 프로그램이다. 친구를 이용해서 날 고쳐보겠다고? 순간 괘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어쩐지 그 상담 선생님이라는 사람의 의도를 알 것도 같았다. 언제나 수호가 먼저 말을 걸어서 화해를 하곤 했다. 사실 선생님들의 말이 맞았다. 나는 용기가 없었다. 수호가 손을 내밀기 전에 다가가는게 어려웠다. 수호가 거절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매번 수호가 아무렇지 않게 말을 걸어올 때 내심 안심하곤 했다. 나는 나 좋은대로 수호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수호도 마음이 편치만은 않았을텐데, 녀석이 어른스러운 성격이라는 핑계로 그 뒤에 숨어서 내가 움직일 생각은 하지 않았다. 수호에게 미안했고, 또 부끄러웠다.



“그런데, 그렇게 하는게 마음이 편하지 않았어. 누가 정답을 알려주는게 싫기도 했고. 정답인지도 사실 잘 모르겠고. 나는 그냥 나답게 하고 싶었어.”



나는 그런 수호를 쳐다보았다. 역시 이 녀석은 어른스럽다. 내가 쫓아가기 버거울만큼. 나는 세라가 내 말을 잘 들어준다는 이유로 홀랑 반해서 그녀의 정체도 파악하지 못하고 수호만 원망하고 있었는데. 수호는 그 딱한 인공지능 아바타의 정체를 알아차린 것도 모자라 상담사가 준 모범 답안을 거부하며 자기다운 선택을 하겠다고 나섰다. 그리고 네버랜드에서 유일하게 진짜인 감각이라며 팔씨름을 하자고도 했다. 나는 상담사 선생님들보다 수호가 더 대단한 상담사처럼 보였다. 나는 어색한 침묵을 끝내기 위해 너스레를 떨었다.



“샌님인줄 알았는데 왜 이렇게 힘이 세냐?”



아바타 너머로 수호가 웃는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았다.



“너처럼 게임만 하는 줄 아냐. 나 농구해.”



피식 웃음이 나왔다. 뭘 새삼. 2주 전만 해도 같이 농구를 했었거늘. 무슨 이유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일로 싸우고 말문을 닫아버린 내가 우스웠다. 진짜로 너한테 말했어야 했는데.

세라같은건 존재하지 않았다. 내 입맛에 맞는 말만 해주고, 내가 하는 말을 모두 좋다고 해주는 사람은 세상에 없는 게 당연했다. 수호와 내가 친구인 이유는 싸울 수 있는 사이여서였다. 수호가 날 이해하고, 내 말을 잘 들어주고, 내게 먼저 손을 내밀어서가 아니었다. 우리는 날 것의 감각으로 서로를 만나야 한다. 부대끼고 느끼고 표현해야 한다. 그걸 지금에서야 알았다.



이제는 내가 손 내밀 차례다.



“야, 나와. 농구 한 판에 피자 한 판.”



수호의 아바타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수호가 사라진 탁자 주위에서 인공지능 아바타들이 하나둘 자리를 떴다. 구경거리가 끝났으니 네버랜드가 프로그래밍 해놓은 대로 움직이러 각자 위치로 돌아갔다. 펍 안에는 다른 아바타들이 흐느적대며 춤을 추고 있었다. 나처럼 VR 장비를 끼고 있는 사람들 하나하나가 저 너머에 있을 터였다. 그리고 어딘가에서는 중재 프로그램이 돌아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펍에 흐르는 음악을 다시 켰다. 유행하는 댄스 음악이 나오고 있었다. 구석에서는 누군가가 농구골대에 공을 넣고 있었고, 누군가는 다트를 던지고 있었다. 진짜같은 가짜의 세상이다.

나는 농구공의 둥근 표면의 까칠한 감촉을 떠올렸다. 체육관 바닥을 텅하고 치면서 탄력있게 올라오는 농구공을 손목으로 퉁 쳐내리는 감각을 떠올렸다. 이제 슬슬 몸이 근질근질해졌다. 마음은 이미 수호가 기다리고 있는 체육관으로 내달리고 있었다. 나는 아주 간단하게 눈을 깜빡여서 네버랜드에서 빠져나갔다. 아마 한동안은 오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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