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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윤 Aug 13. 2019

제모하는 사람

외모에 관한 사적인 이야기.

나는 어렸을 때부터 내 몸에 있는 털이 싫었다. 머리털과 속눈썹 빼면 좀처럼 마음에 드는 게 없었다. 눈썹은 홍역-수두-아토피-대상포진의 4관왕 속에서 끄트머리가 흉터로 인해 듬성듬성해서 보기 안 좋았고, 아주 어렸을 때부터 팔과 다리에 털이 많아 또래 아이들한테 고릴라 같다는 둥, 징그럽다는 둥 그런 얘기를 들었다. 거기다가 아주 가늘고 고운(?) 콧수염까지 나 있어 그것으로도 종종 놀림을 받았다. 팔, 다리에 난 털부터 인중에 난 털까지 모두 배냇털이라고 하는데, 나는 그게 크면서도 안 빠졌다. 몇 번 면도를 시도해봤지만, 며칠이면 다시 수북해지는 통에 포기해버리곤 했다. 

2차성징이 왔을 때, 나는 내 몸의 변화를 참 받아들이기 어려워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면도를 하기 시작했고, 자라는 음모를 보기 싫어 샤워할 때 같이 밀어버리곤 했다. 원인이 무엇인 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 모든 것들을 참 부끄럽게 여겼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나는 대중목욕탕에 가지 않기 시작했다. 게다가 또래 아이들은 모두 고래를 잡았는데, 나만 포경 수술을 하지 않은 것 역시 그 이유 중 하나였다. 뭐, 이제와서 보니까 내가 "비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소심하고 남 눈치를 많이 보도록 자라난 나는 그 사실을 몰랐고, 그로 인해서 괴로워 했다. 

나는 내 몸이 싫어서 털을 밀면서도, 그것을 남들에게 들킬까봐 늘 조마조마했다. 함께 사는 가족이든, 또래 친구든 말이다. 중학교 무렵의 수련회 같은 공동 행사는 굉장히 스트레스로 가득찬 일이 되었고, 늘상 친구들과 함께 가던 대중목욕탕도 갈 수 없게 되었다. 그런 강박증 때문에 성기 주변의 피부는 늘 면도독이 올라 있었고, 자주 피를 보곤 했었다. 늘 가려움과 고통에 시달리면서도 그런 멍청한 짓을 그만둘 수 없었다. 지금은 멍청한 짓이라고, 웃긴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때는 나름의 절박함이나 강박에 시달렸던 것 같다. 그러다가 마침내 겨드랑이털이 날 쯤에 그것을 모두 포기해버렸다. 될 대로 되라지 싶은 마음도 있었고, 내 또래 아이들도 죄다 2차 성징이 왔고, 그래서 그런 걸로 조금 덜 눈치를 보게 된 것 같았다. 나만 그런 것도 아닌데, 내가 왜 이렇게 스트레스를 받고 있지? 그런 생각을 했는지 정확하지는 않지만, 어쨌든 그만두게 되었다. 뭐, 그래도 여전히 대중목욕탕은 꺼려하지만. 

그래, 나는 내 몸을 싫어했다. 포동포동하게 살이 오른 내 몸. 늘 과체중이고 키가 작고 다리가 짧고 털이 많은 내 몸을 싫어했다. 아니 지금도 싫어한다. 아주 천천히 다이어트를 시작하고, 피부 미용 등에 신경을 쓰면서 불현듯 나의 이런 강박이 얼마나 세상의 것들과 결이 다른지 깨닫게 되었다. 원인 불상의 자기비하에서 비롯된 이 자기혐오적 시선. 문제나 스트레스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다보니 어느새 이렇게 자라 있었다. 타인의 눈을 신경쓰면서도, 가장 신경을 쓰는 것은 내 자신의 기준이었다. 누군가 나를 사랑해도 내가 나를 사랑하지 못하는 그런 상황속에서 나는 늘 그런 외적인 것들에서 문제의 원인을 찾으려고 들었다. 지금은? 글쎄, 극복은 하지 못했지만 적어도 그 사실을 마주볼 수 있게는 된 것 같다.

예전에 모종의 기회로, 같은 사무실에서 일하던 디퍼 팀의 인터뷰 제물(?)로 자원한 적이 있었다. 청년 직업인들을 인터뷰 하는 것이었는데, 남성 전용 왁싱샵을 운영하는 분을 인터뷰 하기로 되어 있었다. 장면을 따기 위해서 누군가 왁싱을 해야할 필요가 있었는데, 여러 사정상 팀 내에 적합한 인원이 없어 다른 팀에서 인원을 구하셨다. 그 쯤 한참 외모를 꾸미기 시작해서 여기 저기 관심이 많았던 내가 자원을 했다. 덕분에 나는 20만원 가까이 되는 왁싱을 공짜로 받았고.... 아프지만 굉장히 색다른 경험으로 남아있었다. 

여전히 나는 내 몸의 털들을 싫어한다. 별로 예쁘지도 않고, 집을 더럽히고, 싫어하는 이유는 참 많다. 그렇지만 그것을 이상하게 여기지는 않게 된 것 같다. 예전에는 부끄러워서 내가 내 몸을 학대했다면, 지금은 자기 만족을 위해서 내 몸을 관리하기 시작한 것 같다. 사람들은 외려 이상하게 볼 것이다. 요즘은 그래, 남자들도 많이들 왁싱을 받지만 아직까지 그게 보편적이지는 않다. 최소한 남자들에게 같은 무게의 사회적 압박은 주어지지 않는다. 그 당시 사무실의, 인생 선배 같은 직원분이 그런 말씀을 한 적이 있었다. 여자는 화장을 안 하는 게 운동이고, 남자는 화장을 하는 게 운동이라고. 언젠가는 양쪽 다 화장이 디폴트가 아닌 사회가 됐으면 좋겠다. 나는 무언가 특별히 운동을 하려고 제모를 시작하지는 않았다. 처음에는 나를 혐오해서 그랬고, 다음에는 새로운 것을 시도해보고 싶어서 그랬다. 다만 내가 내 선호를 사회적 기준에 휘둘리지 않고 싶은 마음을 이제는 가지게 된 것 같다. 별다른 대상은 없지만 나 혼자 하는 작은 운동이 된 것 같기도 하다. 여전히 비교하기 부끄러운 만큼의 압력 속에서 살아가겠지만, 뭐 누구 보여주려고 하는 건 아니니까.

그리고 이런 마음가짐에는 몇 번의 연애들이 도움이 된 것 같다. 내가 나를 사랑하지 않음에도, 나를 좋아하고 아껴주고 예뻐하는 사람들을 만났기 때문이다. 살면서 중장년층 이외에 잘생겼다는 소리를 들을 줄은 몰랐는데. 쑥쓰럽지만 행복했다. 최근에도 그런 일이 있었고. 다음 단계는 이제 내가 나를 사랑하는 일이겠지?


최근에는 왁스 크림을 샀다. 털이 약해져서 씻겨 내려가는 모습이 참 신기했다. 면도기로 미는 것보다 피부에 자극은 확실히 덜한 모양이었다. 왁싱샵에서 왁싱을 받으면 모근까지 점점 약해져서 효과가 더 좋지만, 아무래도 가격이 어마어마해서 쉽게 엄두를 못 내고 있었다. 당분간은 크림으로 계속 관리를 해 볼 생각이다. 털 아래 가려져있던 아토피 흉터와 착색 자국들이 새삼스래 도드라져 보였다. 언젠가 이 자국들도 내 이상한 모습들처럼 사라지겠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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