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이야기
2014년 3월부터 서울 살이를 시작했으니, 햇수로 이제 6년차가 되어가고 있다. 아직도 졸업 안 한 내 처지가 조금 우스꽝스럽기도 하고, 벌써 이렇게 시간이 흘렀나 싶어 복잡미묘한 기분이 든다. 첫 전입신고를 한 게 2015년이었으니, 공식적으로 서울 시민이 된지는 5년차이다. 명절이면 내려가는 고향 집이 더 낯설게 느껴지는 요즘, 청년 주택에 관한 이야기가 분분해서 그냥 내 이야기를 주절주절 늘어놓으려고 한다.
타향살이의 시작은 기숙사였다. 우리 학교의 구관 기숙사에 배정된 나는, 처음 그 방에 들어섰을 때 크기 때문에 깜짝 놀랐다. 2층 침대를 사용하는 기숙사는 우리 기숙사와 여자 기숙사 각각 한 동씩 밖에 없었고, 방의 나머지 부분은 책상과 옷장이 있었다. 2층 침대 덕분에 다른 동보다 옷장이 넓었던 기억이 난다. 넓게 잡아야 3평쯤 되는 공간이었을 것이다. 우리 학교의 기숙사는 좋게 말해서 좋은 고시원 수준이다. 당시 구관은 두 명이서 한 방을 쓰고, 화장실을 층마다 공유하는 형식이었고, 세탁실과 취사실 및 독서실은 건물이 각 하나씩 공유하는 형식이었다. 공유 면적은 넓지만 개인적인 면적은 거의 없다시피 한 공간. 사람마다 사는 생활 패턴이 다르니까 어떻게 어떻게 사는 데 큰 지장은 없었다. 화장실/샤워실에 자리가 없으면 다른 층을 갔고, 취사실에 자리가 없으면 친구가 있는 다른 동에 갔다. 빨래는 수업 없는 날 몰아서 하면 그럭저럭 해결할 수 있었다. 뭐든지, 그럭저럭.
서울에 올라오기 전까지, 개인 공간을 가져본 적이 없다. 집안 사정이 넉넉치 않아서 가족이 다 같이 방을 쓰거나, 사정이 조금 핀 뒤에는 동생과 같이 방을 썼다. 서울에서 생긴 첫 보금자리도 마찬가지였다. 누군가와 방을 쓴다는 것에 대해서 처음에 큰 거부감이 있던 건 아니었지만, 최소한 이것보다는 넓을 줄 알았다.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기숙사 방은 정말로 숨막히는 공간이었다. 의식주 중에서 의와 주를 아주 간신히, 정말 간신히 충족시키는 극도로 실용적인 공간. 세탁물 바구니를 둘 곳도 없고, 방에 누구 한 명이 있는 동안에 서로는 서로에게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미칠 수 밖에 없는 공간이었다. 책 읽는 소리, 모닝콜 소리, 컴퓨터 자판 두드리는 소리.... 괜히 기숙사에 따로 독서실을 둔 게 아닌 거 같기도 했다.
미숙한 나는 계속 룸메이트에게 피해를 줬다. 주로 소음 문제나 냄새 문제였다. 대학 신입생이었던 나는 새학기의 온갖 술자리에 빠짐없이 참여를 했고, 자주 냄새를 풍겼을 것이다. 자는 중에 누가 도어락을 열고 들어와서 옷을 벗고 씻고.... 소리도 컸을 것이다. 그런데 그 사람은 내게 한 번도 자신이 불편한 것으로 말을 하지 않았다. 내가 밤늦게까지 이어폰을 끼고 게임을 하다가, 귀가 가려워 잠시 이어폰을 뺏을 때, 룸메이트가 조용히 욕을 중얼거리고 있던 것을 기억한다. 그런 공간이었다.
여름에 구관의 내부 공사로 인해서, 내가 살던 동의 사람들은 모두 신관 대학원 기숙사로 8월 말까지 거처를 옮겨야 했다. 그곳은 아마 5평이나 6평쯤 됐을 것이다. 방의 크기는 약 두 배쯤넓어졌지만, 쓸 수 있는 공간은 네 배쯤 넓어진 기분이었고, 뭐든지 산뜻하고 쾌적했다. 방마다 샤워실과 화장실이 있었고, 서로의 책상과 침대를 가려주는 블라인드도 있었다. 구관은 옷장과 침대 사이에 사람 한 명이 서면 지나갈 수도 없는 구조의 좁은 방이었는데, 이 곳은 블라인드를 설치하고도 공간이 남아서 굉장히 여유로운 느낌을 줬다. 이제 세탁물 바구니를 어디에 두어야 할지 같은 고민들은 더이상 하지 않아도 됐다는게 참 좋았고, 취미로 모으던 싸구려 양주 병이나 요리 기구들을 둬도 공간이 모자라지 않아서 좋았다.
방에는 각각의 옷장과 협탁이나 수납장 같은게 하나 있었던 걸로 기억하고, 내 기억이 맞다면, 방에는 게다가 작은 냉장고(냉장 기능만 있는)와 세탁기도 있었다. 이런 것들을 다 갖추고도 공간이 남았다. 그렇다고 거기서 공놀이를 하거나 할 수 있던 건 아니지만, 빨래를 널 수는 있었다. 구관에서 공용 세탁실을 쓰던 와중에 옷을 몇 벌 도둑 맞은 적이 있었다. 개인 냉장고가 생겼으니, 포스트잇을 붙여놓은 음식이나 음료가 사라지는 일도 없어졌다. 사실 제일 마음에 든 건 블라인드였다. 블라인드로 인해서 생긴 아주 약간의 프라이버시, 두 명이서 한 방을 쓰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조치라고 할만한 그것 덕분에 나는 조금 덜 피해를 끼치며 살 수 있게 됐다. 물론 앞서의 사건 이후로 내가 조심하는 것도 있었지만, 블라인드가 하나 쳐지고 공간이 넓어진 것만으로도 엄청난 효과가 있었다. 조금 넓어진 공간과 그 얇은 장막 덕분에 말이다. 그러니까 사실 그 전에 살던 구관이 너무 극단적인 공간이었던 것일테다. 누가 누구에게 소리를 안 낼 수 없는 공간, 냄새를 안 풍길 수 없는 공간. 그 쯤에는 평소 말 한 번 안걸던 룸메이트가 신관을 보고, 혹은 신관 생활에 기분이 좋았는지 몇 번 말을 걸었던 기억도 있다.
여름 방학이 끝나고, 매트릭스 교체와 기타 유지 보수 작업이 끝난 구관으로 우리는 돌아갔다. 다시 들어온 같은 방에서 나는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더이상 기숙사에서 지내고 싶지 않았다. 등교가 편하고, 값도 싸지만, 나는 더이상 기숙사에서 지내고 싶지 않았다. 두 사람의 신진대사만으로도 북적거리는 그 방이 너무나 싫었다. 이듬해 나는 어머니를 졸라 보증금 백만원에 월세 삼십만원짜리 방에 들어갔다. 4평 조금 넘는, 아주 마감이 별로였던 반지하 방. 그렇게 일 년 남짓한 기숙사 생활은, 이듬해 2월에 막을 내렸다.
우리 학교 기숙사의 구관은 정말 월세가 저렴했다. 한 달에 15만원이었으니, 전기세나 관리비를 빼면 아마 남는 돈도 없었을 것이다. 원래 기숙사가 무슨 영리사업을 하는 곳은 아니지만, 친구네 학교 기숙사(대신 거긴 신관 대학원 기숙사랑 구조가 같았다.)는 한달에 45만원을 받는다고 했다. 사범대와 기숙사가 가까워 등하교도 쉬웠고, 부대시설도 훌륭했다. 하지만 그, "신진대사만으로도 북적거리는 방"에서 그간 내가 스스로 들여다보지 않았던, 개인적인 공간에 대한 욕망을 발견했다. 전혀 남인 사람과 어떤식으로든 부대낄 수 밖에 없는 공간. 나는 남에게 더 피해를 주고 싶지 않을 수 있는 개인적인 공간을 원했다. 아주 절실히. 3평짜리 방에서는 어쩔 수 없는 것들이 너무 많았다. 내가 잘못하지 않았다는 얘기가 아니다. 조심을 하고 주의를 해도 어쩔 수 없는 부분들이 계속해서 생겨났다. 그래서 나는 기숙사를 떠났다.
한동안은 기숙사의 정원이 전체 학생 수 대비 부족해서 말이 많았지만, 갈수록 지방 출신 학생이 적어지는 요즘은 또 어떤지 모르겠다. 기숙사 정원에 뽑혔을 때, 나는 참 큰 안도감을 느꼈다. 안 그래도 없는 형편에 서울에서 지낼 곳은 또 어떻게 구할지 막막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판교에 사는 이모네에 신세를 저야했을지도, 아니면 고시원에서 지내야 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런 내게 기숙사는 최선이었다. 아니, 사실은 최선이라고 생각하고 싶었던 최소의 공간이었지만 말이다.
아마도 2편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