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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소리 Nov 25. 2022

"사물을 사유하다2 - 탁자"

'탁자'

3년 전 이 집으로 이사를 오면서 크게 결심한 것이 있다. 바로 거실 소파를 없애버리는 일이다. 소파에서 우리 가족이 얻는 안락함에 비해 반대급부로 떠안게 되는 패악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우선 소파에 온 가족이 모이는 것까지는 좋은데, 서로 길게 눕겠다며 자리다툼을 벌이는 일은 다반사요, 서로 합의를 봤다는 꼴이 두세 명이 엉긴 채 모로 누워 텔레비전에 몰두해 있는 모습은 망측스럽기 그지 없었다. 하루 일과를 끝내고 가족이 서로 눈을 맞추며 소통을 하기는커녕 소파에만 누우면 남편이고 애들이고 할 것 없이 연체류가 되어버리니 그 모습이 가히 가관이었다.      


소파의 단짝은 단연코 텔레비전이었다. 이것도 일심동체라 할 수 있을까만은 소파에만 앉으면 가족 일동이 모두 텔레비전에 시선을 고정한 채 가족 공동체라기보다는 소파 공동체라 불러야 할 판이었다. 살아온 날이나 살아갈 날이나 고만고만해진 우리 부부야 그렇다 쳐도, 한창 성장기에 있는 아이들이 몇 시간씩 텔레비전에 시력을 낭비하고 폭신한 소파에 파묻혀 척추가 휘어나가는 꼴은 더이상 두고 볼 수 없겠다는 판단이 섰다. 결국 다음 이삿날만 손꼽아 기다렸다가 벼르던 소파 반출 계획을 공포했다.     


남편과 아이들의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소파가 없어지면 텔레비전은 어디서 볼 것이며 가족들이 거실 바닥에 앉아서 텔레비전을 보다가는 다들 목디스크가 걸리고 말 거라면서 아우성이었다. 특히, 눕기 대장 남편은 하루종일 직장에서 시달리고 집에 와서 유일한 낙이 소파에 누워 채널 돌리기였는데, 자기가 낚시를 다니겠다는 것도 아니고 고가의 수집품 모으기를 취미로 하겠다는 것도 아닌데 고작 소파에서 누워 쉴 자유를 달라는 것도 불만이냐며 저항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하지만, 나의 결심도 만만치만은 않아서 고등학생 자매들 시력이며, 학업이며, 비틀어져 가는 척추를 이대로 방관만 할 거냐며, 이제는 책 읽는 분위기, 차 마시는 분위기, 가족이 눈을 맞추며 대화하는 분위기로 전환해야 할 기로에 섰다며 핏대를 세웠다. 어디 하나 명분에 틀린 말이 없는지라, 억울함을 호소하던 남편도 머쓱한 표정으로 반박이 어려운 모양새였다.      


내친김에 이사를 몇 주 앞두고 소파 자리를 대신할 6인용 탁자를 선구매하기 위해 어리벙벙하고 있는 식구들을 닦달해 가구단지로 출발했다. 자고로 원하던 물건이던 맘에 없던 물건이던 지름신이 강림하는 곳에 고집을 꺽지 않을 정신력의 소유자는 내가 보기에 순둥순둥한 우리 가족 중에는 없었다.     

내친김에 가구점에서 가장 고급스런 원목 우드슬랩 6인용 탁자와 1인용 원목의자 3개, 3인용 긴의자 1개로 구색을 맞추어 간 크게 거금을 지불했다. 최상급 우드슬랩 탁자의 표면에 손을 대니 매끄럽기가 스케이트 날로 빙판 위를 미끄러지는 듯하고, 천박한 반짝거림 대신 은은하게 빛나는 고급스런 광이 품격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드디어 이삿날 늦은 오후 휑하게 비어 있는 거실 한 가운데로 우드슬랩 원목 탁자가 자태를 뽐내며 들어섰다. 거실에서 눕지 못하게 된 것을 한인 양 아쉬워하던 가족들도 녀석이 뿜어내는 단아함과 품격에 기가 눌린 듯 신기하게 탁자 위를 몇 번이고 손바닥으로 쓸어보고 아쉬운 대로, 쿠션을 덧댄 원목의자에 엉덩이를 걸쳐보며 텔레비전과 시선 높이를 맞춰보기도 했다. 그렇게 소파를 벗어나 탁자가 지배하는 거실 생활의 서막이 올랐다.     


일단 탁자에 의자라는 구성은 식탁과 다를 바가 없으니, 호기롭게 들인 거실 탁자가 제 몫을 톡톡히 하기 위해서는 뭔가 용도에 있어 식탁과는 확연한 차별화를 가져야 했다. 나는 반들반들하게 광이 난 채 들어온 탁자에 한 올의 먼지도 허용치 않겠다는 듯이 마른걸레로 같은 자리를 몇 번씩 닦아내며 특별해야 할 녀석의 첫 용처를 궁리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노트북과 2단짜리 대형 책받침대를 탁자 위에 고정 손님으로 모셔 오는 것이었다. 최신형이 아니라 몸체는 좀 둔해 보이긴 해도 그럭저럭 재택근무나 사진 정리 따위에 소용되어 오던 노트북을 1번 의자쪽 탁자에 설치해 놓으니 찻잔만 하나 더 곁들여도 분위기 있는 카페 사진 하나쯤 건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개방된 거실이니 아이들도 노트북으로 볼썽사나운 것을 찾아보거나 대 놓고 게임 따위를 해 볼 배짱은 못 부릴 터였다.      

다음으로 2번 의자 앞쪽에는 책과 핸드폰, 사전, 메모지 따위를 함께 둘 수 있도록 2단 구조로 되어 있는 원목 책받침을 두었다. 적어도 책과 노트, 아니면 책과 테블릿 등 2개 이상의 읽을거리 쓸거리를 나란히 둘 수 있는 대형 책받침대야말로 내가 당초 소파를 빼내고 탁자를 두고 싶었던 궁극의 목적이라 할 수 있었다.

다소 속물적이고 현학적이긴 하지만 누가 와서 볼 때 책들이 펼쳐져 있는 거실 탁자 풍경은 우리 가족의 지적 수준을 한층 업그레이드한 것으로 보일 수 있는 최고의 인테리어 소품이었다.      


드디어 가족들이 저녁 식사를 마치고 시승식을 하듯 탁자에 둘러 앉았다. 늘 텔레비전이나 핸드폰에 꽂아 두던 시선으로 서로의 얼굴을 멀뚱멀뚱 바라보자니 잠시 어색한 공기가 감돌았다.

“생각보다는 그럴싸한데.”

그래도 부부간에 의리는 챙기려는지 남편이 한마디 거들며 긍정적 반응을 유도했다.

“부드럽긴 하다.”

“앉을 만은 하네.”

처음 소파가 사라진다는 사실에 경악하던 것에 비하면 다소 뜨악하긴 해도 제법 반응들이 호의적으로 흘러가는 듯했다.     

“그런데 텔레비전은 어떻게 봐?”

분위기가 잘 조성되어 간다 싶을 때 문득 막내의 뾰로통한 일침이 날아왔다. 틀린 말은 아닌 것이 소파는 일방향이라 전원이 텔레비전을 향해 시청하기 편한 구조였다면, 이번에 들인 탁자는 텔레비전을 등지고 마주보는 형국이니 가족이 다 모인다면 사람 몸에 가려 화면이 보이지 않을 판이었다.

“이제 고3도 머지 않았는데 공부해야지 텔레비전 볼 시간이 어디 있어.”

내가 언제부터 아이들을 입시경쟁에나 몰아넣는 보수적 부모였나 싶게 내 입에서 닳고 닳은 엄마표 잔소리가 흘러나왔다.

“엄마가 그랬잖아. 입시가 중요한 게 아니라 세상 보는 눈을 키우고 행복한 마음으로 사는 게 중요하다며!”

“그러니깐 바보상자는 그만 보고 책을 가까이 해야지!”

“하루 종일 학교에서 공부하고 공부방 갔다가 저녁 늦게 잠깐 스트레스 풀려고 보는 건데도 못 보게 하면 우린 어떻게 숨 쉬고 살아.”

“하긴 조금 앉아 있어 보니 허리가 아프긴 하다.”     

이젠 남편까지 애들 편에 붙어 과거로의 회귀를 모색하는 분위기였다. 박쥐 같으니라구!

“암튼 소파는 이제 안 들일 테니까. 거실에 나와 있고 싶으면 탁자에 앉든가 바닥에 앉든가 알아서들 해!”

독단적이긴 하지만 더 이상 불만을 허용했다가는 탁자는 이내 창가 쪽으로 밀려나고 그 자리를 소파가 다시 들어와 차지해버릴 것 같은 위기감에 급히 자리를 떠났다.     


그렇게 탁자는 3년을 퇴출당하지 않고 우리 거실에 버티고 있다. 그동안 과연 내 바람대로 탁자에서 가족들이 차를 마시며 일과를 나누고 의미 있는 컴퓨터 작업을 하거나 책을 읽으며 모범적인 거실 생활에 적응했는지 궁금해하실 분들도 있을 것이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일단 탁자는 거실 중앙 자리를 내주고 결국 창가로 자리를 옮겼다. 다행히 내가 붙박이로 가져다 놓은 노트북과 2단짜리 대형 책받침대는 자리를 지키고 있긴 한데, 나머지 절반 공간에는 아이들이 화장대로 쓰거나 잡동사니가 쌓여 있어 분위기 있게 차를 마시긴 어렵게 되고 말았다.     

그렇다면 소파가 있던 거실 중앙에는 대체 뭐가 차지하고 있을까?     


결단을 되돌리지 않겠다는 나의 자존심과 텔레비전 볼 자리, 편히 앉을 자리를 시위하는 가족들간에 타협점이 된 것은 1인용 사무용 의자 3개였다. 다리 받침대를 펼치고 등받이를 뒤로 눕히면 제법 엉거주춤하게나마 누울 수도 있는 의자들은 소파의 패악을 최소화하면서 동시에 거실에서 휴식을 취하고자 하는 가족들과 나 사이의 절묘한 타협점이었다.      


사무용 의자 세 개가 덩그러니 가정집 거실 한 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는 흉물스런 장면을 여러분은 제발 상상하지 말아 줬으면 좋겠다. 잡지책에 나오는 품격 있고 학구적인 인테리어를 원했던 내 소망은 결국 산산조각 났지만, 그나마, 노트북 자리에서 얼마 전부터 30년 동안 절필해왔던 글을 다시 쓰기 시작했고, 2단짜리 대형 책받침대에서는 다이어리 정리와 독서를 편리하게 즐기고 있다. 게다가 가끔씩은 네식구가 모두 탁자에 둘러 앉아 깨알같은 수다를 떠는 일도 전보다는 잦아져 우리 가족의 텔레비전 시청 시간은 부쩍 줄었다.     


비록 속물적인 나의 욕심은 채워지지 않았지만, 그래도 이 기괴스런 거실 인테리어야 말로 나름대로 가족간의 소통을 역설해온 나의 소망을 가족들이 완전히 저버리진 않았다는 반증이라 나는 믿는다.     

남편이 아직까지 소파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않고 거실 인테리어를 이리저리 궁리하고 있듯이 나 또한 탁자를 다시 거실 중앙으로 모셔오겠다는 바람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  이제는 보이기식 인테리어 목적이 아닌, 나 자신과 우리 가족들의 꿈을 키우고, 서로의 삶을 공유할 수 있는 진정 따스한 공간으로서의 탁자를 꿈꾸면서 말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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