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을 사유하다1 - 공기청정기"
'공기청정기'
오십 초반에 접어들며 우리 부부는 부쩍 아침잠이 줄어 새벽부터 부스럭거리며 집 안을 돌아다니는 일이 잦아졌다. 오늘도 이른 새벽 눈을 떠보니 남편은 이미 거실에서 뭔가를 하고 있었다.
“필터 간지가 벌써 2년이 넘었길래”
남편은 공기청정기 필터 뚜껑을 막 열고 있는 참이었다.
어휴! 어마어마하구먼!
2년간 온 집안의 먼지를 끌어 모아오던 청정기 필터 앞에서 우리 부부는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집안 어딘가를 이리도 많은 먼지들이 떠돌고 있었단 말인가. 필터 본체는 자취도 없이 온통 뿌연 먼지 더께가 두텁게 들러붙어 그 자체로 하나의 먼지 뭉치 같았다. 맞벌이의 피곤함에 청소는 일주일에 한 번이 고작, 그에 반해 매일 네 식구가 들락거리며 묻혀 들어온 먼지와 강아지 두 마리가 털어내는 털까지 온갖 것들의 부유물들을 공기청정기는 빨고 또 빨아들였을 터였다. 저 정도 두께의 먼지층을 뚫고 오늘 하루도 공기를 빨아내느라 기계는 얼마나 허덕거리며 고단한 하루를 보냈을까 안쓰러워질 정도다.
저 먼지들 안에 우리 가족들의 살비듬은 물론이요, 애견 몽실이와 레오의 털비듬도 섞였을 것이요, 밖에서 묻혀 들어온 먼지와 공해물질도 쌓였을 것이다. 그뿐이랴 주방에서 먹거리를 만드느라 복닥거리며 배출한 기름 먼지, 음식 분자들도 허공을 휘돌다 빨려들어 더께에 더께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깨끗해진 공기를 뿜어내던 공기청정기 안에는 지난 2년간 우리 가족들의 삶에서 털려 나온 온갖 분비물과 찌꺼기들이 차곡차곡 쌓여가고 있었던 것이다.
먼지가 딱지처럼 들러붙은 필터를 남편이 끙끙대며 종량제봉투에 쑤셔 넣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청정기의 노고에 새삼 감사하기도 하고, 더럽기만 했던 먼지 더께에서 우리 가족 2년 치 삶의 온기가 느껴지기도 하고 여러 감정들이 교차했다.
늘 무언가를 성취하고 이루어가는 것에만 몰두해왔던 시간들이었다. 그 와중에 발생하는 먼지와 찌꺼기들에 대한 염두는 없었다. 청소기와 청정기가 감추어주고 걷어가 준 덕에 우리들의 노곤한 분비물과 찌꺼기들은 망각 속으로 사라지곤 했다. 그 먼지 따위가 무엇이라고 기억을 하고 말고 하냐 하겠지만, 일종의 반추라고 할까. 소의 되새김질처럼 그 분비물과 찌꺼기들의 더께에서 지난 2년간 우리 가족들이 지나온 시간의 온기가 어제인 듯 되살아난다.
그 속에 우리 가족의 분주함이, 노곤함이, 기쁨과 한숨이 깃들어 있다. 하루하루 소진되어 가는 시간 속에 우리는 성취하기도, 덧없이 소비되기도 했으며 그러는 사이 우리의 호흡과 한숨, 소매와 목덜미, 외투 자락 어디선가에서는 끊임없이 살비듬과 먼지들이 떨어져 나왔다. 먼지 더께는 우리 삶의 더께이다.
쓰레기봉투에 담은 폐기된 필터는 그대로 쓰레기장으로 보내졌다. 어제 택배로 도착한 깨끗하고 매끈한 새 필터가 청정기 속을 새로이 채웠다. 퇴근 후 남편과 함께 청정기에서 나오는 공기를 쐬어 보니 전보다 훨씬 가볍고 상쾌한 공기가 느껴졌다. 먼지 더께 없이 깨끗한 필터를 장착한 공기청정기는 전성기를 누리듯 상쾌하기 그지없는 공기를 호기롭게 쏟아낸다. 우리 삶 어딘가에 더께가 되어 쌓여 있을 시간들을 털어낸다면 우리 삶도 젊은 시절로 돌아갈 수 있나? 그 시절의 맑고 순수함도 재생되려나? 엉뚱한 상념이 잠시 뇌리를 스치는 사이 남편의 한 마디가 날아온다.
“필터를 자주 갈아줘야겠어. 공기가 다르잖아!”
그랬던가? 삶의 분비물과 더께들도 자주 덜어내 주어야 어깨를 짓누르는 노곤함과 가슴 속 텁텁함도 털어내 지려나?
삶의 청정기는 대체 페부 그 어디에 먼지 더께를 감추고 견뎌내기에 내 삶의 찌꺼기들은 덜어지지 않는 것일까? 우리 인생의 필터도 새롭게 갈 수 있다면 좋으련만, 이놈의 필터가 어느 구석에 감추어져 있는지조차 가늠키 어려우니 필터 교체는 꿈도 꾸기 어렵다.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던 40대를 지나 50줄에 접어드니 사고도 느려지고 판단력도 흐려질뿐더러 몸도 무겁고 노곤함에 눌려 작은 일에도 버둥거리기 일쑤다.
일상은 그렇다. 세월 따라 더께가 쌓이고 성능도 떨어지지만 공기청정기처럼 필터를 빼서 갈아 끼울 수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어제도 오늘도 삶의 무게를 견디어 가며 새벽 5시면 일어나 출근 준비를 하고 퇴근 후에는 가족들의 식사를 차리고 자투리 시간을 쪼개어 베란다 카페에 앉아 책갈피 해 놓은 책을 펼치고, 지금처럼 글도 쓰고 있다. 어쩌면 우리 인생은 찌꺼기들을 걸러내 덜어내기보다는 더께에 더께를 더해가며 무소의 뿔처럼 묵묵히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닐는지. 복권에라도 당첨되어 직장도 그만두고 화려한 생활을 새롭게 시작하는 것도 꿈같이 좋은 일일 테지만 이겨 내온 지난 시절을 가차 없이 털어내 버리기에는 버려질 자취들에게 조금은 미안하고 소진되온 내 시간들이 아깝다.
누구에게나 삶 속 은밀한 폐부 안에는 덜어내고 싶은 기억들, 삭제시키고 싶은 허물들, 돌이키고 싶지 않은 상처와 실패의 상흔들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호흡하고 순간순간 세포들은 분열하고 있으며, 눈에 보이고 귀로 들리는 것에 반응하며 사고하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멈추지 않았다. 심지어 좌절해 몇 날 몇 일을 두문불출하던 그때 그 어둠의 시기에도 우리는 호흡하고 살아냈다.
견뎌온 덕에, 묵묵히 더께와 함께해 온 덕에 소중한 가족들이 함께하고 있고, 내일의 일이 기다리고 있으며 지난할지언정 가 닿고 싶은 꿈을 놓지 않고 또 하루를 살아낸다.
몸에서 떨궈진 먼지와 찌꺼기들은 쓰레기통으로 보내 버렸지만, 내 삶의 폐부 깊숙이 쌓인 더께들은 왠지 떨쳐내고 싶지 않다. 노곤함과 상처들이면서 동시에 이겨내고 살아내었다는 나의 증표들이기에. 오늘을 살아내고 내일을 설계하게 하는 거름과도 같은 존재이기에 말이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자러 들어가기 전 소리 없이 돌아가는 공기청정기를 보니 공기맑음 표시에 불이 들어와 있다. 순간 뭔지 모를 시간의 두께가 나를 포근하게 안아주는 느낌이다. 인생에는 버릴 것이 없다. 흘러가는 시간 속에 연약해지고 쇠락할지언정 나는 얇아지지 않았다. 내 삶의 더께들이 오늘의 나와, 그리고 내일의 나와 함께 할테니 말이다. 이제 상념은 접고 이 순간 내게 허락된 잠 속으로 들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