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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소리 Jan 01. 2023

"사물을 사유하다 7 - 볼펜"

볼펜

70년대 후반 국민학교 생활을 했던 나는 학교생활의 첫 시작을 연필깎이로 시작했다. 어머니는 서툰 내 손을 잡고 직접 연필 깎는 연습을 시키셨다. 어린아이들에게는 범접할 수 없던 칼날의 세계에 입문하게 된 것이 두려우면서도 어른이라도 된 양 신기하고 흥분되었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매일 오후 하교 후에는 닳아진 연필을 작은 연필깎기용 칼로 칼날을 벼리듯 날카롭고 뾰족하게 깎아내는 것으로 다음날 등교 준비를 하는 것이 일과였던 시절을 지나, 문구점에 샤프펜슬이 등장하면서 연필은 차츰 사용 빈도가 줄어들게 되었다. 문명의 이기로 플라스틱 네모난 필통 안에는 몽당 연필들 옆에 날렵하고 세련된 샤프펜슬 한 자루와 샤프심통이 자리하게 되었다.      


그러나 정작 국민학생이던 시절 가장 부러웠던 것은 중학교에 이어 고등학교를 다니던 오빠가 쓰는 볼펜을 써보는 일이었다. 물론 모나미 볼펜이 아무리 귀한 시절이라 해도 오빠에게 빌려 쓰는 것쯤이야 불가능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내가 정말로 부러웠던 것은 볼펜이란 녀석이 연필이나 샤프처럼 썼다 지웠다가 자유롭지 않고, 한 번 쓰면 영구히 흔적을 남긴다는 속성 때문이었다.      


이 말은 다시 말해 연필이나 샤프가 아닌 볼펜을 쓴다는 것이 지울 필요가 없을 만큼 실수하지 않고 온전한 문자를 써낼 수 있다는 능력치를 반증한다는 뜻이었다. 초등학교 졸업반이라 한들 고등학생인 오빠 정도의 필력이 나에게는 아직 기대되지도, 갖춰지지도 않았다는 사실이 아쉬웠다. 볼펜은 그래서 일종의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했던 것 같다.     


드디어 중학교에 진학하면서 필통에 모나미 볼펜이 색깔별로 들어가게 되었다. 또 한 번의 일취월장이었고, 뿌듯한 도약의 상징이었다. 물론 여전히 철자를 틀리게 쓰거나 획을 잘못 그어 삭선을 긋는 일이 많았던 시절이지만 흰색 종이 위에 검정 흑연가루만 날리던 어리숙한 시기를 졸업하고 총천연색의 볼펜 글자들이 교과서 여백에 가득 차고 하얀색 종이 위에 채색되는 것을 볼 때 뿌듯해지는 것과 동시에 우쭐하기까지 했다.      


볼펜을 쓰기 시작하면서 아쉬운 대로 볼펜 지우개가 있긴 했지만 종이 표면을 연마하는 방식이라 글씨 쓴 자리가 닳아지거나 구멍이 뚫리는 단점 때문에 쓰는 행위 자체가 한층 신중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철자 하나하나를 머릿속에 떠올리며 한 글자 한 글자 신중하게 눌러 썼던 기억이 난다. 물론 볼펜을 사용하던 초창기 기억들이지만, 그때처럼 글씨를 쓰는 행위에 정성과 집중력을 다했던 적은 그 후로 없었던 것 같다.      


그랬던 기억이 온갖 필기구들로 가득 찬 채 오랜 시간 소용되지 않던 필통을 오늘 간만에 열어보다가 떠올랐다. 형광펜, 네임펜, 0.5 샤프, 0.7 샤프, 샤프심, 삼색 볼펜, 모나미볼펜 한정판 디자인 3종, 수성볼펜, 수정테이프 따위로 필통이 불룩하다. 하긴, 이십대 초반에 도입된 컴퓨터 사용이 보편화되면서 이제는 연필이고, 볼펜이고 아예 필기구를 손에 쥐는 일 자체가 자주 없으니 그 시절에 느꼈던 자긍심 따위는 이제 빛 바랜 추억 속 얘기가 되었다. 컴퓨터의 등장으로 자유 자제로 썼다 지웠다가 순식간에 가능하게 되면서 쓴다는 행위에 대한 신중함이나 엄중함의 정도도 많이 증발해 버린 것이 사실이다.      


새해를 시작하는 오늘, 다이어리와 여러 노트들을 볼펜으로 정리했다. 다이어리에는 새해 목표와 체크리스트, 새로 구입한 건강 노트에는 하루에 할 운동과 먹어야할 건강식들을, 가계부에는 연간 재정 계획과 월간 예상 수입과 지출액 등을 하나 하나 볼펜으로 적어 나갔다. 새해 첫 장에 수정테이프 흔적을 남기기 싫어 신중에 신중을 더하여 정성껏 다이어리와 노트들을 적어 나가다 보니, 간만에 떠올린 볼펜에 대한 추억이 새삼 짙어진다. 비록 이글은 컴퓨터에 대고 자판으로 치고 있지만, 2023년에 써나갈 수없이 많은 단어들에 볼펜으로 써나가던 시절의 신중함을 보태고 싶은 마음이 든다. 한살이 더해진 만큼 입 밖으로 내는 말들과 행동 하나 하나에도 보다 신중해지고 허투루 하는 일이 없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오늘 필통 속에 갇혀 있던 볼펜들이 책상 위로 나와 나에게 던져 준 사유는 여기까지다. 모든 이들이 보다 신중하고 보다 정성들여 2023년 새해를 시작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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