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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윤하 Yoonha Kim Jun 24. 2020

하나씨에게. 2

2020-05-08 (금) 12:26



하나씨의 첫 편지를 받고 또 이만큼이나 시간이 지났어요. 서울의 시계에는 제가 모르는 부스터라도 달려 있는 걸까요? 코로나도 그렇고 제 몸도 그렇고, 작년이나 재작년에 비하면 현격하게 한가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하루가 눈 깜짝할 새에 지나가요. 하나씨가 이야기한 것처럼 서울이라는 도시가 제정신이 아닐 정도로 빠르고 정신없이 돌아가는 곳이라 그럴지도 모르겠어요. 아침에 일어나서 밤새 밀린 타임라인을 잠깐 확인하고, 가벼운 스트레칭을 하고 창문을 열고 이불을 털고(올봄은 미세먼지가 적어서 좋아요. 코로나가 데려온 유일한 장점일지도 모르겠어요), 아점을 챙겨 먹고 가벼운 메일이나 일들을 처리하고, 원고 건 외출이건 그날의 메인이 되는 일정을 처리하고 나면 금세 해가 져버려요. 일을 줄이고 나서도 이렇게 허겁지겁 살 줄 알았으면 그냥 살던 대로 살 걸 그랬다 싶으면서도 그랬다가는 내 정신도 몸도 버티지 못했을 거라 생각하고 다시 마음을 다잡습니다. 저에게는 지금의 이 여유가 꼭 필요해요. 


지난해 꽤 오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뒀다고 얘기했었죠? 2013년 봄에 미국 다녀와 시작했던 일이었으니 거의 7년 가깝게 다녔더라고요. 연말에 회사에 일을 쉬어야 할 것 같다고 말씀드리기가 정말 어려웠어요. 그냥도 아니고 수술이며 호르몬 치료며 명확한 이유가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말하기가 어려워서 한참을 고생했는데 지나고 보니 이유가 뭐였는 줄 알아요? 글쎄 제가 그동안 한 번도 먼저 무언가를 그만둔다고 먼저 이야기한 적이 없더라고요! 20년 가까이 일을 하면서 단! 한 번도요! 스스로 너무 우습고 무서웠어요. 그렇게 닥치는 대로 일을 하고 변변하게 제대로 쉬어본 적도 없는 삶을 살았는데 그동안 제 의지로 무언가를 시작한 적도 그만둔 적도 없었다는 게요. 


맞아요. 시작도 그래요. 평론가라는 직업은(직업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개체수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전문직이고 쉽게 말하면 외주잖아요. 글도, 방송도, 행사도 전부 다요. 저의 관점이나 지식, 때로는 평론가라는 알량한 간판이나 이름이 필요한 사람이 저에게 연락을 주어야지만 일을 시작할 수 있죠. 당연한 듯 일해온 시간들이지만 한 편으로는 이 모든 게 꿈이나 기적처럼 느껴지기도 해요. 그 사람들은 그 수많은 사람들 중에 왜 저와 함께 일하자는 연락을 하는 걸까요. 당장 눈 앞의 일 처리하느라 꼴딱거리는 평생을 보냈지만 그 사이 아주 작은 틈이라도 생기면 종종 생각했던 것 같아요. 이 사람은, 이 곳은 나의 뭘 믿고 함께 일 하자고 제안하는 걸까. 얼마 전 저의 오랜 SNS 친구인 금정연 평론가가 ‘나에게 주어졌던 그 모든 호의들에 감사한다’는 글을 쓴 적이 있는데 그 말이 딱이었어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고마운 마음이 들면서도 한 편으로는 늘 궁금했어요. 이 사람들은 내가 하는 일들에서 무얼 보고 있는 걸까. 잘하고 있는 걸까. 평생 혼자 일해왔기에 더 궁금하고 궁금했어요. 


그 질문에 대한 힌트가 하나씨의 편지에 쓰여있어서 솔직히 조금 기뻤어요. 저는 늘 제 것이 아닌 다른 사람의 음악과 그 사람을 이야기했지만 그 안에서 제가 보였다는 말이요. 정말 고맙게도 제 글과 말을 좋아한다는 분들을 가끔 만나긴 했지만 함께 일했던 사람에게 이렇게 직접적으로 이야기를 듣는 건 처음이라 좀 설레기도 했어요. 그리고 그런 이야기를 해 준 사람이 하나씨라서 더요. 제가 하나씨 보고 ‘에디터계의 록 스타’라고 이야기했던 거 기억나요? 하나씨가 그 말을 어떻게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정말 진심의 진심이었어요. 우리 주위에는 예술가들이 참 많잖아요. 그중에는 누가 봐도 예술가의 별에서 태어난 것처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완벽한 사람도 있고, 자칭 예술가라고 하니 그러려무나 싶은 사람도 있죠. 씨실과 날실처럼 이 바닥을 촘촘히 메우고 있는 그 사람들 속에서 하나씨는 제 눈에 번쩍 빛나는 빛을 가진 사람이었어요. 하나씨가 말한 것처럼 세상에서 가장 힙 하고 멋있다 여겨지는 것들을 가장 빠르게 잡아채 이것이 유행의 최전선이라고 끊임없이 제시해야 하는 직업의 특성상 좀처럼 어려워 보이는 생각과 말들을 그래도 굳이 하는 사람, 그게 하나씨였어요. 


하나씨야 말로 하나씨가 쓴 글 그대로의 사람이었어요. 하나씨는 그 시간이 소모되는 시간이었다고 했지만 누구보다 솔직하고 과감한 질문들로 채워진 인터뷰나 거칠 것 없이 뾰족한 날을 그대로 드러내는 칼럼들을 보면서 이 사람 정말 재미있다고 생각했죠. 다들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고 하지만 사실 제가 사람을 꽤나 가리거든요. 자의 반 타의 반 먼저 연락을 하는 경우도 거의 없고, 같이 일을 했다고 해서 지인이라며 어울렁 더울렁 만남을 지속하는 경우도 드물어요. 프리랜서로서는 최악의 성격이긴 한데, 겉보기 등급보다 사교적이지 못한 본성 탓도 있고, 혹시나 사적인 관계로 일이 틀어지는 경우가 생기는 게 싫어서 이런저런 원칙을 세우다 보니 이렇게 되었어요. 음악가나 관계자들과 일정 수준 이상의 밀접한 관계를 가지면서 마땅히 해야 할 이야기를 하지 못하거나 납득 어려운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을 적지 않게 봐왔거든요. 


하나씨는 조금 달랐어요. 그렇게 자주 만난 것도 아니고 그리 오랜 인연도 아니었지만 그렇게 가끔 밥을 먹고 차를 마시고, 우연히 공연장에서 만나 인사를 나누고 공연을 같이 보면서 항상 마음이 편하고 들떴어요.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우리 둘 다 비슷비슷한 가짜들 속의 진짜를 (그것이 허황이라도) 찾고자 하는 사람이어서가 아니었을까 싶어요. 그렇게 비슷한 파장을 가진 두 사람 가운데 하나는 그 가짜들 가운데에서도 진짜를 찾기 가장 어려운 케이팝 이야기를 많이 하고 있고, 또 다른 한 사람은 진짜를 찾아 진짜의 나라로 떠나버렸으니 우리 어쩌면 서로 극단의 위치에서 비슷한 길을 걷고 있는 건 아닐까 싶기도 하네요. 


그렇게 극단의 극단에 서서, 저는 종종 무거운 산소통을 메고 처음 보는 세노테에 몸을 던지는 하나씨를 떠올리곤 합니다. 하나씨가 편지에 써 준 것처럼, 그 깊고 어둡고 고요한 곳에서 하나씨가 찾은 ‘온전히 나 자신으로부터 찾는 위안과 사랑과 안정’이 뭘까, 나도 어딘가에서 언젠가는 그런 걸 찾을 수 있을까 생각하곤 해요. 왜 서울에서 사는 사람들도 그런 걸 다들 찾잖아요. 때로는 종교로, 때로는 명상으로, 때로는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는 방식으로 나와의 대화를 시도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결국 다음날 아침 뜨는 해와 가야만 하는 밥벌이 앞에서 대부분 도로아미타불이 되어 버리죠. 역시 답은 떠나는 것뿐일까 생각하며 인도로, 이스탄불로 떠나던 그 많은 얼굴들을 떠올리다 그들의 지금을 생각하면 다시 헛웃음을 짓고 말아요. 이건 단순히 떠나거나 노력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구나. 그냥 생의 어떤 순간이 나에게 찾아오고 그 순간을 선택한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선물이구나 생각합니다. 5년 전 하나씨의 결심이 그런 순간이 아니었을까 싶어요. 하나씨는 자신이 진취적이지도 못했고 게을렀다고 했지만 아뇨, 그럴 리가 없어요. 일상의 관성과 피로에 젖어 살 수밖에 없는 도시 인간들 특성상 그런 순간의 쉽게 눈에 띌 리가 없고, 설사 그것이 기적처럼 눈에 띄었더라도 그렇게 과감한 결정으로 인생의 방향을 송두리째 바꿔놓을 수 있는 결정은 정말 아무나 할 수 없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런 의미에서 지금 하나씨가 느끼고 있는 크고 아름다운 감정들은 온전히 하나씨의 용기가 만들어 준 마법 같은 순간들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씨가 종종 이야기하는 지금이 행복하다는 이야기들이 그래서 저에게 이렇게 큰 울림으로 다가오는 게 아닐까 싶어요. 요즘도 계속 새로운 세노테를 찾아 새로운 모험을 떠나고 있나요? 전 한동안 이런저런 지원사업 심사며 원고로 바빠 세상 돌아가는 걸 제대로 돌아볼 시간도 없었어요. 대신 심사를 보며 지금 이 코로나의 시대가 예술가들에게 얼마나 어렵고 혹독한 시절인지를 간접적으로나마 느낄 수 있었어요. 바이러스로 각박해진 세상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를 멀게 하고, 미래를 불안하게 하고, 그래서 마음의 여유를 바싹 메마르게 만들지만, 좋은 예술과 좋은 인연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들은 사라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이게 너무 과한 바람이라면, 잠깐 사라졌더라도 언젠가는 다시 꼭 돌아왔으면 좋겠어요. 그 귀한 마음들이요. 


답장 기다릴게요.



윤하.



ps 사진은 지난주 바람 쐬러 갔던 공원 풍경이에요. 세상은 시끄럽지만 봄은 봄이네요. 봄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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