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5-16 (토) 05:53
윤하씨, 안녕.
하는 것 없이 시간이 빨리 가는 건 지구 반대편 멕시코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는 건 먹고 자고 다이빙하는 것밖에 없는데 그래도 다행인 건 큰 죄책감은 없어요. 태어나 지금까지 아무것도 안 하고 있으면 내가 ‘쓸모없는 사람’처럼 느껴져 꽤나 자책하는 스타일이었거든요. 복잡하고 다사다난했던 서울 살이 할 땐 이리저리 치이며 열심히 뛰어다닌 나 자신을 위해 월급날이면 ‘나에게 주는 선물’이라는 명목으로 이것저것 사들였던 시간이 있었는데, 다이빙 시작하고 한국을 떠나 꼬따오에서 살면서 내가 얼마나 없어도 되는 것들에 집착하며 살았는지 깨달았어요. 작은 시골 섬이라 무엇이든 원하는 게 있으면 (결제만 하면) 집으로 찾아오는 시스템도 없고, 맥도널드나 스타벅스도 없는 곳이어서 먹고 싶은 게 있으면 만들어먹어야 했죠. 그나마 태국은 한국 음식 재료 구하기도 쉽고, 함께 음식 해서 나눠 먹을 친구들도 많았는데, 멕시코는 그렇질 않네요.
요즘은 각종 SNS에서 ‘1년 전 오늘’ ‘3년 전 오늘’ 등 리마인드 해주는 포스팅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많이 해요. 우리는 어쩌면 다시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함께 앉아서 밥을 먹고, 해변에서 마시고 취하고 춤추고, 서로 뜨겁게 껴안고 사랑한다 말하던 시절이요. 다이빙으로 먹고살던 친구들은 이미 직업을 잃었고 더 이상 찾아오지 않는 여행자들의 빈자리에 당황하며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어요. 대부분은 심한 우울증을 겪고 있고, 저 또한 그런 친구들을 위로하며 최대한 마음을 단단히 먹으려 하지만, 아까 말했듯 우리가 누렸던 모든 행복한 순간들이 어쩌면 ‘영영 다시 안 올지도 모르겠다’는 불안 때문에 한동안 괜찮다가도 어느 순간 마음이 짓눌리고 숨이 턱 막히는 느낌이에요. 저뿐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람들이 앞으로 경험의 자유를 누리지 못할 것 같아요. 마음껏 여행하지 못하고, 마음껏 누굴 만나지도 못하고, 마음 편하게 식사를 즐긴다거나 스포츠, 놀이를 즐긴다거나, 어떤 공통된 경험을 한 장소에서 함께 하지 못 할 것 같아요. 윤하씨가 있는, 제가 있던 필드에선 뮤지션의 공연이 사라졌고, 제가 지금 있는 필드에선 다이빙이 사라졌죠. 한 달만 참으면, 아니 그게 1년이라 해도 시간이 지나면 나아질 거라는 희망이 있으면 버틸만할 텐데 지금으로선 그런 희망이 안 보여요. 저는 이성으로 비관하고 의지로 낙관하는 사람이라 언제나 삶에 대해 샤랄라한 애티튜드를 가지지 않는 편이긴 하지만, 지금의 팬데믹은 엄청나게 큰 혼란과 불안을 모두에게 선사하고 있는 것 같네요.
꽤 오랜 시간 동안 ‘No’라고 말하지 못했다는 윤하씨 편지를 보면서 피식 웃었어요. 윤하씨뿐만이 아니에요. 제가 일하던 꼬따오 다이브 센터의 한 영국 친구는 항상 저에게 이렇게 얘기하곤 했어요. “하나는 ‘No’라고 절대 얘기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이게 문화의 차이인지 나란 사람 자체의 성향인지 모르겠지만, 꼬따오에서 5년 동안 유러피안 친구들과 지내면서 느낀 건 그들은 정말 자기표현에 솔직하다는 거예요. 상대방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자신이 그런 얘기를 하면 상처 받지 않을지, 불쾌하지 않을지, 오해가 생기지 않을지 등등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게 아니라 그보다 우선이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거예요. 저는 그런 친구들을 보면서 사실 큰 문화 충격을 받았어요. 뭐가 낫다 옳다는 아니지만, 그래서 적어도 그들은 후유증이 크지 않아요. 자신을 우선시하고,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고, 자신의 의견을 내세우는 건 결코 비난받을 일이 아니에요.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시간이 지나고 나서 돌아보면 우리는 늘 자신의 감정을, 자신의 생각을, 자신의 의견을 우선시하지 않았던 걸 늘 후회하곤 하잖아요.
요즘은 꼬따오 친구들과 자주 메시지를 주고받는데 시차가 반대라 쉽지 않네요. 사람들에게 살갑게 먼저 안부 묻고 체크하는 타입은 아닌데, 요즘처럼 자의가 아닌 타의(아니 바이러스에 의해서라고 해야 하나)에 의해 극단적으로 제한된 인원의 사람들을 만나는 건 제 인생 처음이라 그리 편안한 시간은 아니에요. 꼬따오에서 친하게 지내던 멕시칸 친구가 있었는데, 다이빙 끝나면 멕시칸 식당에 가서 함께 타코와 나초, 코로나 맥주를 곁들이며 제가 멕시코에 가서 얼마나 다양한 종류의 오리지널 타코를 먹게 될지 들떠 떠들던 시간이 있었죠. 지금 전 멕시코에 있지만 꼬따오에 있을 때보다 타코 먹기가 더 힘들어요. 이곳은 아직도 모든 곳이 셧다운 돼 모든 식당이 문을 닫았거든요.
한국 뉴스를 보고 있으면 마음이 아파요. 누구의 잘못도 아닌 이 바이러스 때문에 사람들이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고 있는 걸 보면서요. 이태원 클럽 발 확진자가 나오면서 그 화살이 성소수자 커뮤니티로 튀었는데 상상도 할 수 없는 비난을 타임라인에 올려놓은 페이스북 친구 몇몇을 차단해야 할 정도였어요. 코로나 사태를 그리도 자랑스럽게 잘 컨트롤해온 내 나라 사람들이 너무 부끄러웠어요. 아직도 한국은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고, 서로 헐뜯고 비난하고 잘못을 추궁하죠. 어차피 그래 봐야 우리는 <설국열차> 꼬리 칸에 탄 사람들인데 그들끼리 서로 머리끄덩이 붙들고 기차에서 끌어내려하는 거죠. 입주민 갑질에 자살한 경비원 아저씨 이야기도 그렇고. 어찌 보면 이건 한국인들만의 문제가 아닌 전 세계 각국에서 다른 방식으로 나타나지만 본질은 같은 문제인 것 같아요. 소수자 차별, 인종 차별, 계급 차별, 서로를 향한 혐오와 폭력은 지금 같은 팬데믹 상황에서 더 날카로워지네요. 저는 아직도 몸만 어른인 애처럼 이런 세상이 너무 무섭고 두려워요.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모르겠어요. 다행히도 지금까진 제가 너무 복 받은, 운 좋은 사람이라 지금 이 세상 누군가가 겪고 있을 혐오, 차별, 폭행 등을 피해 갔을 뿐 언제든 제가 피해자가, 혹은 가해자가 될 수 있어요. 하지만 제가 지금까지 살아온 경험을 바탕으로 이뤄진 신념을 통해 믿는 건 제가 피해자가 되는 건 선택할 수 없지만, 제가 가해자가 되지 않는 건 선택할 수 있다는 거예요. 저는 그저 앞으로 살면서 가해자가 될 수 있는 상황에서도 그렇게 되지 않기를 선택하는 거죠. 이렇게 이야기하면서도 막상 그런 선택의 상황이 된다면 제가 얼마나 잘 해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어쩌면 우리는 모두 삶에서 그런 과정을 겪고 있는 것 같아요.
많은 사람들의 신경이 곤두서 있고, 스트레스와 불안이 만연해있고, 우리는 모두 마음 둘 곳을 찾아 헤매고 있는 것 같아요. 슬픈 일이죠. 인간이 지구 상에서 가장 우월한 종이라도 되는 것 마냥 자연을 파괴하고, 심지어 총과 칼로 같은 종을 짓밟고 지배해왔는데 바이러스 앞에서 집 밖으로 한 발자국 나가지 못하는 신세가 되어 버리니 얼마나 화가 나고 불안하고 우울하겠어요. 그런데 그 바이러스는 눈에 보이지도 않고. 있다고는 하는데 보이지는 않으니 총도 못 쏘고 칼로 찌르지도 못하고. 그러니 얼마나 화가 나겠어요. 현재로선 미국 사람들이 그걸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지만, 우리 모두 표현하는 방법이 다를 뿐 대부분 비슷한 뿌리의 감정일 거라 생각해요. 우리가 그동안 얼마나 오만했는지, 우리가 모든 걸 컨트롤할 수 있다는 착각에 얼마나 오랫동안 빠져왔었는지. 저는 요즘 이런 생각을 많이 해요. 나 역시 그동안 내 몸과 영혼에 시나브로 쌓여온 오만과 편견을 비워내고, 겸손하고 평온한 인간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요. 내가 알게 모르게 누군가와 주고받은 상처와 폭력과 무심함이 있진 않았는지, 나는 온전히 누군가를 받아들이고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인지. 바이러스 때문에 우리 인간들은 더 이상 37.5도 이상 뜨거워지면 안 되는 상황이 되었지만, 내 마음은 내 영혼은 무언가에 얼마나 뜨거워질 수 있는지. 그러기 위해서 나는 무엇을 해야 하고, 또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제가 있는 멕시코 칸타나오로 주는 저녁 7시부턴 통행제한에 차 안엔 한 사람만 있어야 하고, 마스크를 꼭 써야 해요. 아직도 차 안에 혼자 있는 사람이 마스크를 왜 써야 하는지 이해가 안 되긴 하지만 가만히 있어서 땀이 주르륵 흐르는 곳에서 마스크를 잠깐만 써도 숨 쉬기가 너무 답답해요. 그래서 다이빙 말곤 제가 집 밖으로 나가는 일은 아예 없답니다. ‘Dry Law’라고 해서 일정 시간이 아니면 주류 판매 금지도 시행되고 있는데, 이건 참 흥미로워요. 태국도 봉쇄령과 함께 주류 판매 금지법이 내려졌거든요. 지금 태국은 주류 판매 금지는 완화되었지만요. 바이러스로 사람들이 집에서 못 나오는데 술도 먹지 말라는 거죠. 원래 술을 잘 마시지도 못하고 좋아하지도 않아서 이 역시 저는 운이 좋답니다. 하지만 워낙 집에만 있고 할 게 없다 보니 멕시코산 깔루아 한 병 사다 놓고 우유에 섞어서 조금씩 마시는 중이에요. 저는 예전에 바텐더도 했었고 조주사 자격증까지 있답니다. 너무 생뚱맞죠. 술도 못 마시고 안 좋아하는데. 이건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이야기할게요. <체험 삶의 현장>에 가까울 만큼 저는 어렸을 때 여러 가지 일을 많이 했어요.
부디 한국의 진정된 코로나가 신천지 때처럼 크게 확산되지 않길 바라요. 그래도 해외에서 이 팬데믹을 겪고 있다 보니, 한국만 한 곳이 없구나 합니다. 제발 코로나 검사 좀 받아라, 클럽에서 놀았다고 뭐라고 안 할 테니 제발 좀 검사받아라, 테스트 비용 청구도 안 하고 걸렸어도 공짜로 치료해 줄 테니 제발 숨어있지 말고 나타나 검사 좀 받아라 사정하는 나라,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우리는 무언가를 숫자로 볼 때 감각이 무뎌지는 경향이 있잖아요. 스토리 라인이 있는 한 사람의 드라마틱한 억울한 죽음에 대한 뉴스와 수백, 혹은 수천, 수만이 전염병으로 죽었다, 하는 뉴스에 반응하는 감성의 정도가 다르죠. 하지만 적어도 현재의 한국 정부는 그 숫자로 뭉뚱그려지는 다수의 생명에 무책임해지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듯 보입니다. 그래서 한국에 있는 엄마와 아빠, 친구들을 크게 걱정하지 않아요. 반대로 그들이 나를 걱정하죠. 하하하.
그럼, 오늘도 안녕히.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