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19
2019.05
‘삶은 불공평하다’는 구태의연한 구절을 다시 한 번 되새긴다. 조심스러운 사람들은 그들의 무례의 가능성에 예민해하지만 무례한 이들은 그저 한없이 둔감하기 때문이다. 같이 일해야 하는 나의 클라이언트를 살펴보자. 우리 팀과 일주일에 적어도 7~8번의 회의를 하는 이 자는 일주일에 적어도 두 번은 노쇼를 하고 세 번은 늦는다. 물론 지나가는 말이라도 미안하다고 말하는 법이 없다. 회의가 시작되면 남의 말은 잘 듣지 않고 하고 싶은 이야기를 성에 찰 때까지 반복한다. 사람대접할 수 없는 이 자를 앞으로 익스트림 미팅 빌런(Extreme Meeting Villain), 줄여서 EMV라 부르도록 하자.
며칠 전에는 EMV와의 회의에 늦지 않기 위해 점심을 10분 만에 삼켜야 했다. 그렇게 온라인 회의실에 겨우 제 시간에 도착해서 그를 기다린 지 15분이 지났을 때야 이메일 하나가 EMV대신 이메일 한 통이 도착했다: " [EMV]님이 회의 시간 변경을 요청했습니다. "
컴퓨터 저편에서 나의 고통에 즐거워하는 EMV의 흉악한 미소가 너무도 쉽게 그려진다. 그가 나를 시험하는 것은 아닐까: ‘거기 새로 오신 분은 비둘기인가 매인가?’ 나는 호구가 아님을 증명해야 하는가.
‘당신은 비둘기인가 매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비둘기의 탈을 쓰려 하는 매다. 친절함을 마주했을 때는 적어도 똑같은 친절함으로, 불쾌했다면 차갑게 대하는 것이 나의 기본값이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이른바 미스터 함무라비. 이런 대응 방식의 장점은 속에서 분노를 삭히는 일이 없다는 것이고, 남들에게 당하고 살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기분이 상했음을 확실히 표현하면 이후로는 상대도 나를 대하는 일에 있어 조심하게 된다. 단점은 명약관화하다. 가끔씩 부딪힌다. 그래도 나이를 먹으며 부딪히지 않는 선에서 내 기분이 나빴음을 표현하는 기술이 점점 늘고 있다.
그렇게 임전무퇴 일격 필살의 기상을 지닌 매가 비둘기의 탈을 쓰려 하는 것은 조금 더 성숙하고 세련된 방법으로 사람을 대하고 싶어졌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부정적인 감정을 표현하고 나서, 그저 흘려보낼 수는 없었던 것인가 생각하는 일이 잦아졌다. 굳이 그렇게 했어야 했나. 화를 내야 했다면 애초에 대꾸할 가치가 없던 상대였던 것 아닌가. 그리고 아주 가끔씩, 유머를 방패로 삼아 웃으며 무례를 빗겨내는 어른을 마주하면 존경하는 마음을 보내지 않을 수가 없던 것이었다. 시비를 걸기 위해 눈을 부라리고 걷는 땅딸보 닭들 사이에서 도도하게 걷는 학을 보는 기분이랄까. 그들의 모습을 보며 2019년의 목표 중 하나로 ‘가장 무거운 무례도 흘려보내는 부드러움'을 가져보기로 했다. 상황에 맞춰 다양한 전략을 쓸 수 있는 것은 항상 좋다고 생각하고, 클라이언트처럼 화를 내면 안되는 상대가 있기도 해서, 요즘은 날아오는 화살들을 피해 몸을 유연하게 구부려 보고 있다.
그래서 비둘기가 되고자 하는 매는 불쾌한 상황을 접할 때 남만 원정을 떠난 제갈공명을 생각한다. 서기 225년 남중 원정전에 나선 공명은 손쉽게 남만의 왕 맹획을 사로잡지만, 패배를 인정할 수 없다는 그를 놓아주고 다시 싸워 승리한다. 맹획이 그의 적수가 되지 못함을 알기 때문이다. 그렇게 싸워 이기고 풀어주기를 일곱 차례, 포로로 잡힌 그를 공명이 다시금 풀어주자 맹획은 눈물을 흘리며 감복하고 촉에 충성을 약속한다. 칠종칠금(七縱七擒)의 이야기.
그로부터 1800여 년이 흐른 서기 2019년, 회의를 잡아놓고 지각하기를 반복하는 EMV를 웃음으로 용서하길 수차례, 몇 달 후 프로젝트가 끝나자 EMV는 공명의 자애로움에 탄복해 감사를 표한다:
“나랑 일하는 것이 쉽지 않을 수 있음을 안다. 그동안 나를 감내해주어 고맙다.”
공명은 계약서를 살피고 계약기간이 만료했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한다. 그리고 이제서야 오랜 여정이 끝났음을 인지한다. 이윽고 그는 얼굴을 반쯤 가려 웃는 눈만 보여주던 그의 백우선(깃털 부채)을 내리고 말한다:
“당신과 일하는 것은 썩은 방귀 냄새를 맡는 것과 같았다. 집으로 가는 길에 비둘기가 당신의 정수리에 설사 똥을 싸기를 바란다. 집에서는 맨발로 걷다가 레고 블록을 밟았으면 좋겠다. 만나서 더러웠고 다신 만나지 말자.”
백우선을 내리자 관옥 같은 얼굴의 공명은 온데간데없고, 함무라비 왕이 근엄한 표정을 지은 채 빌런을 노려보고 있다. 빌런의 놀란 얼굴을 뒤로하고 미스터 함무라비는 도포자락을 휘날리며 와인과 아이스크림이 기다리는 집으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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