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를 생각하며
23-May
매해 1월 1일이 되면 새해 목표를 몇(3~5) 개 세우고 이를 위해 꾸준히 노력하는 편이다. 그중에는 추상적인 것 - '무례함을 부드럽게 흘려보내기' - 들도 있고, 꽤 간단해 보이는 것 - '매주 마스크 팩을 하기' - 들도 있다. 올해의 목표들 중 하나에는 '운전할 때 욕하지 않기'가 있다.
신기한 일이다. 평소에는 욕을 하지 않으면서 도로 위의 무법자들을 만나면 조건 반사처럼 욕을 쏟아내니 말이다. 제법 점잖은 성격을 가지신 아버지가 운전하며 욕을 하시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엄마는 운전 시 '또라이' 정도의 표현을 하지만 그보다 격한 말은 하지 않는다. (자연스럽게, 우리 집에서 허용되는 폭언의 언어 천장 또한 '또라이'가 된다. 물론 서로에게 쓰지는 않는다.) 그런데 동생은 나와 같이 운전대 앞에서 입이 거칠어지는 편이다. 갑자기 끼어드는 차량을 향해 차진 욕을 뱉는 동생을 보며 형제의 버릇은 도대체 어디서 비롯되었는가 고민하다 가설을 건넸다. 우리 형제가 운전하며 욕을 하는 것은 순전히 할아버지 때문이라고.
어렸을 적에는 할아버지가 운전하는 차를 탈 일이 많았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20여 년 동안 할아버지 할머니와 우리 가족은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살았다. 할아버지 집 아파트 단지와 우리 집은 사이에는 2차선 도로 하나가 놓여 있을 뿐이어서, 나는 가상의 대지진이 나서 한쪽 아파트 단지가 도미노처럼 앞으로 쓰러지는 것이 아니라 옆으로 누워버리면 다른 쪽 아파트에 닿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곤 했었다. 엄마와 아버지 두 분 모두 바쁘실 때면 할아버지가 나 혹은 동생을 데려다주시는 일이 자연스러웠다. 유년 시절 할아버지가 운전대 앞에서 내뱉으셨던 욕들이 - 할아버지는 '쌍놈'이라는 단어를 애용했던 기억이 있다 - 어딘가에 각인되어 있다 반 세대 후에 운전대 앞에서 발현하기 시작한 것이리라.
초등학교를 들어가기 전 1년 동안은 늦은 오후를 아예 할아버지 집에서 보냈었다. 아직 교직에 계셨던 어머니의 부임지가 차로 한 시간이 걸리는 옆 도시였고, 아버지는 당시 군인이었기 때문에 유치원에서 돌아온 나를 돌봐줄 사람이 없었다. 내가 기억하는 할아버지의 첫 모습도 이 시기의 일이다. 유치원에서 받은 과자를 들고 계단을 올라가는데 현관 창문에 기대어 담배를 피우고 계시던 할아버지가 나를 보고 웃으며 물으셨다. 할아버지가 피우는 구름과자와 바꾸겠냐고 말이다. 너무 오래전 일이라 그렇게 말씀하시는 할아버지의 얼굴이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았었다.
그런 할아버지의 얼굴을 다시 채색할 수 있었던 것은 불과 1년쯤 전의 일이다. 어머니를 도와 가족사진들을 정리하다가 어린 시절의 우리 형제와 같이 찍은 할아버지의 사진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통이 큰 바지를 입고 계시는 할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었다. 할아버지는 생각보다 키가 크셨고 또 50대 치고는 꽤 동안에 잘생기셨었다. 붉은 계열의 점퍼와 바지가 꽤 잘 어울려서 패셔너블해 보였다.
그제야 자신이 남자답고 키가 커서 영어도 못하지만 카츄샤 - 할아버지는 카투사를 이렇게 발음하신다 - 로 차출되었다는 할아버지의 말이 실감이 났다. 이것은 할아버지의 18번 무용담이기도 했다. 보초 업무를 서던 자신이 기지에 무단으로 들어오려던 1성 장군을 제지하고 여차여차해서 그에게 군인정신을 인정받아 일개 부대에서 카츄샤로 전출받았는지. 어떻게 추수감사절마다 팔뚝만 한 칠면조 고기를 먹고 매주 세탁병이 빳빳하게 다려준 군복을 입었는지 말이다. 내가 카투사로 군 생활을 하며 외박을 나올 때마다, 할아버지는 신이 나셨는지 이 이야기를 해주셨다. 이는 꽤 재미있는 이야기라 처음에는 나도 퍽 흥미롭게 들었는데, 할아버지께서 몇 차례 이야기를 반복하시는 바람에 나중에는 그다지 집중하지 않게 되었다.
자대배치를 받고 있었던 단일한 면회 때도 어머니 대신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오셨었다. 동두천에 있는 미군기지에 놀러 오신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미군기지를 이리저리 둘러보고 내가 사는 배럭(Barracks, 생활관)도 구경 오셨었다. 아버지도 비교적 오래 군생활을 하셨고 할아버지는 카투사로 군생활을 보냈기 때문에 두 분 다 흥미로워하셨던 것 같다. 그러고는 부대 앞에서 좀 벗어난 번화가에서 점심으로 삼겹살과 함께 맥주를 마셨다. 나는 아직도 이 날 마신 맥주를 잊지 못한다. 논산 훈련소와 카투사 훈련소에서 보낸 9~10주는 성인이 된 이후 가장 길게 금주를 했던 기간이었다. 그 날 얼음 잔에 담겨온 맥주 500ml에 나는 얼굴이 시뻘게지도록 취했다. 그래서 부대로 어떻게 돌아가야 할지 심각하게 고민했었다. 군대와 금주, 얼음잔에 담겨온 맥주와 면회는 너무도 많은 회상점이 있기 때문에 아마도 할아버지를 생각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기억이 될 것이다.
군대를 다녀온 이후로 줄곧 미국에 살았기 때문에 한국에 3개월 이상을 머무른 기억이 없다. 방학 때 잠시 한국을 들어와서 할아버지 할머니와 한 번씩 식사를 하는 일은 의례가 되었고, 그렇게 의례적으로 나누었던 대화들 - 공부를 열심히 해라, 일을 열심히 해야 한다 - 이 기억에 남을 감정을 일으키지는 않았다. 별생각 없이 답변하다가 한 번은 할아버지의 노파심이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던 적이 있었다. 할아버지가 나에게 가진 기대치가 내가 스스로에게 정해 놓은 기대치보다는 당연히 낮을 것이라는 생각에 이르렇기 때문이다. 그 이후로는 할아버지가 그런 말씀을 건네실 때마다 씩씩하게 '네 열심히 할게요 할아버지!' 하고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럼 할아버지는 '고럼' 하고 고개를 끄덕이셨다. 할아버지도 나도 서로 진심이었다.
그렇게 몇 번의 방학과 휴가가 흘렀던 21년 9월, 하루 밤 사이에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쉬어버렸다. 가족들 모두 별 일 아니라 생각하고 병원을 예약해 드렸는데, 더 큰 병원에서 검사를 받고 폐암 4기 진단을 받으셨다. 가족 모두가 적잖이 놀랐었다. 팔순을 넘긴 나이기는 했지만 나이에 비해 매우 건강하셨고, 좋아하시던 연초도 몇 해 전에 끊으셨었다. 의료계에서 일하는 동생은 할아버지의 암이 담배와는 큰 관련이 없다는 말을 해주었다. 차라리 담배로 인한 암이었으면 납득이라도 될 것 같다는 마음이었다.
암 진단을 받으신 이후로 할아버지는 내게 자주 결혼을 권하셨다. 직접적으로 말하시지는 않으셨지만 할아버지의 병이 하나의 이유였을 테고, 나보다 최소 서너 살은 많은 육촌 형들, 그러니 할아버지의 형님의 손주들, 이 대부분 결혼을 못한 것이 다른 하나의 이유였을 것이다. 나는 그 기간 동안 진지하게 연애를 한 상대가 없었다. 그리고 사실 나의 결혼을 할아버지의 바람 때문에 서두르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아버지의 바람이라면 모를까. 물론 나도 안타깝다. 나의 자식들을 할아버지가 안아보시면 그만한 효도가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내가 대학교를 마친 후 직장을 시작하기 전에, 그러니 아마도 할아버지의 발병 전에, 우리 가족과 고모의 가족 그리고 할아버지 할머니가 모여 식사를 하다가 내 미래 결혼 상대가 대화의 주제가 된 적이 있다. 이 날의 대화는 웃음점이 너무도 많았기에 나에게 너무도 즐거운 기억으로 남아있다. 네가 꼭 한국인이 아니라 푸른 눈을 가진 제니퍼나 나타샤를 데려와도 된다는 아버지의 농담 섞인 말에 할아버지는 허허 웃으셨지만, 평소 매우 온순하신 할머니께서 극구 반대를 하시는 바람에 온 가족이 크게 웃었다. 그리고 나의 결혼 상대로는 동향 사람이나 강원도 여자가 좋을 것 같다는 할아버지의 말에 온 가족이 또다시 파안대소했었다. 할아버지의 삶의 지도가 있다면 '결혼 상대는 동향 사람'이라는 말이 그가 다녀온 북극점과 남극점을 고스란히 보여준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로부터 몇 년 후 할아버지가 결혼할 색시가 있냐고 다시 물었을 때 나는 푸른 눈과 금색 머리를 가진 나타샤를 할아버지께 소개하는 상상을 아니할 수 없었다. "하이 은구. 마이네임 이즈 나타샤. 나이스 투 밑유. 아 해브 헐드 소 머치 어바웃 유." 나타샤를 사랑하는 나를 보며 눈이 푹푹 쌓이는 밤에 할아버지는 혼자 쓸쓸히 앉아 소주를 마시려나.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하얗게 흰머리를 가지신 나의 할머니 할아버지께서 응앙응앙(?) 울으시는 상상을 하며 나는 혼자 웃음을 삼켜야 했다.
이 회고록에 가장 큰 반전이 있다면, 그것은 나의 할아버지가 아직(23년 5월)까지 잘 살아계시다는 점일 것이다. 심지어 병원에 계시지도 않은 채로 말이다. 폐암 4기 진단을 받았을 때만 해도, 나는 할아버지가 몇 개월 안으로 돌아가실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2년이 조금 안 되는 시간을 꽤 건강하게 잘 사셨다. 비록 목소리는 계속 쉬어있었지만, 실감되는 변화 없이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며.
그러다가 최근에 호흡이 좀 가빠와 산소호흡기를 쓸까 고민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할아버지의 여정이 이제는 오래 남지 않았음을 느끼게 되었다. 할아버지를 생각하다가 문득, 그를 기억하는 일이나 그에 대해 글을 쓰는 일을 딱히 늦출 이유가 필요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이 글을 쓸 결심을 하게 되었다. 앞으로 다가올 예정된 죽음 이후에 나의 감정이나 기억이 얼마나 바뀌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말이다.
분명히 사후(事後)에는 바뀔 마음이지만, 지금의 나는 할아버지의 죽음을 생각할 때 너무도 슬픈 감정이 들지는 않는다. 이는 할아버지가 가족 식사자리에서 스스로 '나는 복 많은 노인네다'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할아버지의 말씀의 요지는 자식들과 손주들이 모두 똑똑하게 자라고 번듯한 직장을 가지고 있어서 노인정에서 다들 나를 복이 많다고 부러워한다는 것이었다. 할아버지가 출근하시는 춘천 석사동 어느 아파트 단지 안의 작은 노인정에서 자식/손주 자랑으로 할아버지를 이길 분은 없었던 모양이다.
이는 아마도 할아버지가 나에게 남긴 말들 중에서 가장 강력한 말이 될 것이다. 나는 복 많은, 행복한 노인네다. 내가 자주 지혜를 빌리는 지인 한 분은 그렇게 쓴 적이 있다. '무엇이 행복한 삶인지 생각해 봤는데... (중략)... 사는 순간 순간이 행복한 게 진짜 행복'한 삶인 것 같다고. 그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삶을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할아버지가 스스로를 수식하는 말로 '복 많은, 행복한'을 선택하셨다는 점이 나에게는 큰 평안으로 다가온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삶에 마지막 단계 앞에서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나는 멋진 할아버지를 두었고, 그런 할아버지가 부럽다. 할아버지는 정말 복 많은 삶을 사신 것이다.
다시 운전대 앞으로 돌아와서... 나는 운 좋게도 도로 위의 무법자를 조우할 때마다 할아버지를 기억할 수 있을 것 같다. 어쩌다 한 번씩 욕하고 싶은 마음을 참지 못했을 때 조수석에 탄 미래의 배우자가 나를 나무라면 나는 미소를 지으며 말할 것이다. 이것은 사실 할아버지의 유산이라고. 바른 행동은 아니지만 가끔은 할아버지가 남긴 것들에 감사를 표현해야 한다고 말이다. 그럼 어이없어할 배우자의 얼굴을 그려볼 수 있다. 그렇게 운전대 앞에서 가끔씩, 누군가 가장 오랜 시간 동안 술을 안 마셔본 기간을 물을 때마다, 그리고 백석의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를 읽으며 나는 할아버지를 기억할 것이다. 그리고 글을 쓰며 알게 되었다. 나는 근 시일 내에 말씀드려야 한다. 할아버지는 나에게 이렇게 기억되실 것이라는 것을. 그리고 나는 할아버지를 참 부러워한다는 것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