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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두녕 Nov 13. 2023

일출에는 셋, 석양에는 넷, 자정에는 둘인

Nov 23

2023-11


            달마다 생일 카드에 편지를 돌려쓰는 것이 관례인 모임이 있다. 동그라미 또는 네모 모양으로 둘러앉는 모임에서 편지는 어디선가 시작되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건네진다. “(차은우)씨 거야”. 그러면 다음 필자는 말없이 카드에 생일 축하 메시지를 적는다. 그리고 같은 말과 함께 다음 사람에게 건넨다. 사람들의 생일이 많은 달이면 연달아 앉은 세 사람이 컨베이어 벨트처럼 편지를 쓰고 옆으로 건네기를 반복한다. 그럴 때면 나는 [Her]의 호아킨 피닉스(Theodore 역)와 그가 짓던 따분한 표정을 떠올린다. 


            축하 대상과의 친분과 축하 문구의 정형성은 반비례한다. 잘 모르는 사람에게 편지를 쓰는 일은 고역인 탓이다. '(차은우)씨 생일축하드려요!' 그렇게 시작하고는 할 말을 찾기 위해 멈춘다. 마음에 없는 말을 글로 쓰고 싶지는 않기에, 짧은 고민 후 편지를 금세 마무리 지어버린다. '모임에 온 걸 환영해요. 앞으로 더 친해져요.' 다소 빈약한 축하의 말을 다시 읽으며 생각한다. 차라리 진짜 차은우 씨의 생일카드를 쓰고 싶다고.


            생일을 맞은 사람과 친할수록 편지의 자유도(degree of freedom)는 올라간다. 함께한 추억을 돌이켜도 되고, 명절에 만나는 삼촌처럼 시시껄렁한 시비를 걸어도 된다. 웬만하면 장난을 치지 않는 친구는 카드에 생일자의 추(醜: 추할 추) 상화를 그려준다. 팔자주름에 집중하면 사람이 사실적으로 못생겨진다는 사실을 그 친구를 만나기 전에는 몰랐다. 못생겼지만 분명히 닮은 그림을 보기 위해 그린 사람, 다음 편지를 쓸 사람, 그림에 그려진 사람 모두 카드에 달라붙어 깔깔댄다. 가끔은 백() 문장이 불여(不如) 일() 추상화다. 


            때로는 밀도 있는 시간을 보낸 사람에게 축하의 말을 전해야 할 때도 생긴다. 휘발성이 높은, 감사하고 즐거운 감정들이 결정이 될 때까지 쌓인 사람들. 하고픈 말들을 모두 담기엔, 함께 쓰는 편지 위 암묵적으로 할당된 공간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작은 네모 칸을 알맞게 채우려 말을 줄이고 줄이다 보면 가장 근원적인 감정만이 남는다. ‘너무 많이 고맙고 그래서 미안해.’ 그렇게 나는 편지를 쓸 때 때때로 엄마 얼굴이 된다(*). 나는 편지에 적은 문장을 동사 하나로 바꿀 수 있음을 이해하지만 선뜻 그렇게 하지 않는다. 


            대신 정말 인상 깊게 읽었던 편지 문구를 빌려오기로 한다. 오랜 시간 동안 알았던 친구를 송별하는 자리에서 누군가 적은 글귀. 그것도 아주 큼지막한 글씨로. 


            “(00아 잘 가!) 내 마음 알지?” 


            미음(ㅁ)과 이응(ㅇ)은 구멍이 숭숭 뚫려있는 자음이지만, 이렇게 쓰일 때면 텅 빈 것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내 마음 알지?’ 두 사람은 돌아오지 않을 시간들을 촘촘히 보냈던 것일까. 두 개의 미음과 이응, 그리고 마음도 빈 공간 없이 꽉 차있다. 



            “생일축하해! 내 마음 알지?”


            이렇게 적으며 편지를 넘긴다. 넘겨진 편지는 사람들의 손을 타고 저 멀리 떠난다. 네모와 동그라미를 채우기 위해 나를 생각하는 너의 마음을 이해하려 할수록, 작은 네모와 동그라미는 단단해지고 깊어진다. 


===

(*이슬아, 나는 울 때마다 엄마 얼굴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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