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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울림과 떨림 Dec 27. 2023

《최선만 주어도 괜찮다》

금쪽같은 내 새끼 말고

당신이 준 것은 분명 최선의 것이었지만 외견 이렇게 늘 초라했고 한편으론 촌스럽고 구질구질했다. 하지만 그 기억은 구질구질하지 않고 늘 고마움의 상징처럼 남아 있다. 당신은 분명 당신 최선의 것을 주었다. -번역 / 황석희-

아직도 그날이 어제의 일처럼 눈에 선하기만 하다. 중학생 때였을 듯싶다. 친구들과 곧잘 어울려 축구를 했는데, 운동화를 신고하자니 자꾸 미끄러지고 슛에도 힘이 실리지 않았다. 축구화를 신고 슛과 드리블하는 친구들이 못내 부러웠다. 나이키나 아디다스 같은 브랜드 축구화는 엄두도 내지 못할 때였다. 엄마를 졸랐는지 아니면 몇 달을 모았는지 잘 모르겠다. 하여튼 2만 원을 모은 날, 한걸음에 동네 시장으로 달려갔다. 가서 그럴듯한 걸로 하나 골랐던 기억만큼 생생하다. 말이 골랐지, 돈에 맞췄다는 게 더 정확할 것 같다. 다음 날, 비가 추적추적 내렸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친구들과 비를 맞으며 축구를 했다. 여기까진 좋았다. 친구들이 보는 앞에서 황당하기 짝이 없는 일이 벌어지기 전까지는 말이다. 발끝으로 공을 찼을 뿐인데, 하필 새로 산 축구화 밑창이 위아래로 입을 쩍 벌리며 갈라져 버렸다. 우째 이런 일이! 그날 처음 신은 축구화였는데, 정말 이럴 수는 없었다. 그걸 보는 내 가슴도 쫙 갈라졌다. 창피한 마음에 도망치듯 빠져나와 집으로 들어갔다. 젖은 몸은 어떻게 닦을 수 있었지만, 젖은 마음까지는 어찌할 수 없었다. 쉬이 마르지도 않아, 눅눅한 기분으로 한참을 이불을 뒤집어쓰고 이리저리 뒹굴었다.

부모님에게 지원받은 건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이건 우리 부모님도 인정하는 바다. 그렇다고 아버지 어머니의 사랑까지 최저였던 건 아니다. 물론 철없을 땐, 최저였다고 생각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두 분 모두 어영부영 사신 게 아니라 나름 치열하게 살아오셨다는 걸 알면서, 다르게 바라보게 되었다. 숟가락도 없이 시작한 두 분을 생각하노라면, 정말 최선을 다했구나 싶기 때문이다. 유년 시절에 부모로부터 최고의 지원을 받으며 컸든 아니면 최저의 지원을 받으며 컸든, 그것은 시간이 흘러 고스란히 내 자식을 향한 기대감으로 발전하는 것 같다. 그래서 최고를 통해 최고를 맛본 사람은 자식에게도 그러하기를 기대한다. “아빠 엄마처럼 최고가 돼야 이만한 혜택을 누릴 수 있어!” 이는 최저를 통해 온갖 설움을 겪은 사람도 매한가지다. “너희들은 이런 꼴을 당하면 안 돼. 아빠 엄마처럼 살지 않으려면, 최고가 돼야 해!” 감사한 건지 아니면 다행인 건지, 나는 부모님으로부터 “최고가 돼라!”라는 말을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 “1등을 꼭 해야 돼!”라는 말도 들어본 기억이 없다. 지극히 보통의 머리를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일 것이다. 솔직히 그럴만한 형편도 아니었다.

소유의 많고 적음이나, 얼마나 해 주었는가 등으로, 자식을 향한 부모의 사랑을 측량할 수 있을까? 또 그걸로 나를 향한 아버지 어머니의 사랑을 계산할 수 있을까? 부모의 사랑에 값이나 점수를 매기려는 것 자체가 웃기고도 슬픈 일이다. 측량할 수 없는 것이 더 많은 게 자식을 향한 부모의 사랑이기 때문이다. 요즘은 너 나 할 것 없이, 죄다 금쪽같은 내 새끼 천지다. 다 잘난 자식들 뿐이다. 어릴 때부터 “우리 아들 최고, 우리 딸 최고”라는 말을 들으며 큰다. 최고를 해 주려는 마음과 최고가 되라는 마음이, 부모는 부모 대로 자식은 자식 대로 피곤하게 만든다. 해 주고도 서로 불만인 관계를 낳는다. 괜히 베스트(best)를 추구하다 비스트(beast)가 되는 게 아니다. 부모님이 최고는 아닐지 몰라도 최선을 주었다는, 번역가 황석희의 말을 곱씹어본다. 비록 그것이 남들 보기에 누추하고 비루하게 보였을지는 몰라도 말이다. 여기저기서 자녀에게 최고를 해 줘야 최고의 부모라고 바람을 잡는다. 다 부모와 자식이라는 특수 관계를 이용한 상술일 뿐이다. 부모는 그때그때 자녀들에게 최선을 다하면 족하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그게 부모도 살고, 자녀도 사는 지름길일지도 모른다. 적어도 우리 집 세 아들만큼은 아빠 엄마를 생각했을 때, “그래도 우리에게 최선을 다하셨구나!”라는 마음이 들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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