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사람은 다 행복하게 잘 사는 것 같은데, 왜 나만 이 모양이지?” 이런 생각은 멀쩡하게 살던 우리에게 “이렇게 사는 게 어쩌면 불행한 건지도 몰라!”라는 의구심을 품게 만든다. 요즘 가만 보면, 행복하지 않으면 뭔가 이상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마치 공식처럼 여겨지는 듯하다. “행복을 위해 사세요!”라는 구호 아래, 행복을 방해하는 것들로부터 빨리 작별하라고, 지금 있는 곳을 미련 없이 떠나라는 조언도 서슴지 않는다. 말이야 싶지, 손쉽게 현장을 작별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현실은 그 가운데서도 어떻게든 적응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니 말이다. 행복을 타령한다고 행복하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그런다고 행복이 넝쿨째 굴러들어오지 않는다. 나만 더 비참해지고 불행하다는 생각에 빠질 뿐이다. 행복 과잉시대다. 아니 행복 강요시대다. 행복이라는 말이 차고 넘친다는 건, 역설적으로 그만큼 행복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행복하지 않은 사람이 되려 행복에 더 집착하는 법이니 말이다. 행복에 연연하고 목매는 순간은, 어쩌면 나 스스로 불행이라는 버튼을 누른 순간일 수도 있다.
행복을 부추기고 강요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돈을 얼마나 모아야 하고, 어떤 집에 살아야 하고, 어떤 차를 끌고 다녀야 하는지 등으로 설명한다. ‘이 정도는 있어야, 이 정도는 살아야, 행복한 겁니다!’라고 하는 건데, 행복의 조건을 손쉽게 제시하고 제안하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그런 당신은 정말 행복하냐고 말이다. 행복은 필연적으로 비교 의식에 기름을 붓는다. 인터넷이 보급되기 전, 스마트폰이 활개를 치기 전만 해도, 비교라고 해야 고작 가족과 친인척 그리고 동네 마을 정도였다. 그런데 지금은 미디어와 SNS 등으로 비교의 지경이 전 세계로 확대됐다. 세계적으로 비교하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가상의 공간에서 사람들은 연일 누가 더 행복하게 보일까를 앞다퉈 경쟁한다. 어느 때는 ‘누가 더, 덜 불행하게 보일까?’하고 시합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비교로 얻는 행복은 사실 우월감에 더 가깝다. 우월감으로 지은 행복은 마치 모래로 지은 성과 같아서, 그 자체로 불안하고 위태롭다.
행복과 불행을 구성하는 요소들은 참으로 다양하기에 수치로 환산할 수 없다. 행복은 조건보다 순간순간 느끼는 감정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 ‘나라는 존재를 건강하게 바라보면서 기특하게 여길 줄 알 때, 거리를 청소하는 환경미화원을 보면서 인사말을 건넬 때, 타인의 슬픔에 조소 대신 함께 아파할 줄 알 때, 치킨 한 마리로 온 가족이 하나되는 걸 볼 때, 자는 아이들을 바라보면서 턱밑까지 이불을 덮어줄 때, 길을 걷다가 문득 눈에 들어온 꽃을 보면서 미소 지을 때...’ 이렇게 행복은 때와 장소와 상황을 가리지 않고 손님처럼 찾아온다. 모두 오늘을 사는 사람, 지금에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누릴 수 있는 감정이다. 주위를 둘러보면서 비교하는 사람은 절대 포착할 수 없는 보물 같은 감정이다. 행복은 오늘을 그리고 지금을 감사한 마음으로 사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덤이다. 그러니 덤이 아니라 오늘과 지금을 살뜰하게 사는 게 먼저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