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자랑한다. 고로 존재한다.” 자랑하지 않으면 인간이 아닌 것 같다. 전에는 은근히 아닌 척하면서 자랑했다. 그래야 자랑하면서도 미운털 박히지 않고 사랑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예 대놓고 자랑한다. SNS를 보면, 누가 누가 더 “잘났는지, 잘됐는지, 잘나가는지” 경연이 벌어진다. 자랑하는 데 거침도 없고, 눈치도 보지 않는다. 그런데 그런 자랑이 사랑을 구걸하는 모습처럼 보인다. 자랑으로 “나는 사랑받고 있어, 사랑받을 자격이 충분해!”라고 증명하려는 눈물겨운 투쟁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잘난 것만 자랑하느냐 하면 그건 또 아니다. 아프고 힘든 데를 자랑하는 것도 그에 못지않다. 누군가 모임에서 “내가 얼마나 힘들게 컸는 줄 알아?”라고 말하면, 주위 친구들이 그냥 두고 보지 않는다. “그건 힘든 것도 아니야. 나는 더 했어!”라며, 자기의 무용담을 늘어놓기 시작한다. 또한 누군가 “전에 큰 수술한 적이 있었는데, 그땐 정말 죽는 줄 알았다니까!”라고 말하면, 다른 누군가가 더한 고통담을 늘어놓는다. “그건 수술도 아니야. 나는 완전히 죽다 살아났다니까!”다른 사람의 아픔과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면서, 자기가 겪은 아픔과 고통은 이해해 달라고 서로 아우성이다.
재미있는 건, 이 자랑 대결에서 최후의 승자가 되었다고 해서 공감을 더 받는 다거나, 뭔가 보상을 받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저 “내가 이렇게 살 수밖에 없는 건, 내가 제일 힘든 인생을 보냈기 때문이야!”라는 자기 합리화 정도를 건질 뿐이다. 이 경쟁은 나이가 들수록 더 치열해지는 경향이 있다. 전에 백발의 어르신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걸, 우연히 엿들은 적이 있었다. 그중에 제일 젊은 어르신이 (그래 봐야 70대 후반이었지만) 요즘 무릎이 아파서 걷기 힘들다고 하소연하셨다. 그랬더니 벌집을 쑤신 것 같은 반응이 뒤를 이었다. 80대의 어르신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일제히 한마디씩 하기 시작했다. “나는 무릎 관절 수술을 몇 번이나 했는지 몰라. 나는 뇌출혈로 쓰러졌다가 살아났다니까. 나는 이제 휠체어 아니면 걷지도 못해.” 삽시간에 고통담으로 진검승부가 벌어졌다. 나이가 깡패라고 했던가? 최후의 승자는 거의 1세기 전에 태어나 온갖 세월을 겪은 최고령 어르신이었다. 최악의 환경에서 태어나 최고의 고통을 통과한 분이었다. 아픈 데까지 자랑하는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다. “제발 나 좀 이해해 주세요. 나 좀 공감해 주세요. 그동안 정말 힘들었어요.” 이 한마디를 듣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남의 아픔을 공감할 줄 아는 사람이, 자기 아픔도 공감받을 수 있는 법이다. 아무리 세상에서 제일 큰 고통과 아픔이 내가 겪은 것이라고는 하지만, 조금만 주위를 둘러보면 나보다 더한 사람들도 허다하다. 모르면, 내가 세상에서 제일 힘들 줄 안다. 그런데 알면, 나보다 더한 고통 속에 살아온 사람들도 수두룩하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닫게 된다. 그러니 누군가 그간의 고통과 고생을 털어놓는다면, 그보다 더한 나의 고통담과 고생담으로 되돌려줄 일이 아니다. 내 상처를 보여줄 일이 아니다. “너 정말 힘들었겠구나. 나였으면 못 살았을 거야.” 이 말이여야 하지 않을까? 없는 사람끼리 없는 걸로 자랑하면 더 없어 보인다. 그것처럼 아픈 사람끼리 아픈 걸로 자랑하면 더 아플지도 모른다. 몸보다 마음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