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에도 끼지 못하는 찬밥 신세, 존재의 가치를 증명하는 데 실패한 사람, 소속이 불분명한 어중간한 이들에 이르기까지. 경쟁이 치열한 우리 사회에서는 이런 사람들을 루저로 분류한다. 그리고 못마땅한 날카로운 눈빛을 보낸다. 이런 뾰족한 눈빛에 자주 찔리다 보면, 자기를 혐오하는 것을 넘어 주변에 있는 사람들과 세상까지 전부 혐오하는 지경까지 이를 수 있다. 사실 남을 향한 혐오는 자기를 향한 혐오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자기에게 불만인 사람이 다른 사람을 향해서도 불만이고, 자기를 못마땅하게 바라보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향해서도 못마땅하게 바라보니 말이다. 혐오는 또 다른 혐오를 잉태한다. 문제는 혐오라는 감정이 어떤 모양으로든 분출된다는 것이다. 자기를 향하든, 타인을 향하든, 세상을 향하든 말이다. 이때 분출되는 혐오는 용암과 같아서 주변을 불살라버리는 파괴력을 지닌다. 혐오로 인한 범죄가 끔찍한 이유다.
“사람들도 이런 나를 한심하게 쳐다볼 거야. 나 같은 건 사랑받을 자격도 없어.” 자기를 혐오하는 사람이 쉽게 빠지는 생각이 아닐까 싶다. 이런 생각에 사로잡히면, 아무리 선한 의도로 손을 내밀어도 색안경을 끼고 바라본다. “나에게 잘해주는 건 뭔가 꿍꿍이가 있어서인 게 분명해. 나라는 사람을 알면 분명 실망하게 될 거야.” 그래서 사람들의 손길과 환대를 밀쳐내고 거절한다. 누구보다 위로와 따뜻한 손길이 절실하면서도 거절하는 것이다. 이렇게 쳐내고 저렇게 쳐내면, 주변이 황량해진다. 사람 하나 지나지 않은 광야처럼 말이다. 그러면 정작 괴롭고 힘든 날, 와르르 무너져내린 날, 누군가의 손길이 간절한 순간에, 나를 붙들어 주거나 붙잡아 일으켜 줄 사람을 만날 수 없다. “내 주변에는 아무도 없어! 나는 외톨이야!” 우리는 힘들 때 이렇게만 생각하지, 내가 떠나보냈다는 건 생각하지 않는다. 각자도생이라고 불리는 살벌한 세상이다. 하나같이 각자 생존을 모색해야 하고, 자기부터 챙기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것은 역설적으로 마음을 나눌 친구와 동료 혹은 공동체가 절실하다는 방증이 아닐까 싶다. 혼자서만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으니까 말이다.
사랑은 자기를 비롯한 세상을 저주하려는 늪에서 건져내 준다.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고 할 수도 있겠다.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맛을 안다고 했다. 어디 고기만 그럴까? 사랑도 그러하다. 사랑을 받아본 사람이 사랑할 줄 알고, 사랑을 받을 줄도 안다. 사랑은 받고 또 누군가에게 줄 때 온전해지기 때문이다. 살고 싶은 의지를 다 놓고 싶을 때, 누군가 내밀어 주었던 따뜻한 손길과 말 한마디는 또 한고비를 넘기게 한다. 때로는 사소한 것들이 위대한 능력을 발휘할 때도 있다! 뾰족하고 날카로운 시선이 아니라, “그래도 나는 너를 믿어. 너는 내게 소중한 존재야.”라고 하는 부드러운 시선은, 누구도 혐오하지 않도록 해 준다. 다른 사람뿐 아니라 마뜩잖은 내 모습까지 용서하도록 도와준다. 누구나 그렇듯, 내 안에도 거칠고 뾰족한 모서리가 많았다. 그걸로 이 사람 저 사람을 찌르면서도 그걸 몰랐다. 그러다 나를 품어주면서 사랑을 건네준 이들을 만났다. “나 같은 사람이 이런 대접을 받아도 되나?”라는 의심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건넨 사랑은 나와 세상을 건강하게 바라보도록 다리를 놓아주었다.
여전히 나의 못마땅한 점들이 눈에 띄고 그래서 속상할 때도 많다. 하지만 이제 더는 나를 못마땅하게 바라보면서 못살게 굴지 않는다. 나를 미워하지도 않는다. 부족한 모습도, 나의 모습이겠거니 하고 수긍하면서 공생하기를 배우고 있다. 내게 사랑을 건네준 분들 덕분에,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아무 오해 없이 받아들일 줄도 알게 되었다. 뾰족한 존재(사람)가 둥글둥글한 존재로 거듭나게 하는 건, 언제나 사랑이라고 믿는다. 사랑이 이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