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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울림과 떨림 Jan 27. 2024

《집밥 같은 말이 그립다.》

시성비와 분초사회를 살아내는 방법

바야흐로 가성비에 이어 시성비까지 따지는 시대가 되었다. 근래에 들어 사람들의 지대한 관심은 어떻게 하면 ‘시성비(시간 대비 성과의 비율)’을 높이는가에 있는 듯하다. 일종의 시간의 가성비라 할 수 있는데, 투자 대비 효과가 높을수록 스마트한 인간으로 살고 있다는 뿌듯함을 준다. “그래도 나는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 속에서 나름 지혜롭게 살고 있는 거야!” 시간은 인간에게 속한 영역이 아니다. 우리는 시간 앞에 언제나 을이다. 더군다나 전기처럼 충전해 두었다가 필요할 때마다 쓸 수도 없다. 그래서 속절없이 흘러가는 시간에 더욱 목매고 집착하는지도 모르겠다. 분초사회다 보니 일분일초를 허투루 쓰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엿보이는 듯하지만, 가만 보면 정말 그럴까 하는 의구심도 든다. 그렇게 아끼고 아낀 시간을 창조적인 일이나 나를 돌보는 일에 쓰기도 하겠지만, 유튜브나 넷플릭스를 비롯한 SNS에 제물로 가져다 바칠 때도 많기 때문이다.


앞으로 어디까지 극강의 효율을 추구하게 될까? 그만큼 삶이 편리해질지 모르지만, 한편으로는 두렵기도 하다. 사람을 향해 효율을 추구할 때, 현명한 인간보다 섬뜩한 인간이 될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극강의 시성비를 추구하다 보면, 결국 금쪽같은 내 시간을 축내는 사람을 혐오하게 될지도 모른다. 이는 선한 사마리아인 실험을 통해서도 잘 알려진 바이기도 하다. ‘시간에 쫓기는 상황’이 인간성과 윤리의식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는 걸 말이다. 시성비 전성시대에, 이제는 사람을 만나도 머릿속으로 계산기부터 두드리는 것 같다. “과연 이 사람은 내게 이득이 될 것인가? 아니면 손해가 될 것인가?” 이런 사고방식은 효율과 효과가 떨어지는 사람이다 싶으면, 일단 선부터 긋고 본다. 그러나 딱 봐서 얻을 게 많은 것 같으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시간을 가져다 바친다. 매사에 인만추(인위적인 만남 추구)를 들이대는 것이다. 연애를 위해서는 자만추(자연스러운 만남 추구)를 들이대는 세대가, 그 외에는 인만추(인위적인 만남 추구)를 들이대는 건 참 아이러니하다.


우리의 인생은 무수한 만남으로 이루어진다. 일종의 자만추와 인만추의 콜라보라고나 할까? 그중에는 의도하지 않은 누군가와의 만남도 한몫 차지한다. 내가 전혀 계획하지도 않았고 의도하지도 않았던 만남인데, 그걸 계기로 평생의 친구 혹은 배우자를 얻는 일도 빈번하다. 아무 목적 없이 우연히 만나게 되었는데 평생의 동반자를 얻은 것이다! 시성비를 따지는 분초사회에서는 분명한 목적과 용건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용건만 간단히’라는 눈총을 받아야 한다. 자만추와 인만추 가운데 어느 쪽이 더 낫다고 말하고 싶은 게 아니다. “그냥 생각나서 전화했어. 요즘 어떻게 지내? 오늘이나 내일 잠깐 만날래?” 이런 유의 반가운 말과 만남이 차츰 자취를 감추는 게 두려운 것이다. 문득문득 엄마가 생각나서 전화하는 거랑 평소에는 연락도 없다가 급전이 필요할 때만 전화하는 거랑은 질적으로 다르다. 꼭 용건이 있어야만 연락하고 만남을 추구하는 건, 비즈니스와 별반 다르지 않다. 이런 연락과 만남이 반가울 리 없다. 어쩌면 목적 없는 연락과 만남이 인간성 상실을 막아줄지도 모른다. 각자도생의 시대에 문득문득 나를 생각해 주는 사람, 내 안부를 궁금해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정말이지 든든한 일이다. 흉흉한 소식이 들려오는 요즘, “그냥 생각나서 전화했어. 어떻게 지내? 한번 볼까?”라는 집밥 같은 말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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