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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굼바 Nov 06. 2023

우리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미야자키 하야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君たちはどう生きるか)」 리뷰


 오랜만에 극장을 찾았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영화가 나왔댄다. 그날 동기 한 명과 수업이 끝나고 부랴부랴 넘어간 극장에서 결국 우린 한 애니메이션의 깊이를 실컷 탐닉하고 나오게 됐다.


 극장을 나서며 나는 일반 영화가 결코 구현할 수 없는 이 비현실적인 예술 세계에 감탄했다. 심지어 장기간의 수작업에, 마케팅을 하지 않았던(하야오에 의하면 순전히 개봉 애니메이션을 본 관객의 반응에만 의존하고 싶었다고 한다.)일종의 변화이자 시도를 감행한 것을 감사해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비록 내가 지브리의 팬은 아니지만 영화를 전공하는 학생이자 애호가로서, 그리고 객관적으로도 감독의 그런 독립적인 시도 자체가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의 생각과 달리 다른 대중들의 평은 꽤나 좋지 않았다. 난해하다거나 우리가 알던 지브리가 사라졌다거나 전범을 옹호하는 영화라거나 등의 이유를 내세우며 이 영화의 평점은 5~6점대(네이버 기준)에 머물러 있었다. 개인적으로 나는 이 영화를 '재미없다', '난해하다'고는 생각할 수 있다고 여긴다. 사람마다 다 다른 생각과 관점을 이원론적으로 평하고 들먹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전범을 옹호한다'는 것에는 동의할 수 없다.


 영화의 배경은 1939년부터 일어난 2차 세계 대전 중의 일본이다. 더 자세히는 1945년의 '도쿄공습을 당한 일본'에서부터 시작한다. 일본은 자신들이 저질렀던 진주만 습격을 대가로 미국이 투하한 폭탄에 의해 엄청난 피해를 이 공습으로 인해 받게 된다. 주인공 '마히토'는 그 공습 때문에 잠에서 깨고, 그 때문에 어머니를 잃고 한동안 그 괴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 이후 아버지와 함께 시골로 내려가 이모이자 새 엄마가 된 '나츠코'와 함께 살아간다.


 이 장면이 사건이 벌어지기 전 앞부분의 이야기이다. 많은 사람이 도쿄 공습을 당한 일본, 그 공습에 어머니를 잃어 괴로워하는 주인공, 이러한 요소에서 전범국이 가해자인 척 군다거나 그 어떤 반성의 여지도 없이 그려냈다거나 아버지가 군수사업 공장장인 것부터 잘못됐다고 말한다. 감하야오는 실제로 2차 대전 중 군수사업 공장장 아버지 밑에서 태어났고 공습으로 인해 어머니를 잃었다.(하야오는 사실 첫 번째 어머니가 있는 줄 몰랐다가 나중에 크고 나서  공습으로 인해 돌아가셨다는 걸 알게 됐다고 한다.) 때문에 그의 자전적 이야기를 배제하고 이 영화를 관람할 수는 없을 것이다. 게다가 하야오는 피해받았다는 것을 강조한 게 아니고 어린 주인공이 일찍이 어머니를 여의었다는 것에 대한 트라우마를 보여줬을 뿐이고(애초에 공습에 대한 피해를 강조했더라면 적어도 반미적 대사라든가 좀 더 감성적인 장면 정도는 넣었을 것 같다.) 아버지 군수사업 공장장을 하고 있다는 걸 긍정적 시각으로 담아낸 것도 아닌 어떻게 보면 그저 하야오 개인이 느꼈던, 있는 그대로를 표현한 것뿐이었다. 단순히 전범국이었던 일본이 공습을 받았던 (그쪽 입장에서의)피해 역사를 배경으로 썼기 때문에, 아버지가 군수 사업을 했기 때문이라는 이유만으로 이 영화를 극단적으로 폄하하는 것은 옳지 못한 일인 것 같다.






 본론으로 들어가 나는  주인공 '마히토'에 대해 말하고 싶다. 이 아이는 말수는 적지만 윗사람에게 예의 바르고, 사람간의 관계에서 어떤 선 이상으로는 넘어오지 않으려무관심한 성격을 가졌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자신이 받은 피해보다 더 많은 응징을 하고 싶어 피를 펑펑 흘리며 자해까지 하는, 어딘가 대담하면서도 괘씸하기까지 하다. 이런 마히토는 자신이 낸 상처 때문에 새 학교에 가지 않고, 그대신 이상한 왜가리 한 마리를 만나게 된다. 왜가리는 결정적으로 "마히토, 도와줘." 라는 말을 내뱉으며 마히토의 신경을 끌게 된다. 결국 마히토는 나츠코가 숲속으로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고 그 왜가리의 짓이 틀림없다 생각하여 이 영화의 큰 맥락 중 하나인 다른 차원의 '세계' 속으로 휘말리게 된다.


 타인에게 그토록 무관심하던 마히토가 나츠코를 구해야 한다는 생각, 그 사람은 아버지가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가진 것에서부터 나츠코를 '나츠코 엄마'라고 부르기까지. 마히토는 이 기묘한 세계를 경험하며 결정적으로 나츠코를 '엄마'라고 명명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크게  세 인물, 젊은 시절의 '키리코' 할머니와 마히토의 어머니 '히미', 큰 할아버지를 대면한다.



1. 키리코


 키리코가 있는 곳은 지옥으로 묘사되는 바다의 일부이다. 그녀는 와라와라에게 배불리 먹일 생선을 사냥하고, 마히토는 얼떨결에 그 일을 돕게 된다. 와라와라는 성숙하고 날아갈 때가 되면 온몸을 힘껏 부풀려 하늘 높이 날아가 윗세상의 생명으로 태어난다. 그리고 그 와라와라를 먹을 수밖에 없는 팰리컨들은 날아가는 그들을 마구잡이로 먹어치운다. 이 구도는 인간이 감히 어떻게 할 수 없는, 부조리하고 불가피한 약육강식의 세계를 묘사하는 듯하다. 팰리컨들이 사리사욕을 위해 와라와라를 먹는가? 아니다. 더 이상 먹잇감을 바닷속에서 찾을 수 없게 되자 그들은 어쩔 수 없이 와라와라를 먹어야만 하는 환경 속에 살고 있던 것이다. 또한 왜가리의 '나무아비타불'을 말미암아 이것은 불교 윤회 사상의 일부로 간주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와라와라는 죽어 다시 환생할 사람들이고, 팰리컨은 여전히 그 세계를 방황해야만 하는 업을 가진 존재들인 것이다.


 이 지옥이란 곳에서 주요한 것은 '탄생'이다. 응당 지옥 속의 탄생은 모순을 전제한다. 지옥에 사는 존재들이 과연 환생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만한가, 하 윤리적 질문은 중요치 않아 보인다. 그저 주인공 마히토가 어떠한 생명을 탄생시키는 데에 도움을 주고, 그 생명의 탄생 과정을 바라보는 그것만으로 이 세계의 첫번째 이야기로 적합해 보인다.


2. 히미


 이후 마히토는 자신의 어릴 적 어머니인 '히미' 만난다. 처음 그녀는 마히토가 제 미래의 아들인지 모르는 듯하지만, 빵에 잼을 듬뿍 발라 건네자 마히토는 불숙 '어머니'가 만들어준 맛이라 한다. 이때부터 우리는 이 둘의 관계를 짐작했을 것이다.


 마히토의 어머니는 화재로 죽었다. 그리고 히미는  불을 자유자재로 거느릴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 그 힘으로 와라와라를 지키고 마히토를 잉꼬들 사이에서 구해내며 동생 나츠코를 아끼는 것으로 보아 히미는 강하고 당차며 애정이 많은 인물로 보인다. 이는 마히토가, 혹은 하야오가 바란 강한 어머니의 염원, 그들은 그 강함 속에서 나오는 어머니의 사랑이 그리웠을 수도 있다.


 3. 큰 할아버지


 히미를 만남은 곧 큰 할아버지, 신의 세계로 이어진다. 그러나 할아버지의 세계는 얼마 안 가 무너져 내리기 직전이다. 핏줄인 마히토가 그 적임자로서 할아버지 앞에 나타나자, 할아버지는 그 추악한 세상(현실)로 돌아가지 말고 여기서 평화로운 세상을 구축하는 게 어떻냐고 말한다. 하지만 마히토는 자기가 낸 상처를 가리키며 '악의'가 있는 자신은 그런 세상을 만들어낼 수 없다고 선을 긋는다. 그때, 뒤쫓아온 잉꼬 대왕의 반란으로 세상은 완전히 붕괴되기 시작하고 히미와 마히토는 무너져가는 세상을 등지고 문으로 달려다.


 현실에서 넘어온 마히토와 나츠코, 왜가리, 그리고 과거의 차원에 속한 히미와 키리코는 각자 다른 문을 나서야 한다. 마히토는 들어가기 전 히미에게 미래의 당신은 '화재로 죽게 됨'을 밝힌다. 그러나 히미는 널 낳는다는 것이 얼마나 멋있는 일이며 그 말을 무색하게 한다. 그렇게 인물들은 각자의 세상으로 돌아간다. 현실에선 실종된 존재였던 마히토와 키리코가 함께 돌아오게 되고, 왜가리는 신 세계의 모든 걸 기억하는 마히토에게 '어차피 잊게 될 것'이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진다.


 2년 뒤, 나츠코는 출산하고 전쟁은 이미 끝이 났다. 마히토 가족은 다시 도쿄로 돌아갈 채비를 마쳤다. 마히토는 자신의 방에서 마지막 짐을 들쳐메고 가족의 곁으로 향한다.






 나는 7년간 남이 그려낸 남의 인생 이야기가 이토록 담백하고 아름답게 다가올 수 있음에 신기했다. 이 영화가 그 자체만으로 하야오의 인생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영화의 초반부만 보면 꼭 마히토가 하야오를 투영시킨 존재인 것 같지만, 끝까지 보고 나면 큰 할아버지의 모든 부분이 아른거린다. 마히토는 어렸을 적의 하야오를, 큰 할아버지는 현재의 하야오를 보여주는 듯하다. 어머니를 공습의 화재로 여의었다는 것, 내성적이고 말수가 적었던 유년 시절 등 마히토는 설정상 인간으로서의 하야오와 닮아 있다. 큰 할아버지는 그 점에서 다르다. 할아버지는 '어떠한 세계관'을 만들어냈고, 애니메이터로서의 하야오는 오랜 시간 '지브리'라는 한 세계관을 구축해냈다. 할아버지의 세계관에는 현실이 없고, 여러 시공간 속 마치 꿈 같은 모든 것이 생생하게 존재한다. 지브리도 마찬가지다. 어렸을 적 우리에게 많은 환상을 안겨주었던 그 지브리는 우리가 사는 현실 속에 직접 닿아 있기보다 가슴속에 몽환적인 신기루같이 남아 있는 것에 가깝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하야오는 이 마법 같은 세계를 돌연 붕괴시킨다. 그리고는 마히토, 즉 '관객들'에게 질문을 던진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우리의 유년기적 환상이자 노스탤지어는 그렇게 무너지지만, 우리가 과연 지브리가 사라진다고 해도 개인의 삶을 살아갈 수 없는가? 아니다. 할아버지가 마히토에게 돌을 건네며 너의 세상을 쌓아보라고 말한 것처럼, 우리도 우리만의 세상을 우리가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하야오는 저 질문을 던짐으로써 관객들에게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말해준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어떻게 살지를 생각하고 행동하라는 주체의식을 심어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이 영화는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어떤 메시지나 이데올로기가 묻어난다고 보기 어렵다. 때문에 이 영화에서 어떤 메시지를 찾을 수 없는 것은 맞다. 그 메시지는 우리가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그렇기에 신의 세계가 사라지고, 마히토가 밟는 땅은 결정적으로 '현실'의 땅이다.


 하야오가 영화를 통해 전해준 것은 아마 창작물로 구현된 자신의 이야기밖에 없을 것이다. 키리코가 살고 있던 지옥에서의 약육강식과 '탄생', 히미를 통해 보여준 어머니의 강인함은 하야오 개인이 인생을 살아오며 느꼈던 것의 일부일 것이다. 마히토가 처음 탄생을 목격하고 그다음 어머니를 보고, 마지막엔 세계의 붕괴, 즉 '죽음'을 마주함은 이 스토리를 이끌어가는 큰 줄기라고 생각된다. 탄생과 죽음이라는 극단적 상황을 모두 경험한 마히토가 현실에서 과연 어떻게 살아갈지를 상상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고, 우리 또한 어떻게 살아갈지를 생각하는 것은 이 영화의 본질인 것 같다.


 개인적으로 하야오가 창작한 캐릭터 중 재미있는 것은 '왜가리'라고 생각한다. 불교에서는 왜가리를 '깨달은 사람'으로 비유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 왜가리가 '나무아미타불'을 말한 것으로 보아 관련이 없다고 할 순 없을 것이다. 이 영화에서 왜가리만큼은 이 세계 저 세계를 경계 없이 마음대로 드나드는 존재이자 큰 할아버지(신)의 말을 직접 듣고 행동하는 존재이다. 그리고 마지막 마히토에게 '어차피 나중엔 잊게 될 것'이라고 말하는 것까지. 왜가리는 친숙하지만 어딘가 기묘하고 매서우며 고고해 보인다. 신의 세계가 붕괴돼도 전혀 개의치 않아 하며 오히려 후일을 기약하는 이 존재는 과연 '깨달은 사람'인 것일까. 그것은 직접 설정이 밝혀지지 않는 이상 섣불리 판단하긴 어려울 것 같다.


 나는 이 영화가 주는 힘이 꽤 강하다고 여긴다. 마치 '에브리띵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를 처음 봤을 때의 그 느낌이었다. 모든 차원, 시공간을 뛰어넘어 '현실'에 집중하는 영화의 힘을 여기서도 느꼈다. 결코 주입하지 않고 질문을 던짐으로써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분별하고 판단하게 하는 동기부여, 그것만큼 이 영화의 본질적 의미를 꿰뚫는 건 없을 것 같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우리들은 정말 어떻게 살 것인가. 판단은 각자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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