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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erry Dec 01. 2020

저, 서있어도 될까요? (1)

요즘의 기록


요즘의 나는

어디를 가든 서있으려 애를 쓴다.
버스를 타도, 지하철을 타도 서있는 나를 보며 사람들은 왜 앉지 않는지 이상하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3주간 수영을 가지 못하자 골반 통증은 무섭게 재발했고 다시 수영할 수 있는 날만을 기다리는 그 과정은 내 생각보다 꽤나 힘겨웠다.
계단을 오르는 것도, 내려가는 것도 모두 금지당한 나는 시간이 없어도 계단을 힘차게 뛰어오르지 못하고 느리게 올라가는 에스컬레이터에 무기력하게 몸을 싣었다. 계단으로 뛰어갔으면 놓치지 않을  버스를 놓치는 일도 이제는 익숙한 일상이다. 할머니, 할아버지, 혹은 캐리어를 든 청년들 틈에 혼자 멀쩡해 보이는 모습으로 좁은 엘리베이터에 몸을 함께 싣을 때면 괜히 있어서는 안 될 자리에 있는 기분까지 들었다.

등산은 물론이고 집 앞에 예쁜 공원을 마음껏 걷고 뛰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집에서 땀 흘리며 홈트를 할 수도 없는 상황이다.

팔다리는 분명 움직이지만 내가 원하는 대로 사용할 수 없는 이 상황이 너무 싫어 어느 날은 에라 모르겠다 하고 마음껏 달렸더니 역시나 다음날 몸은 정직하게 반응했다..

보이지 않는 벽이 사방에서 나를 둘러싸고 있는 것 같은 이 느낌은 참 암울하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이상하다 못해 웃긴 증상이다. 나를 둘러싼 ‘좌식’ 세계와는 늘 반대를 택해야 한다니.

헬스장에 가서도 러닝머신 30분 걷기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아니해야만 하는 운동이라니.

감옥에 갇히는 일이 생긴다면(물론 없기를 바라지만) 내게 최소한의 호의로 의자가 제공된다고 해도 나는 앉을 수 없다는 상상에 실소가 나왔다.

어디가 아프건, 아프기 전보다 삶의 질이 떨어지기에 우울감이 동반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내가 겪고 있는 이 증상은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크게, 자주 심리적인 고통을 가져온다는 것을 발견했는데, 바로 겉으로 티가 나지 않다는 것이 그 요인 중 하나였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아서, 아니 애써 드러낸다고 해도 공감이 되기보다는 이상하게 여겨질 확률이 더 높아서 최대한 티를 안 내보려 하자, 그 고통이 쌓여 한계에 도달해버렸다.

나는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자리나, 북토크와 같은 다양한 강연에 참여하는 것을 정말 좋아하는데, 앉지 못하는 나로서는 어디를 가든 늘 의자가 있고 본능적으로 준비된 좌석에 앉은 대다수의 사람들 속에 혼자 솟아 있어야 했다. 일찍 와서 자리가 많아도 결국 계속 그 자리에 앉기 힘들다는 것을 알기에 한쪽 구석에 서있기를 택했다. 누군가는 흔히 말하는 ‘선비 노릇’을 한다고 조소할지도 모른다. 스태프가 바 체어라도 가져다주겠다고 하는데도 극구 거부하는 나였기에. 당시에는 의자 수가 많지 않았기에 그게 가능했지, 보통은 내가 일어서기를 택할 기회도 없이 빈 의자들이 나를 기다린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나는 앉기를 거부하지 못한다.

카페에 앉아 친구와 커피 두 잔을 시켜놓고 두세 시간을 마음 놓고 수다를 떠는 그 소박하고 달콤한 행복도 이제 누릴 수 없다는 현재가 참 절망적이다.

사람들을 만나고 싶어도 결국 한 시간도 채 앉지 못하는 나의 상태를 그들에게 설명하는 것도, 그리고 불편함을 느낄 수도 있을까 먼저 연락하기에도, 약속에 응하는 것조차 망설여졌다.

심지어 가장 가까운 가족이라고 해도 내 상황을 완벽하기 공감하기에는 어렵다는 것을 안다.

어쩔 수 없지만 인정해야 했다.

버스를 타자마자 앉을 곳을 열심히 찾았던 과거의 나조차도 지금의 내가 되지 않는다면 영원히 이 고통을 공감할 수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사람은 정말 온전히 그 상대방의 신발을 신기 전까지는 아무리 그 상황을 공감한다 해도 ‘나의 관점’에서 공감한다.

과거의 내가 자리가 있어도 서있는 사람을 볼 때 생각했던 것처럼.  

기분이 안 좋은 날에는 “튀어 보이고 싶어서 그런가”는 삐딱한 생각을 한 적도 있고 기분이 그럭저럭 괜찮은 날에는 “조금 불편해도 양보하려고 그러나 보다.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한 번도 그 사람에게는 그 자세가 편할 것이라는 상상은 단 1도 해본 적이 없었다.


“많이 힘들지, 우리 어디 놀러 갈까? 내가 운전할게”라는 누군가의 순전한 호의가

지금은 내겐 두 시간 동안 차 안에 앉아있어야 한다는 고통으로 다가온다는 것을 그이는 절대 알 수 없으리란 걸 안다.

나 역시도 지난날 누군가가 자신의 불편함을 내게 호소했을 때 그 사람의 지금 심정은 어떤지, 무엇을 원하는지 물어보기보다는,

그 아픔에 대한 이유나 원인을 계속 묻거나, 어설프게 축적된 경험과 지식을 열거하며 이 병원에 가라, 이 치료를 해봐라 하며

그 사람을 더 피곤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상처를 안 주면 다행이었을까.

내 신발을 벗지 않은 이상 그 관점에서 벗어나기란 정말 어렵다.



한 라디오 방송에서 이슬아 작가가 자신은 허리가 아파 일어나서 참여하겠다는 모습을 보고 무한한 동질감을 느꼈다.

내가 저 자리에 있었어도 저렇게 물어볼 수 있었을까.

방송을 망치는 것도, 상대방에게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닌데 나는 분명 그 한마디를 손쉽게 꺼내지는 못했을 것 같다.

조금의 눈치와 고민을 거듭한 끝에 어렵사리 입밖에 꺼냈을지 모르겠다.


생각보다 진짜 어렵다.
나 같이 상대방을 불편하게 만들고 싶지 않도록 애쓰는 사람은 더더욱 이 말을 건넸을 때 미묘하게 변하는 상대의 표정을 놓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가급적 이 말을 안 건네고 싶지만, 아직은 쉽지 않다.

그래서 오늘도 용기 내어 이 한마디를 입 밖으로 내어본다.

살기 위해서.

“저, 서있어도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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