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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e Kim Nov 06. 2016

진저리 쳐지게 뻔하고, 눈 돌아가게 이국적인 이 도시

미대륙에서 가장 큰 도시라는 멕시코 시티. 이 거대한 도시에는 한 장면에 담길 수 없는 불협화음 같은 풍경이 한데 뒤섞여 있다. 합성 같은 비현실적인 사진. 실패한 CG처럼 어색한 그림. 


또르띠야 빵을 바삭하게 말리는 풍경(?)


과거 위에 서 있는 현재

세계에서 내로라하는 어떤 메트로폴리스에도 뒤처지지 않을 현대식 건물은 여기도 있다. 그리고 돈만 있다면 세상의 모든 문명의 이기, 세상의 모든 화려하고 아름다운 것들은 여기에서도 얻을 수 있다. 그런데 이 모든 게, 수백 년 전 과거가 박제된 것 같은 전통과 나란히 서있다. 우스꽝스러우리만치 뒤죽박죽 섞여서.


멕시코 시티의 내 나이 또래의 청년들은 떠나온 곳에서 본 것과 똑같은 모양의 수염을 기르고 안경을 쓴 채 날렵한 자전거를 타고 매연 가득한 도시를 맵시 있게 달렸다. 뉴욕 브루클린, 몬트리올, 혹은 서울 연남동 어딘가에서 봤을 법한 비슷비슷한 행색을 한 힙(hip!) 터지는 카페가 이곳에도 있었고, 최근 뉴욕 곳곳에 우후죽순으로 들어서고 있는 미국 남부 BBQ 요리점과, 친환경 스타일을 표방하는 샐러드 바와 야채주스 가게도 있었다. 


흡사 지구촌 마을 유니폼이라도 입은 것 같은 젊은이들의 의상, 비슷비슷한 디자인의 한결같이 세련된 식당과 편집샵, 시차 따위는 없이 복사/붙여 넣기 한 듯한 문화 예술의 트렌트까지... 그리하여 내가 지금 3,000km가 넘는 거리를 날아와 여행 중이라는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릴 때 즈음에 나는, 아까 본 힙스터 청년이 자전거에서 내려 전통 의상을 입고 머리를 양갈래로 길게 땋아 내린 원주민 할머니에게서 *타말을 사 먹는 풍경을 만나는 것이었다. 

*타말: 옥수수 반죽에 살사 소스를 넣고 옥수수 잎으로 말아 쪄낸 멕시코 전통 간식


종 잡을 수 없는 풍경은 계속 튀어나왔다. 대부분의 멕시코 사람들은 가톨릭교인이면서도 잡신을 섬겼고, 골목 하나 건너 나타나는 성모 마리아 상 앞에 성스럽다는 허브 꾸러미와 꽃을 바치며 기도를 올렸다. 스튜디오에 출근한 어떤 하루는, 전 직원이 모여 나무에 매단 편지와 돈을 불태우며 기도를 올리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사무실로 돌아가 업무를 시작하는 풍경을 만나기도 했다.



부대끼며 살아가는 극빈과 극부

상상 초월의 부와 생존과 투쟁해야 하는 절대적 가난은 골목 하나를 끼고 교차했다. 다닥다닥 늘어선 판잣집에 다름없는 건물들, 개발의 회오리 속에서 버려진 도시 슬럼 건너편에는 흡사 감옥 같은 높은 담벼락을 세운 호화 주택 앞에 바지춤에 장총을 찬 경비원이 근엄하게 서 있었다. 그 둘을 나누는 일말의 분리선이나 장막은 없었다.


한 끼 식사비가 뉴욕의 하루 일당을 호가하는 최고급 요리점의 그 생기 넘치는 화려함에 놀라고 있지면, 바로 그 면전에 한 뭉텅이에 200원이 채 안 되는 깨강정과 두 아이를 들처매고 거리를 헤매는 도시 빈민이 있었다. 들고 나온 물건을 다 팔아도 한 끼 식사나 제대로 할 수 있을지 걱정을 하고 있는데, 이 허접하기 이를 데 없는 길거리 장사로 생계를 꾸려나가는 이들의 얼굴이 너무 젊다. 그것은 삶이라는 무대 막바지를 보내는 늙고 무기력한 노인이 얼굴이 아니었다. 그들은 정말 진지하게 그것으로 생계를 벌고자 하는 듯했다. 그 젊은 얼굴에 삶에 대한 의지가 불뚝 보이는 것에 당황하여 나는 몇 번이나 눈을 바닥으로 내리깔았다.


어느 날 평범한 직장인 멕시코 친구의 초대를 받고 간 캐쥬얼한 하우스 생일 파티에서는, 흰 셔츠에 턱시도를 입은 바텐더가 파티 내내 모두의 술을 따라주기도 했다. 말도 안 되는 수준의 저임금 노동인구가 무제한으로 제공되는 이곳은, 자본을 가진 자에게는 쉽게 돈을 벌어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는 기회의 땅, 없는 자는 그 삶의 난관의 대물림을 끊을 그 어떤 희망도 없는 생지옥이다. 이제는 상투적이기까지 한 세상 도처에 널린 이 격차와 불합리가, 나는 새삼스럽게 잔인했다. 이곳의 두 극단 사이에는 이 모든 것을 카스트라 부르며 운명에 탓을 돌릴 그럴싸한 변명도 없으니. 현지 주민, 관광객을 가리지 않고 빈번히 벌어진다는 택시 납치 강도 이야기가 자꾸 생각났다.


그런데, 사랑이 넘치는 이 팍팍한 도시! 

그런데 이상하다. 이 팍팍하고 정신없는 도시에는, 그에 걸맞지 않은 엄청나게 따뜻한 사람들이 살고 있다. 거리 여기저기는 서로를 꼭 껴안고 보듬고 뽀뽀를 나누고 깔깔거리는, 바라보기만 해도 나까지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를 만큼 달콤한 연인들로 들끓었다. 사람들은 길거리 타코 가게에 들어설 때 모르는 사람들에게 "본 브로베초! (모두들 식사 맛있게 하세요!)"라고 상냥한 인사말을 주고받기를 좋아했고, 장소를 가리지 않고 음악과 춤추기를 즐겼다. 통근시간과 한낮을 가릴 것 없이 거의 늘 만원이었던 멕시코시티의 악명 높은 지하철 안에서 뒤엉켜서도, 사람들은 한 번도 인상을 찌푸리거나 화를 내는 법이 없었다.(물론 나만 빼고) 특히, 모두가 구겨질 데로 구겨져 가득 채워진 지하철 안에서, 다시 한번 팔과 다리를 구겨 접으며 노인과 여성에게 자리를 만들어주는 풍경은 정말이지 충격적일 정도였다. 아니, 이 사람들은 왜 이렇게 친절하고 다정한 걸까? 이 사람들의 따뜻함의 원동력은 대체 뭐지? 



그렇게나 따뜻한 그들의 대화 방식 중 가장 이해할 수 없었던 재미있었던 점은, 약속을 할 때부터 이미 지키지 않을 거란 걸 서로가 알면서도 약속을 하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그렇게 아주 많은 약속들을 그들만의 다정한 방식으로 나누었다. 약속의 이행 여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냥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우리가 기분 좋게 웃었으니 그걸도 되었다는 식이랄까. '그래, 이번 주말에는 멕시코 시티 근교에 있는 꼬요깐의 우리 집으로 놀러와! 유명한 프리다 미술관이 근처에 있는데 너랑 꼭 함께 가고 싶어!' 혹은 '우리 다음 주에는 XX 타퀘리아에 같이 가자. 멕시코시티 최고의 타코 맛을 보여줄게!' 평소 한 진지하는 성격인 나는, 이 공수표들을 제까닥 제까닥 입금 처리하여 결국 여행 중반 즈음에는 심리적 부도 사태를 맞기도 했다.


하루는, 함께 간 짝꿍의 일터에서 급한 오픈 일정을 앞두고 작업을 도와주는 인부가 사다리에서 떨어져 크게 다치는 사고가 있었다. 빠듯한 일정으로 일손이 급하게 필요했던지라 일터 앞 시장으로 달려가 날품팔이 인부를 구했단다. 품삯도 평소 그가 받는 일당의 두배나 주기로 하고. 하루 일과를 마치고 다음날도 아침 9시까지 나오라고 했을 때, 그는 두둑해진 지갑을 보며 신나서 그러겠다며 집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다음날, 아침 녘이 다 지나고 오후 두 시가 넘도록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시장을 샅샅이 뒤지며 한바탕 소동을 치르고 있자니, 저쪽에서 해장용 타코를 한 손에 들고 휘파람을 불며 나타나는 그 사람! 어제 오랜만에 큰돈이 생겼으니 코가 삐뚤어지게 술 한잔하며 기분을 한껏 냈단다. 얼굴에는 미안하다는 표정도 전혀 없이 마냥 행복한 표정으로! 그에게 '내일' 또 얻을 수도 있는 두배의 일당 따위는 중요하지 않은 듯했다. 후에 그날의 고생 담을 이야기를 하니 사업을 하는 멕시칸 친구가 한소리를 보탠다. 사무실에서 일하는 정직원을 뽑아도 고향에 이틀 다녀온다고 하고는 일주일씩 나타나지 않기가 일수라고.


'그럼 해고하고 다른 사람을 찾아야 하지 않아?'

'무슨 소리야. 그래도 그녀가 그래도 제일 성실하고 믿을 만한(?) 편이라고.'

'......'


아, 때로 진저리처지게 뻔한가 싶다가도, 눈이 돌아가게 생경한 이 도시와 사람들.


그러니까 한마디로, 이 모든 것들을 이해하기엔 두 달이 너무 짧았다는 이야기다. 알다가도 모르겠는, 탄성 섞인 비명이 나오는 이곳. 그리고 이곳을 떠나야 할 시간이 벌써 성큼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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